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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5.16 16:58:19
  • 최종수정2023.05.16 16:58:19

이정민

청주시청 도시계획상임기획단, 공학박사

# 살아있는 모두를 위한

취리히에는 분수가 많다. 골목과 골목이 맞닿는 곳 어디에나 분수가 있다. 정말로 골목마다 분수가 있는지 골목골목 뛰어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2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 때의 일이다. 과거 물의 공급이 도시의 번성과 쇠락을 결정했다. 오래된 분수가 많다는 것은 도시에 물이 풍부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분수는 시민 모두에게 평등하게 기반시설을 공급하려고 한 흔적 같아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다. 취리히가 좋은 이유다.

취리히에 머물던 이튿날엔 새벽부터 비가 왔다. 이른 아침 한산하고 단정한 취리히의 거리. 눈앞의 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분수대 아래 까맣게 비둘기들이 모여 분수대를 지붕 삼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예술품으로서 가로 경관이나 식수를 제공하기 위한 기능은 부차적이라는 듯, 본래 분수대는 비둘기 은신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비둘기들. 인간 따위는 귀찮다는 듯, 나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수다 삼매경이었다. 분수, 정원, 가로수처럼 도시를 풍부하게 하는 가로 시설물(Street Furniture)이 비단 인간을 위한 설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두를 위한 설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둘기들이 생생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카스카이스 공원 내 어린이 도서관

# 코끼리 삼보의 퇴근길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지구촌 곳곳에 동물들이 출몰한 사진이 SNS에 떠돌았다. 생소하고 기이했다. 2023년 3월에는 그랜트 얼룩말 '세로'를 동물원 밖에서 만났다. 초원이 아닌 도시에 등장한 세로는 의인화되고 희화화되었다. 쉽게 붙인 신문기사 타이틀처럼 세로는 '봄 외출'을 하고, 도로 위를 '활보'했을까? 동물원에서 태어나 처음 맞닥뜨린 인간들의 도시가 얼마나 생소하고 기이했을까.

여성 친화도시, 아동 친화도시를 지나 최근에는 '반려동물 친화도시' 개념이 등장했다. 반려동물 친화도시의 주요 사업은 반려견 놀이터나 테마파크 조성, 문화축제 개최다. 반려동물 친화도시에서 반려동물의 동물권은 과연 보장될까? 반려동물 아닌 동물들의 권리는 논의될 수 있을까? 반려인들의 관광이나 레저, 또는 이들을 유치하려는 전략은 아닌가? 개념어의 잘못된 인용은 오히려 의미를 퇴색시킨다.

나는 반려동물 친화도시보다, 도시에서 새 소리와 함께 눈 뜨고 일하는 삶을 바란다. 실제 SNS를 보면 베란다 난간에 새 먹이통을 설치하여 이미 새들과 더불어 사는 분들이 계신다. 지렁이가 사는 토양에서 자라는 채소는 인간에게도 좋다. 지렁이 똥은 농약이나 비료를 대체할 수 없을까? 포르투갈 남쪽 카스카이스의 공원에는 작은 어린이 도서관이 있고, 그 옆에서 닭과 칠면조와 오리가 뛰어논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왓프놈 사원에서는 원숭이가 여자아이가 들고 있는 망고를 빼앗아 먹는다. 관광객을 태우고 왓프놈을 도는 코끼리 '삼보'가 퇴근길 시소왓 거리를 느릿하게 걸어갈 때면, 자동차들이 삼보 뒤로 꼬리를 잇는다(삼보 아저씨는 2014년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시민 모두가 걸어서 10분 내 공원에 닿을 수 있다. 반려동물과 아닌 동물, 반려인과 비반려인의 구분 없이 모두가 공존하는 도시가 건강한 도시다.

도서관 옆에서 뛰어노는 닭과 칠면조와 오리들

# 유니버설 디자인의 진화가 필요하다

서식지는 이제 콘크리트로 덮였다.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은 동물원이나 사육장에 갇혔다. 서식지를 잃은 종은 개체수가 줄거나, 결국 멸종된다. 도시에 더 많은 동물들을 불러 모을 수 없을까?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에 동(식)물 카테고리를 포함하는 건 어떨까. 도시 디자인에 동물권을 부여할 때 비로소 유니버설 디자인이 완성될 것이다.

취리히에는 1천200여 개의 분수가 있다. 분수마다 고유의 물맛이 있다고 한다. 알프스의 빙하수가 녹아 샘을 이루고, 샘물이 유입되는 양에 따라 물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둘기마다 애착 분수가 있지는 않을까, 상상한다. 여행자도 물통 하나만 있으면 여행 내내 공짜 물을 마실 수 있다. 분숫물의 소비는 생수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1천 배 감축한다고 한다. 지역 주민과 비둘기와 여행자와 지구가 분수로 연결되어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분수가 21세기 유니버설 디자인의 모델이 되어준다. 취리히를 넘어 지구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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