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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탄신 100주년 -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편

예술인들의 실험정신과 창작물들이 샘솟는 '지상의 유토피아'

  • 웹출고시간2013.10.23 19:33:02
  • 최종수정2013.10.23 19:33:02

8. 미술인(예술인) 특화로 성공한 도시 -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편

이중섭 화가 생전모습.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그는 창의적이고 민족적인 화풍으로 수 많은 유화와 은박지 그림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달 이중섭과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91)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가칭)이중섭의 아내'의 제주촬영이 진행됐다.

이중섭이 한국전쟁 직후 내려와 살았던 서귀포의 초가와 미술관, 그리고 '섶섬이 있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 '게와 아이들' 등 그림의 중심무대였던 자구리해안을 비롯해 송산, 정방, 천지동 일대를 배경으로 진행됐다.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직접 제주를 찾아 자구리해안 일대 산책로를 거닐며 남편 이중섭 화백과 함께했던 추억을 더듬었다고 했다.

이중섭은 40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어린이의 모습을 통해 천진한 인간성을 예찬했다. 또 소를 통해 민족과 개인감정을, 닭이나 까마귀를 통해 분단과 동족상잔을 치른 민족의 통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상감기법에서 유래한 것 같은 독특한 미감의 은박지 그림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뮤지엄에 소장돼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그림을 그린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과 생가

이중섭의 거리.

이중섭이 피난을 와 1년여 동안 생활한 제주도는 마치 그가 태어난 고향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제주도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중섭 미술관은 왠지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로 돌아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느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서귀포시는 1997년 이중섭이 피난을 와 살던 집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개방했다. 전국 최초로 예술인의 이름을 딴 '이중섭의 거리'도 제정해 연일 예술인들의 실험정신과 창작물들이 봇물처럼 샘솟는 곳이기도 하다.

'게' 모양을 딴 제주도립 이중섭미술관 외부 전경.

이중섭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2002년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이중섭거리(서귀동 532-1)에 제주특별자치도립 이중섭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미술관과 함께 이곳에는 그가 피난생활을 했던 초가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1951년 그가 36세였을 당시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오면서 주인이 방을 내주어 안착하게 된 곳이다.

그는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중섭이 제주도 피난 당시 머물던 초가(왼쪽)와 이중섭과 가족들이 생활을 하던 초가집 내부.

당시 집주인이었던 할머니가 90세를 넘긴 연세로 아직까지 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인 할머니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중섭과 가족들이 살던 1평 남짓한 방은 관광객들에게 개방해 놓았다.

그가 당시 머물렀던 비좁은 방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눈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 표현하자면 아기자기함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모정이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기운이었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유독 '게'가 많이 등장한다.

아이들과 눈 뜨면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고 게를 잡아 반찬으로 이용한 데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림 안에 '게'를 자주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는 서귀포시에 거주하면서 아름다운 풍광과 이 고장의 인심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만큼 자신의 창작활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할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곳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소품이다. 그를 대표하는 은박지 그림 역시 담배를 싸고 있는 은박지에 그린 것들이라 더 희소성을 갖는 듯 하다.

미술관에는 최근 지자체에서 구입한 그림 2점을 비롯해 기증 작품, 대여 작품 등 많지 않은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작품 수가 현저히 적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중섭의 생애

1916년 평안남도 평월군 조운면 송천리 출생이다. 부농인 부모님 밑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성장했다.

여덟살 무렵 평양으로 이주해 학교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다. 오산고등보통학교(1931년)에 입학한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 재능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1935년)하게 된다. 그러나 곧 싫증을 느껴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해 유학생활을 한다. 1940년 문화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당시 평양 종로보통학교 시절 친구인 김병기와 오산학교 선배인 문학수가 선배로 재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제작된 작품이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 등이다.

1945년 5월 문화학원 시절 사귀었던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아내 이름을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식이름으로 짓고 서울로 상경한다.

