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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구

전 예성문화연구회장

제법 가을 기운이 온 산하에 드리울 때다. 휴대폰에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는 동영상이 마구 실린다. 밤송이가 벌어지고 대추가 갈색으로 옷을 입은 사진들이 난무한다. 누군가는 찾아 온 가을을 만끽하며 즐거워 하고, 또 다른 이는 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안타까워 한다. 그 틈새에서 갈피를 못잡고 혼자 혼란스러워 가을 핑계를 업고 훌쩍 길을 나섰다. 사과가 발갛게 익어가는 과수원 안에 자리잡은 억정사지 대지국사비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목에 보았던 옛 담뱃잎 건조실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잡아 버렸다. 또 하나의 추억이 우리 곁을 떠났다. 주변에서 우리네 삶의 흔적이 그저 소멸되고 있는 것을 변화이고, 추세라고 치부하기에는 서운함이 밴다.

규모있는 대지국사비 앞에서 권력 앞에 줄을 잘 서야 된다는 서글픈 사실을 저리게 느낀다.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보각국사 환암 혼수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축하를 보낸 덕분인지 왕실 건축 형식의 정혜원융탑이 건립돼 우리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대지국사는 고려 우왕 때 왕사를 역임하면서 태고 보우의 맥을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달랑 비석 하나 남기고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확실치는 않지만 거대한 신만리 부도재가 대지국사 부도의 일부였기를 은근히 바래본다.

어쨌든 따사로운 가을볕을 정수리에 쬐면서 옆에 있는 경종 태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혈이 뭉친 기운을 느낄 수 있을만치 작은 태봉 위에 자리한,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도 조선 왕실 위엄이 느껴지는 태실을 본다. 조선총독부 시절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산재한 조선 왕실의 태항아리를 전부 들어내어 고양의 서오릉으로 옮기고 태실을 파괴한 것이다. 엄정 괴동리의 경종 태실도 화를 피할 수 없었지만 향토사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당시 중원군청 공무원이던 김예식씨에 의해 복원돼 완벽한 모습으로 재탄생됐다. 개인의 노력에 의해 우리 문화재가 되살아 난 업적은 소수의 향토사학자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춘리 태실이 파괴된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태봉 입구에 조그만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노인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태봉 관리를 맡은 다섯 분이 모여 잡초를 제거하면서 도란거리는 모습이 그나마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임오군란 시 충주로 피난 온 민비에게 조만간 한성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는 예언을 계기로 승승장구 출세길을 달리던 무녀 진령군에 의해 세워졌다는 조그만 절이 백운암이다. 암자로 올라가는 길이 꽃도 많았고 나무도 울창해 참 기억에 남는 곳이었는데, 작년 수해로 상처가 많았다. 아직 복구가 진행 중이어서 흉한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암자는 여전히 조용했다. 군더더기를 볼 수 없는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암자 대웅전 보좌 위에는 조그만 체구의 철조여래상이 좌정하고 있었다. 철불이면서도 강인함보다는 온유함을 내뿜고 있다. 충주 소재 세 개의 철불 중 가장 먼저 주조된 철불로 알려져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좋아할 만치 작은 얼굴을 보인다. 철불보다 절집 안 곳곳에 알맞게 자리잡고 피어 있던 꽃들과 간섭없는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자세는 아닐 것이지만 문득 그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추평저수지 한 구석에는 고여 사당이 있다. '충원사'라는 현판이 낡은 채로 달려 있다. 고여(高呂)라는 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했고 태조가 왕자의 난을 피해 함흥으로 떠날 때 이를 호종한 업적으로 좌리개국공신(佐理開國功臣) 고성군(高城君)으로 책봉되신 분이다. 충원사 내부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이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종친회에서 관심도 없고, 제사도 봉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족보의 선조사적편(先祖事蹟篇)에 자랑스럽게 고여의 신도비명, 행록(行錄) 등을 게재하면서도 막상 사당을 방치한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씁쓸함을 안고 되돌아 나오는 길에는 가을이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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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