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과 돌계단. 그 계단을 오르면 손오공 이미지를 지닌 돌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계단 면석에 돋을새김(양각)을 한 화문(花紋), 즉 꽃문양을 만날 수 있다. 전통건축에서 시선과 수평되게 볼 수 있는 석부재는 면석(面石), 반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볼 수 있는 면은 갑석(甲石)이라고 한다. 사람은 직립하는 까닭에 거북의 등을 보려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갑석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법주사 대웅보전 계단면석의 문양을 연꽃으로 여기고 있다. 법주사 종무소 관계자도 전화통화에서 "지금까지 연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꽃문양을 연꽃으로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연꽃은 꽃잎이 겹을 이루면서 수직으로 핀다. 국보 제 64호인 법주사 석연지의 연화문도 그런 문양으로 돋을새김을 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 꽃문양을 법주사 창건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길상초(吉祥草)로 보고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길상초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연한 자주색의 꽃을 10cm 정도의 꽃대 위에 피운다. 고대 불교경전
[충북일보] 2016년이 병신년(丙申年)인 가운데 충북도내에는 원숭이와 관련 지명이 보은군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원숭이는 국내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어서 '왜 그럴까'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매년 연말을 맞으면 새해 십이지[띠]와 관련된 전국의 지명 통계를 발표해왔다. 그러나 내년의 경우 국내 생존하지 않았던 원숭이의 해가 되면서 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는 원숭이 관련 지명이 국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도내에서 원숭이의 접두어인 '원'에 해당하는 지명은 △遠형 △院형 △元형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遠형 지명은 단양 대강 당동리의 원평(遠坪·순우리말 지명은 먼들), 괴산 청천면 덕평리의 원운(遠雲·〃멀운이), 단양 영춘면 남천리의 원곡(遠谷·〃멀곡) 등이 있다. 院형의 지명으로는 영동 황간면의 원촌리(院村里), 옥천 이원면의 원동리(院洞里), 보은 마로면의 원터(院터) 지명이 있다. 이 가운데 원터는 조선시대 왕래원(王來院)이라는 원이 있던 곳이다. 元형 지명으로는 청주시 문의면 도원리의 '원장발'과 같은 면 두모리의 '원두모'가 있다. 원장발은 장발 마을
현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수몰기념관 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제 80호인 '우화교 신사비(羽化橋 新事碑)'가 위치한다. 독특한 이름의 이 비는 '우화교를 새롭게 놓고 세운 비'라는 뜻을 지닌다. 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 115m의 크기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이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량이었다. 그런 우화교의 '우화'는 설화에 의하면 다리를 건널 때 날개가 돋아난다, 즉 선인(仙人)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충주댐이 수몰되기 전의 일대는 주변 숲과 단양천이 어울어지면서 마치 선경(仙景)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때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마치 날개가 달린 선인같다고 해서 우화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언제인가 대홍수로 인해 파괴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 우화교가 그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구한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화교 곁에 있었던 우화교 신사비는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지난 1985 옛 군청 자리인 단성면 상방리 9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다시 수몰기념관 경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 우화교를 세운 인물은 당시 단양군
경사면을 활용해 축조한 새로운 유형의 고인돌[지석묘]이 우리나라 고고학상 처음으로 충북 제천에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이 고인돌 땅속에서는 불에 탄 돌도 출토되는 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다양한 문화 흔적들이 발굴됐다. 세종대 하문식 교수는 지난해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평동마을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최근 〈고인돌의 성격에 대한 한 예>(고조선단군학 제 32호)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평동마을 민가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 이번 고인돌은 △긴 네모꼴 △380x50~140x105㎝ 크기 △흑운모 화강암 성분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의 방향은 백운산 산줄기와 제천 샛강인 원서천과 같은 서-동 방향으로, 당시 축조인들이 방위를 의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고인들은 그 동안 국내 학계가 분류해오던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축조 방식이어서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한반도 고인돌은 크게 땅 위에 노출된 덮개돌, 지하 부분, 그리고 덮개돌을 괴는 굄돌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탁자식은 굄돌이 높은 양식으로, 전문가들 사이에 속칭 '롱다리 고인돌'로 불
- 1년 동안 계속된 연재가 지난주에 끝났다. 마치 대하소설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이번 시리즈를 기획한 의도는 무엇인가. "올해는 국가적으로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의 뜻 깊은 해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반추하고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방안으로 충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에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건국훈장 독립장 이상 수여자 43분을 조명하기로 한 것이다." - 다른 지역과 비교한 충북 의병활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올해는 제천의병 1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 등에 대항하여 전기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령부 역할을 제천이 하였던 것이다. 제천을 중심으로 한 충북의 의병은 중기와 후기의병사에서도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며 전국의 의병항쟁을 선도하였다." - 역사적 흐름을 보면 의병활동을 이어받은 것이 독립운동이다. 역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충북 독립운동의 특징은. "사실 충북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소재나 자산이 다른 지역보다 많거나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충북 출신 인물이 많다는 것은 자부할 만하다." - 개인
