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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2.22 17:05:10
  • 최종수정2024.02.25 14:14:22

김현정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연희전문학교 2학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의 시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에는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대하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 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스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色)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襤褸),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애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시인은 고갯길에서 "사이다병, 간스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이 담긴 바구니를 멘 세 거지소년들은 만난다. '무서운 가난'으로 인해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色)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襤褸), 찢겨진 맨발"이 된 그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 그렇다고 하여 호주머니에 있는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등을 그들에게 건넬 용기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다정스럽게 얘기를 하려고 그들을 불러보지만,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보며 고개를 넘어간다. 식민지현실을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처참한 삶의 모습과 가난한 이웃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투르게네프'는 다름 아닌 러시아 대문호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를 일컫는다. 윤동주의 시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투르게네프가 말년에 지은 산문시 '거지'(1878)를 패러디한 것이다.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어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 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 없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 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積善)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이 시에서의 '나'는 호주머니에 거지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난감해한다. 그리하여 그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더러운 손"을 덥석 잡으며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구려"라고 간절하게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積善)이니까요"라는 거지의 의외의 말을 듣고, 시인은 적선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거지의 "눈물 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다가가 동화(同化)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송경동의 시 '가장 오래된 백신'(2022)은 인도의 열다섯 살 소녀가 코로나로 인해 실직한 부상당한 아버지를 자전거에 태우고 뉴델리에서 1천200㎞를 달려 고향에 도착한 미담(美談)을 보여준다.

코로나19로 국가봉쇄령이 내려진/ 인도 수도 뉴델리 외곽/ 삼륜인력거꾼으로 일하던 아빠와 세 살던/ 열다섯 소녀 조티 쿠마리// 정지된 세상을 따라 인력거도 멈추고/ 때마침 다리마저 다친 아빠/ 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무서운 주인/ 수중에 남은 돈은 한화로 고작 3만 3천원// 아빠, 고향으로 가자고/ 남은 돈 털어 분홍색 자전거 한 대 사고 나니/ 수중에 남은 건 물 한 병/ 그렇게 아빠를 태우고 1200㎞를 쉬지 않고 달린 소녀// 어떤 재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끝내 살리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가르쳐 준 소녀// 그 소녀와 사내에게 제 몫의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 덜어 준 이웃들이 함께 이룬/ 경이로운 삶의 내연/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은// 오직 사랑뿐

소녀는 "제 몫의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 덜어 준" 이웃들의 도움으로 부상당한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어떤 재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끝내 살리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난과 질병은 어느 시대에든 늘 있어 왔다. 이 가난과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따뜻한 공감'과 '사랑', '희망'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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