이듬해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나 일주일 만에 그만 두고 집에서 닭을 키우면서 주로 닭과 소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이후 한국전쟁(1950년)이 일어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대동해 부산에 도착한 그는 1년 뒤 임시 수용소에서 나와 제주 서귀포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서귀포의 환상',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의 작품을 남기고 서귀포에서의 1년여 생활을 마친다.

다시 부산으로 나와 오산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판자집에서 생활하게 된 그는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 수용소에 보냈다가 그들은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는 나날을 보내며 은지화 기법에 착안한 작품들을 남겼다.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그는 작품을 판매해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일본에 갈 목적으로 마련한 경비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데 써버리고 만다.

이 무렵 그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일종의 거식증 같은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고 극기야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병세가 호전된 듯 해 퇴원했으나 영양부족과 간염으로 다시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정신병이 아니란 이유로 퇴원했다.

1956년 곧바로 적십자 병원 무료 병동에 보내져 9월6일 지켜보는 사람 없이 홀로 숨을 거뒀다.

당시 향년 41세로 그가 숨을 거둔지 3일 후에야 친구들이 알고 찾아와 장사를 지냈다. 그는 화장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중섭의 작품세계

미술관 전시실 1층에 최근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생전 이중섭이 쓰던 팔레트를 기증해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크기가 작은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으로 서구적인 표현을 주로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적인 소재는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고 그 기반들은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나온 것들이다.

'소' '흰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속의 은지에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생활고 속에서 가족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평가받게 된다.

이중섭이 일본여성 마사코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갈등과 번민이 매우 컸다고 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1년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그림 중에는 외딴섬에서 이중섭은 나무가 되고 마사코는 흰 대리석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는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지 꼭 10년이 되는 1951년 이중섭과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서귀포에 오게 됐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서귀포에 안착한 후 그린 유화작품이다.

그를 대표하는 은박지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담뱃갑 안의 은박지에 주목해 제작됐다.

종이 위에 얇게 알루미늄 코팅처리한 은박지는 종이의 유연성을 유지하면서도 알루미늄의 매끈한 질감과 은회색의 도시적 미감이 내재된 매력적인 재료다.

이중섭은 은박지 표면은 물을 흡수하지 않지만 이면의 종이는 물을 흡수한다는 점에 착안해 날카로운 못이나 송곳으로 은박지 표면에 형상을 그리듯이 판 후 그 위에 물감을 칠하고 어느 정도 시작이 경과한 뒤 물감을 닦아내었다. 그렇게 되면 코팅처리한 표면에는 물감이 묻지 않지만 송곳으로 파인 홈에는 종이가 드러나게 되어 물감을 흡수하면서 파인 형상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유사하다.

전통기법과 어우러진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 독창적인 기법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 김수미기자

인터뷰 - 한승희 제주도립 이중섭미술관 문화해설사

한승희 이중섭미술관 문화관광해설사

-이중섭 미술관과 초가집에 대해.

"제주도 서귀포 바닷가에 서식하는 '게'의 모양을 본 따 건축된 것이 이중섭 미술관이다. 생전 아이들과 늘 함께 놀아주던 자상한 아빠였던 그가 바닷가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잡은 게를 반찬으로 즐겨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게를 너무 많이 잡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작품에 늘 등장시킨 것으로 안다. 초가집에는 당시 방을 내 주셨던 할머니가 현재 90세 넘은 나이로 살고 계신다. 정정하셔서 당시 이야기도 가끔 하신다. 화가가 짧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는 하나 지인들에게 자신의 작품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만큼 창작활동에 열성적이었던 곳이다. 미술관과 그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자체로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 운영과 활성화 방안은.

"서귀포시가 이 일대 거리를 이중섭의 거리로 제정해 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작품판매와 문화예술 공연이 상시 열리고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미술관과 초가집을 보고 현대 예술인들의 아트상품도 소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매년 축제도 열어 외지의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미술관에 소장 작품이 적어 아쉬워하는 관람객들도 있는데 관람객들은 매년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상설전을 통해 언제든 보고자 하는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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