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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12.22 14:37:47
  • 최종수정2015.12.22 14:37:49

조혁연대기자

현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수몰기념관 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제 80호인 '우화교 신사비(羽化橋 新事碑)'가 위치한다. 독특한 이름의 이 비는 '우화교를 새롭게 놓고 세운 비'라는 뜻을 지닌다.

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 115m의 크기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이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량이었다. 그런 우화교의 '우화'는 설화에 의하면 다리를 건널 때 날개가 돋아난다, 즉 선인(仙人)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충주댐이 수몰되기 전의 일대는 주변 숲과 단양천이 어울어지면서 마치 선경(仙景)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때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마치 날개가 달린 선인같다고 해서 우화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언제인가 대홍수로 인해 파괴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872년 단양군지도>에 우화교가 그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구한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1872년 단양군지도>의 우화교.

우화교 곁에 있었던 우화교 신사비는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지난 1985 옛 군청 자리인 단성면 상방리 9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다시 수몰기념관 경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 우화교를 세운 인물은 당시 단양군수였던 이기중(李箕重:1697~1761)이다.

우화교 신사비에 의하면 그는 우화교를 건설하고 1년 후인 1754년(영조 10) 이 비를 세웠다. 그는 당시 단양지역 백성과 경상도 사람의 상경 편의를 위해 우화교를 가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 건설 하나가 당시 단양 주민들의 호구지책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단양 주민들의 삶은 무척 팍팍했고, 따라서 고향을 등지는 실향민이 속출했다. 임금 영조가 이기중에게 주민들을 안집(安集)시키도록 엄중한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자는 많지 않았다. 단양과 궁벽하기를 다퉜던 지금의 보은 회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영조는 탄식했다.

'아, 저 단양과 회인의 유민(流民)들도 역시 나의 적자(赤子)이다. 적자가 유망(流亡)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안집하게 하였으니 비록 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여도 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늦추어질 것인가 아닐 것인가.'-<비변사등록 영조 33년 7월 2일>

영조는 그럼에도 귀향자가 늘어나지 않자 '전 단양군수 이기중과 김정겸은 일찍이 이러함을 짐작하였을 것인데 지금 서계를 보니 더욱 터무니없다'(〃)라는 말로 이기중을 징벌하였다. 이기중은 그로부터 2년 후에야 정치적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같은 날 입시하였을 때에 전교하기를, "이기중·김정겸·노언익·박명양·홍익철은 아울러 금고(禁錮)를 탕척(蕩滌하고….'-<비변사등록 영조 35년 1월 14일>

인용문 가운데 금고는 하옥하는 것, 탕척은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영·정조 시대를 가르켜 흔히 문화 르레상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토지 등 부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상당수 농민들은 전호(佃戶·임대농)로 전락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유랑민이나 초적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고장 단양도 예외는 아니었고, 얼마안가 북쪽에서는 홍경래난(1811), 남쪽에서는 임술민란의 서막을 알리는 진주민란(1862)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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