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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3.14 17:56:19
  • 최종수정2023.03.14 17:56:19

이정민

청주시청 도시계획상임기획단·공학박사

# 후계동 '정희네'

인생 드라마를 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이다. 나의 아저씨가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들의 성장 이야기가 아닌, 등장인물 모두가 성장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희네'가 있다. 정희네는 이선균의 초등학교 동창인 오나라가 운영하는 동네 선술집이다. 퇴근 무렵이면 등장인물들이 하나 둘 정희네로 모인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 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여기 오니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권나라의 독백은 정희네를 잘 드러내준다. 후계동 사람들은 매일 저녁 정희네에 모여 실패한 하루를, 과거를, 축구를, 술을, 인생을 나눈다. 그리고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고, 헤어지고, 또 모인다. 나의 아저씨를 보는 동안 우리 집 근처에도 정희네와 같은 선술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다.

# 신주쿠 '심야식당'

사람들이 모이는 또다른 장소가 있다. 도쿄에서도 가장 번잡한 신주쿠 가부키초 골든가의 '심야식당'이 그 곳이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이 곳은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 연다. 가게 이름은 그냥 '밥집'이지만, 단골들이 '심야식당'이라 부른다. 메뉴는 된장국, 맥주, 소주, 사케가 전부다. 하지만, 재료가 있다면 단골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심야식당을 찾는 단골들은 다양하다. 출판사 편집자, 심야 라디오 디제이, 샐러리맨, 스트리퍼, 야쿠자, 게이바 사장이 그들이다. 디귿자 형태의 이어진 나무 의자에는 예닐곱명이 앉을 수 있다. 덕분에 한 팀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듣거나, 들어준다. 곧 친구가 된다. 때로 약속하고, 때로 약속없이 와서 만난다.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허물이기도 하고, 진심이기도 하다. 허물은 이해되고, 진심은 마스터를 통해 전달된다.

#제3의 장소

두 식당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희도, 마스터도, 단골들도 주인공의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 주변인이거나 소외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식당에서 만큼은 주인공이 된다. 나의 아저씨와 심야식당을 보면서 권나라처럼, 시마다상처럼 위로받았던 건 나도 그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되어서였을까.

도시 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는 (1980)에서 이러한 장소를 '제3의 장소'라고 명명했다. 제1의 장소인 집과 제2의 장소인 직장 이외에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이 제3의 장소다. 제3의 장소에서 우리는 형식이나 직급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가까워진 사람들과 정서적 교류를 나눈다.

제3의 장소가 특별하거나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과거 우리에게도 '사랑방'과 '우물가'와 '빨래터'와 '시장'이 있었다. 나의 어린시절에도 고무줄하고 숨바꼭질 하던 골목길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엔 학교 앞 막걸리집이 있었고, 그 곳에선 선배든 누구든 만나 합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과 일터를 떠나 타인과 만나 시름과 취미와 소문과 정을 나누던 곳. 시름이 가벼워지고, 정이 깊어지고, 가족과 동료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곳. 나를 나로서 만날 수 있는 곳.

최근 제3의 장소 개념은 처음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스타벅스가 업계 최초로 인터넷과 전원장치를 제공하면서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이용하는 공간이 되자, 곧 커피숍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제 스타벅스를 필두로 '제3의 장소' 논의는 공동체 개념을 지우고, '제3의 공간'이 되었다. 제3의 공간에서는 타인과의 지속적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생기는 친근한 정서 대신 개인적 영감과 자극의 만족을 우선하는 공간 마케팅과 브랜딩이 더 중요하다.

스타벅스에서는 고립이 계속된다. 하지만 정희네와 심야식당에서는 누군가 말을 건다. 하루의 고단함을,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제3의 장소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스타벅스가 아닌, 정희네를 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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