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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의 역사와 애환 - 노근리 쌍굴다리와 마차다리

경부선 철도의 한부분…아픈기억 간직한 노근리 '쌍굴다리'

  • 웹출고시간2012.10.24 18:10:0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영동에는 6.25의 참상을 가장 잘 전해주고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당시의 아픈 기억을 다시 되새겨주고 있다. 읍내를 연결하는 마차다리는 1900년도에 건립된 것을 다시 신축한 것으로 영동이 국토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근리 쌍굴다리

노근리 쌍굴다리

노근리 쌍굴다리의 역사는 6.25와 함께 한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지난 1950년 7월26일 미군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 500여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모아놓고 무스탕 전투기로 기총 소사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한 피난민들은 철교에서 뛰어내려 굴다리(노근 쌍굴)로 숨었으나 미군은 굴다리 앞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29일까지 굴다리를 빠져나오는 양민을 차례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영동군청에 신고된 피해자수는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다.

노근리 주민들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난 1960년부터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99년 9월 AP통신 보도로 노근리 사건이 세계의 주목을 받자 그해 10월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협의에 착수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진상규명 지시가 있은 후, 노근리사건 정부대책단 및 진상조사반이 구성됐다.

2001년 1월 12일 노근리 사건 한·미양국조사단은 공동 발표를 통해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사건 실체를 인정했으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날 노근리 사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사격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후 2004년 2월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4년 7월부터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9년 9월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와 진실을 파헤쳐 전세계에 알린 3명의 AP기자는 이 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노근리 사건 안내도'

노근리 쌍굴다리 입구의 '노근리 사건 안내도'에는 사건 발생일을 1950년 7월25~29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사건 경위는 7월23일 정오 영동읍 주곡리마을 소개명령(주곡리 주민 임계리로 피난), 25일 저녁 영동읍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500~600명을 미군이 남쪽으로 피난 유도. 25일 야간 영동읍 하가리 하천에서 미국에 의해 피난민 노숙, 26일 정오경 4번 국도를 이용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미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변경, 미군 비행기 폭격 및 기총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다수 사망, 26일 오후 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피난민 사망 등이 기록돼 있다.

바로옆에는 노근리 위치도와 피난민들이 이동경로 등을 상세히 안내하고 있어 당시 피난민들이 살생되는 처참했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다리는 대한민국근대유산 등록문화제 59호로 등록이 돼 있다.

#마차다리

영동제1교

영동읍내에 있는 마차다리는 1900년도에 영동에서 마차가 다닐수 있는 유일한 다리라고 해서 마차다리로 불려지고 있다. 현재의 명칭은 영동제1교다.

다리옆 부용유래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여기 부용리(역말)는 신라때 길동균 경덕왕 16년(AD758)에 영동현 남남일면에 속하였으며 1909년에 영동군 군내면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역말 성안 봉두골 쇠명통골 앞주막 을곡 야자걋골 어서실 남일면의 음지갯골을 병합하여 부용산의 이름을 따 부용리라 해서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전라 경상도의 갈림길로써 교통통신 수단으로 군사정보의 전달, 물자수송, 관리들의 여행편의, 사신들의 영송등에 쓰기 위한 사람이 타는 기마와 짐을 운반하는 복마를 준비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조선시대부터 역말이라 불리었다.

우뚝솟은 삼봉산과 천마산을 근원으로 하는 이수의 맑은물이 쇠청들을 풍성한 오곡으로 가득차게 하였으며 금성산의 푸른기상과 정기를 이어받은 우리 주민들을 순박한 양심으로 흙에서 진리를 찾는 동안 숱한 수난과 갈등 그리고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작금의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여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창조하며 살아왔다.

신라 무열왕 7년(660) 3월에 나당연합군이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장군과 싸웠을때 용맹을 떨치고 전사한 품일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의 넋을 영원히 기리고자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중곡동 금성사 이다.

성내동 향교는 태조 원년에 관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패로써 지방관 고과의 법으로 삼고 교학의 쇄신을 꾀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비로소 선조때 설립되었다.

그후 현종 원년(1660)에 옛 읍 성안으로 옮겨졌다가 숙종(1676) 2년에 생기골로 이전했다. 다시 영조(1754) 30년에 지금의 성내로 옮겨 대성전 명륜당 노후사 등이 있으며 공자를 비롯한 오성 이십이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 석전제를 배향하고 전통혼례 명소로 이용되며 여름에는 청소년들에게 한문과 옛 풍습을 가르치는 곳으로 이름나 잇을 뿐 아니라 공자의 인 정신과 인본주의 사상을 폭넓게 교화함으로써 효제충신과 수제치평의 문풍을 진작하고 명륜이념을 계명함에 힘입어 경술국치후 오욕과 통한의 민족 대수난의 식민지화 속에서도 영동농업고등학교 개교(1936) 태동의 요람이 되기도 하였다' 는 등의 비문이 놓여있다.


마차다리 인근에는 영동이 남한의 중심임을 표시하는 도로원표가 있다.

도로원표의 표시에는 서울 192㎞, 대전 45㎞, 수원 161㎞, 옥천 26㎞, 청주 79㎞, 보은 46㎞, 충주 135㎞, 상주 59㎞, 부산 235㎞. 경주 166㎞, 대구 101㎞, 김천 39㎞, 광주 205㎞, 목포 288㎞, 무주 26㎞, 금산 33㎞ 등의 거리표시가 있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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