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어가는 1464년 2월 26일 청주를 출발하여 피반령(皮盤嶺·360m)을 넘어 회인에서 1박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를 남북으로 잇는 피반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역사성이 오래 됐다. 세조 어가는 27일 보은 동평을 지나 병풍송에서 1박했다. 이때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가 영접나와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 어가는 그 다음날(28일) 충청도 순행의 맨 남쪽 꼭지점인 속리산 중턱의 복천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속리사(俗離寺)를 경유하기도 했다. '임금이 속리사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 30구, 전지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로, 이날 복천암이 세조로부터 받은 전토는 60만평이나 됐다. 위 인용문은 눈여겨 볼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3일 청주에 도착해 이틀간 머물렀다. 이때 세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실록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유생, 창기의 노래 환영이 있었고, 104살의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시를 바친 것으로 나타난다. 세조는 그 노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노인에게 주육을 하사하였다.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나이 1백 4세이나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므로 임금이 그 노인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포와 술 및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당시 세조의 어가를 호종, 경호군사를 총괄 지휘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이었다. 그는 경호군사들의 군기와 관련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청주도착 이틀째 되는 날 갑자기 인원 점검을 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순행과 관련해 가장 풍기문란적인 내용이 적발됐다. '이어 종친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발하게 하였더니, 의정부 사인 성윤문이 민가에 투숙하였고, 사대장 김처의가 군을 버리고 마을에 들어갔으며, 예조좌랑 이수남·이길보는 기녀를 데리고 민가에 투숙하였고, 또 충찬위 이세정은 술에 취하여 길가에 누워 있었다.'- 경호원들의 행동을 유형별로 요약하면 △민가 투숙 △기녀와 동침
세종대왕 때 청주목 초수리 행궁을 건립한 사람은 김흔지(金人+完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세종의 어가보다 한달 먼저 초수리에 내려와 행궁 건립을 시작했다. 이때가 1444년(세종 26) 1월 27일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內贍寺尹)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그의 이름은 같은 해 2차 초정약수 거둥 때(음력 7월 22일)도 등장한다. 이때는 행궁 건립이 아닌 기존 행궁의 수선이었다. '내섬시윤 김흔지를 청주에 보내어 초수 행궁(椒水行宮)을 수선하였다.'- 김흔지는 내섬시윤으로 출발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정2품)에 오를 정도로 행정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단종은 그가 졸하자 손수 관까지 내리기도 했다. '한성부윤 김혼지가 졸하니, 관곽(棺槨)과 부의로 종이 1백 권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수리 행궁은 그로부터 4년후인 1448년 3월 실화로 화염에 휩싸였고 범인은 하옥됐다. 세종은 이런 범인을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여러 날 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심히 불가하니'(세종실록 30년 5월 21일자)라며 석방토록 했다. 이후 초수리 행궁은 세종대왕
1464년 2월 22일 초수리(초정약수)를 떠난 세조의 어가는 다음날인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초정약수~청주는 한나절 거리로 그렇게 먼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걸린 것은 세조가 중도에 사냥놀이를 하고 천변에서 신하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면령(免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서를 세자와 신숙주·홍윤성 등에게 내려서 이르기를, "내가 종훈 ·여러 장수와 더불어 적은 것을 베어서 나누어 마시는 것은…"'- 세조가 청주에 도착하자 사장이 쌀을 바치고, 창기들은 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사장'은 조선조 때 사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일컫는다.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사장(社長) 40여 인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으며, 한 중이 목탁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노인·유생(儒生)·창기(娼妓)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 조선전기 청주목을 경유한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 모두 3명이다. 이 부분에서도 세 임금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 때
세조의 어가가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당도한 것은 1464년 2월 21일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이날 진천~초수리 구간을 단 하룻만에 이동했다. 따라서 세조의 어가가 초수리에 도착한 시간을 늦은 오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의 어가를 맞은 당시 청주목사는 고태필(高台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465년 청주목사가 되어 정사를 엄정히 집행, 아전들은 그를 두려워 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글로써 아뢰기를, "청주 목사 고태필·온양 군사 이신효·임천 군사 박휘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상세하고 공명하여,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하니, 승직(陞職)할 만하고…"'- 초수리에 도착한 세조가 다음날 한 일은 사냥과 천변에서 가진 작은 술자리였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토령(吐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川邊)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민족의 기록문화 꽃으로, 국보 제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이런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의해 한글로 완역돼 있어, 일반인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부분은 번역상 적지 않은
세종과 세조는 20년 시차를 두고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속도는 달랐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 어가는 한양도성~초정약수 구간을 닷새에 주파한데 비해, 세조의 어가는 하루 이른 사흘 걸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세조는 '오고'(五鼓)에 일어나 하루 거둥을 시작했다. '5고(鼓)에 어가(御駕)가 거둥하였는데, 어가 앞의 횃불이 혹은 꺼졌다가 혹은 밝아졌다가 하였으므로 횃불을 없애도록 명령하고…'-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종각의 북을 쳐서 통금의 시작과 해제를 알렸다. 이를 '파루(罷漏)라고 불렀고, 이를 어긴 자는 경수소(警守所) 곳에 구금하였다가 그 다음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곤장을 차등있게 때렸다. 이밖에 조선시대는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를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다섯 마디의 시간을 각각 일고(一鼓)~오고(五鼓)라고 부르고, 그 숫자만큼 북을 쳤다. 다섯 단계의 맨 마지막인 '오고'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를 뜻했다. 한여름에 새벽 5시면 날이 훤하게 새나, 겨울철은 그렇지 않다. 음력 2월말도 많이 어두운 편이나, 세조의 어가는 그 시간에 거둥을 시작