'꽃은 5∼8월에 검은 홍자색으로 피는데,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자루 끝에 위를 보고 1개씩 달린다.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종자는 물 속에서 익는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 순을 식용한다. 어린 잎은 지혈·건위·이뇨에 약용한다.' 제천 의림지의 명물인 순채(蓴菜)에 대한 식물학적인 설명이다. 제천 순채는 문헌상 조선 전기부터 등장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제천의 토산(土産)으로 신감초(辛甘草)·순채·홍화(紅花) 등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는 순채와 제천 의림지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의림지와의 관련성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순채[蓴]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라고 표현, 그 출처를 분명히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제천 의림지 순채는 조선 문인들의 단골 시주제가 됐다.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농암집》을 지은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있다. 그는 '자익과 함께 의림지에서 시를 짓다'라는 시에서 제천과 의림지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넓디넓은 푸른 못 그리 아니 맑은데 / 교룡이며 어류들 생명 부쳐 살아가네 /
고려 성종 때의 제천 별호(別號·특별 명칭)인 '의천(義川)'과 전통시대 축조된 의림지(義林池)는 '의' 자를 어두에 공유하고 있다. 이는 두 지명이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은 이와 관련하여 "의림지의 본래 지명은 '임지(林池)'였는데 여기에 '의(義)' 자가 붙어 의림지가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전은 이때의 '의' 자를 성종 때의 별호인 '의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이 설을 따른다면 제천 의림지의 본래 이름은 '임지'였으나, 별호 '의천'이 생겨난 후 지금의 이름인 '의림지'를 갖게 된 것이 된다. 의림지의 작명 시기가 곧 축조 연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의림지의 역사성은 그만큼 짧아지게 된다. 조선 세종~성종 연간의 인물로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 있다. 그는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한명회의 살생부대로 철퇴를 휘두른 인물로 우리고장 보은 회인 출신이다. 그가 경연(經筵)에 나가 성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조선시대 경연은 임금과 대신이 국정의 현안과 유교 경전에 대해 이야기는 나누는 정학(政學) 토론의 공간이었다. 성종: "연안(延安)의 남대
[충북일보] 국보 제205호인 충주고구려비는 당시 국원성〔충주〕 주민들의 신라 망명 예방이 주된 목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기존 학설중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충주고구려비=회맹비(會盟碑)' 설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회맹비는 양국이 상호 합의한 정치·외교적인 내용을 새긴 비를 일컫고 있고, '회맹'은 '만나서 약속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국대 김병곤 교수는 얼마전 논문을 《지역과 역사》 제 36호를 통해 발표하였다. 지금까지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성격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왕의 치적을 적은 공적비 △국토를 개척하고 세운 척경비 혹은 순행비 △신라와 형제 관계를 맺고 세운 회맹비 등의 주장이 존재해 왔고, 이중 세번째 설이 폭넓게 수용돼 왔다. 건립 연대는 대략 5세기 초반~6세기 초반설이 제기돼 있는 가운데 당시 고구려왕은 장수왕 혹은 그의 아들인 문자왕으로 추정돼 왔다. 이중 '충주고구려비=회맹비' 설의 근거가 된 것은 '世世爲願如兄如弟(세세위원여형여형)', 즉 '영원토록 형과 동생같이 지내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교수는 판독 가능한 충주고구려비 문장 가운데 '奴客(노객)', '敎(교)', '東夷寐錦(동이매금)'
[충북일보] 최욱영(崔旭榮, 1854~1919)은 제천 출신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구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후 이강년 부대에 들어가 군사장으로 활동하다가, 이강년이 일제에 체포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였다. 1913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김재성과 함께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경북·충북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비밀결사 민단조합에도 참여함으로써, 의병항쟁이 1910년대 비밀결사로 계승되는 추이를 보여준다. ◇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다 최욱영은 1854년 10월 7일 충북 제천군 제천면 고명리(현재, 충북 제천시 수산면 고명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송산(松山), 호는 청계(淸溪)이다. 그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하나,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가계와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향인 고명리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묘비에 짤막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성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나라가 침략당하고 식민지화되어가는
[충북일보] 돌계단은 전통 건축에서 디딤돌, 계단면석, 소맷돌, 지대석 등으로 구성된다. 디딤돌은 발바닥이 닿는 면으로 한 칸 한 칸 디디고 올라가는 돌, 계단면석은 양측면을 막은 판석을 말한다. 그리고 지대석은 계단 맨아래 위치하는 돌로 땅과 접촉하고 있고, 소맷돌은 계단면석 위에 올려져 있는 양쪽의 돌난간을 말한다. 소맷돌은 40도 내외의 경사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이를 설치하지 않는 계단도 있다. 그러나 경사가 심하고 디딜돌의 수가 많을 경우 보행자 안전을 위하여 소맷돌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맷돌 아래쪽 끝에는 법수(法首)로 불리는 기둥석이 세워지기도 하고 그 위에 귀면, 동물, 연꽃 등의 조각이 장식되는 사례가 많다. 충북 불교의 종가인 속리산 법주사를 찾으면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고, 여기에도 여느 대형 사찰 건물처럼 돌계단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 돌계단을 무심코 오르다 보면 소맷돌 끝에서 원숭이 조각상과 마주친다. 원숭이는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포유동물로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따라서 법주사 경내에 불쑥 들어와 있는 원숭이 조각상은 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신화에 '하누만'(Ha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