한양도성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는 사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세조 어가를 맞이했다.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이 어가를 맞이하고, 절제사 권언이 군사를 거느리고 결진(結陣)하였는데,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하였다. 임금이 우상대장 김질에게 명하여 용천산(湧川山)에서 몰이하게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세조실록은 신영손이 도계 어느 곳에서 세조의 어가를 영접했는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천 광혜원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광혜원에는 충청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인장을 주고 받는 교구정(交龜亭)이 존재했다. 당시 관찰사 인장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 장소를 '교구정'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교구정은 한양애서 봤을 때 그 초입에 해당하는 문경새재 동쪽 사면에 위치했고, 지금도 현존한다. 세조의 어가가 좀더 남행(南行)을 해 진천 광석(廣石)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진천 광석이 어느 곳인지는 지명 추적이 잘 안 되고
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목적으로 1444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조선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그로부터 20년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세조가 초정약수를 찾은 것 역시 치료 목적이었으나 병명은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가려운 증상의 피부병을 '아양'이라고 불렀다. 세조는 이 '아양' 치료를 위해 충청도 순행에 나섰다. 세조는 권력 찬탈 과정에서 조카 단종과 동복동생 안평·수양대군을 죽인 까닭에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가지가 저절로 올라갔다'는 정이품송 전설도 정통성 시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각종 야사도 세조가 얻은 피부병을 그의 정통성 시비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자신을 꾸짖었다. "네가 내 자식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라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이후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이 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비명했고, 세조는 피부병을 얻었다.' 피부병 치료를 위한 세조의 충청도 순행은 1464년 1월 하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정은 이와 관련한 '특별 경계령'을 충청병영에 내렸다. '충청도
조선시대 호조(戶曹)는 조세, 부역, 인구 등을 담당했던 관서로, 그 수장은 지금의 경제장관에 해당하는 호조판서(정2품)다. 각종 문헌은 조선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로 충청도관찰사도 역임한 윤현(尹鉉·1514-1578)을 자주 기록했다. '윤현이 비용을 아끼고 보관해 두는 것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각사에 오래 묵어 썩고 깨진 물건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뒤에는 모두 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사옹원에서 깨진 사기 그릇을 거두어다가 저장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이 인용문의 악센트는 뒤에 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지만, 그 비아냥은 곧 탄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에 궁성을 수리하게 되자 단청 물감을 담을 그릇이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깨진 사기 그릇을 내어다 나누어 주니 사용하기에 넉넉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나라 도간(陶侃)이 나무 톱밥을 사용하게 했던 것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의 무장인 도간은 배를 만들다 남은 나무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곧 요긴하게 사용됐다. 나무 톱밥은 눈이와 진창이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의 대표적 한시 작품인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전회에 여러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어학자 이종문 계명대 교수는 '몽혼'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한국한문학연구 제 47집에서 제기했다. 논문의 제목은 '이옥봉의 작품으로 알려진 한시의 작자에 대한 재검토'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은 윤현(尹鉉·1514-1578)의 '국간집(菊磵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한시의 제목이 우리 고장 지명의 '題贈淸州人'이다. '人間離合固無齊 / 忍淚當時愴解携 / 若使夢魂行有跡 / 西原城北摠成蹊.'-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이옥봉 시인의 삼척과의 인연과 작품세계를 조명하자는 문화계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옥봉(李玉峰)은 당시 충북 옥천군수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나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詩)를 짓는 것으로 고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첩으로 살면서 삼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2011년 8월 30일자 기사 내용이다.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이옥봉은 의 기사 내용대로 첩 신분으로 남편 조원을 따라, 1583~1586년 3여년 동안 삼척에 기거했다. 이옥봉은 이 기간동안 삼척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죽서루'와 '춘사'(春思)라는 한시를 남겼다. 시 '죽서루'는 매우 짧은 시이기는 하나, 하늘과 땅을 한 지점에서 조망하는 등 입체적인 풍광을 그리고 있다. '강물에 몸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江涵鷗夢闊) /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天入·愁長).' '강물'과 '하늘', '갈매기'와 '기러기' '꿈'과 '시름', '드넓고'와 '길기만' 등의 시어에서 보듯 이 시는 뚜렷한 대구(對句)를 하고 있다. '죽서루'는 서애집, 청창연담, 일사유사 등에 이옥봉의 작품으로 수
실학자 이덕무는 이옥봉의 한시를 "부녀자로서 대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녀 또한 자부심이 대단, 정실부인 아들에게 준다는 뜻인 '증적자'(贈嫡子)라는 시를 남겼다.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妙譽皆童稚) /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東方母子名) /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驚風君筆落) /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泣鬼我詩成).' 인용문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는 정실 아들의 글짓기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뒷문장은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로 돼 있다. 옥봉 자신도 그에 못지 않게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음 구절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옥봉은 정실 아들의 글솜씨에 대해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란다'라고 칭찬한다. 반면 자신의 글솜씨는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라고 더 자찬(自讚)했다. '읍귀'(泣鬼)는 '읍귀신' 즉 '귀신도 울린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이태백의 시를 보고 극찬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도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