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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탄신 100주년 -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 운보 김기창 화백

귀먹고 말 못하는 장애 딛고 일어선 위대한 인간승리
'침묵의 심연' 속에서 무려 1만여 점의 작품 남겨
구상과 추상의 세계 넘나든 '살아있는 자연미학'

  • 웹출고시간2013.08.08 19:04:30
  • 최종수정2013.08.08 19:04:30

5. 스토리텔링으로 말하는 운보

운보 김기창 화백은 한국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 화가다.

지금에 와 그가 남긴 수만 점에 이르는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만원짜리 지폐를 떠올리면 쉬울 것 같다.

만원 지폐에 담긴 세종대왕 초상이 바로 운보가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운보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탓에 그림에 정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면 말을 하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림으로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바보산수부터 세밀하고 정밀한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그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근대 미술사에 큰 획은 그은 인물이다.

그가 말년에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청원군 형동리 '운보의 집'은 그의 명성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운보의 집


운보의 집은 그 명성을 이용해 운보의 측근과 지인들이 무리한 사업을 벌이다 지금의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수년째 계속되는 파행 운영….

운보의 지명도는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연예인보다도 낮아진지 오래다.

가수들은 당시 부른 노래를 후대에도 계속 들을 수 있음에 대중성이 보장된다하겠다.

그러나 화가는 좀 다르다. 화가가 죽음을 맞이하면 더 이상 작품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에게서 쉽게 잊혀지고 그가 생전 누리던 지명도와 명성도 점점 사라져간다.

본보는 귀가 들리지 않아 마음으로 이야기를 듣고 손끝으로 감정을 표현했던 운보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이야기를 한편의 에세이로 풀어낸다.

◇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 푸른 생명이 움튼다


소낙비가 내린 뒤 청산이 더욱 우거졌다. 산 넘어 흰 구름 하릴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여름 풀숲은 석양 노을과 함께 깊어만 갔다. 마을 사람들은 논농사 밭농사 한창이고 구릿빛 얼굴에는 스멀스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골목길마다 소달구지 바쁜 걸음 재촉하고 아낙네는 새참 머리에 이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고갔다. 누렁이는 촐랑대고 시냇가 풀 뜯어 먹던 얼룩빼기 황소는 졸음에 겨운지 꾸뻑꾸뻑 세월만 낚는다. 노인들은 팽나무 아래에서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고 염소 떼 풀어놓고 풀밭에서 소꿉놀이하는 어린 아이들의 풍경이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서정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화를 닮았다고 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여름이 가고 귀뚜라미 처량하며 소슬한 바람으로 가득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옥수수 잎사귀 와삭거리고 수수밭에 알 찬 곡식 머리 숙이며 고추잠자리 코발트블루 하늘을 날던 초가을, 나는 불현듯 삶이 심드렁하고 가슴이 먹먹해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고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남들처럼 세상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 울음의 깊이를 소슬한 가을밤은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늘에는 촘촘히 빛나는 별들이 무진장 쏟아질 것 같아 내 마음마저 아슬아슬하다. 초승달은 무엇이 그리 애달픈지 붉게 물들었고 산과 내와 들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람이 내 살갗에 닿자마자 새파랗게 몸을 떨었다. 한낮의 햇살이 머물고 간 들꽃세상도 고단했던지 온 몸이 축 늘어진 채 말이 없었다.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가는 자글자글 주름살 많던 촌로도,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땔감 구하러 올라가던 검게 그을린 청년도, 마을 앞 시냇가에 모여 앉아 빨래하며 수다 떨던 아낙네도, 물살을 가로지르며 산과 내를 오르내리던 산제비도 어둠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저 속에 수많은 소리가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고 합창할 것만 같은데 그 무엇도 들리는 게 없었다. 적막강산, 고립무원이다.

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훔치며 보냈을까. 저 많은 대자연이 촐랑대며 몸부림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어 발버둥 쳐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초라하고 무의미한 나의 삶이 계속된다면 세상과의 인연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리없는 눈물, 소리없는 아우성, 소리없는 몸부림으로 절규했다. 나의 삶과 나의 추억과 나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둠속에 우윳빛을 띤 곱디고운 여인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맑은 미소와 함께 오종종 예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가슴이 떨려왔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부르르 떠는 손을 그녀에게 맡겼다.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아니, 당신 스스로를 사랑해보긴 했는지요· 누구나 한 세상 살다보면 시리고 아픈 일들과, 고통스럽고 온전하지 못한 일들과 마주하는 일이 많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보세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마음으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세요.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저 대자연의 신비를 온 몸으로 느끼려 하세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오묘한 소리가 있는데 귀로 들을 수 없는 심연의 것을 마음으로 들어보세요.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순백의 여인이 홀연히 사라진 다음날, 나는 세상에 대한 눈뜸이 시작되었다. 햇살 부서지는 소리, 귀로를 재촉하는 덜커덩 덜커덩 소달구지 소리,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즐기는 소풍소리, 산새 지저귀고 시냇물 졸졸졸 흐르는 소리, 빨래하는 아낙네의 수다 떠는 소리, 푸른 하늘 드높은 산하 부서지는 소리, 붉은 물든 석양에 대자연이 춤추는 소리….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화선지에 담았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그곳에서 들려오는 심연의 소리를 담으려 애썼다. 득음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한 폭의 그림이 끝나고 나면 나는 저 풍경화 속으로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이 생겨나고 내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온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안고 저들과 하나 되려 할 때 비로소 세상의 벗들이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참된 삶이라는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그를 목수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것이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화가로 만들었다.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의 재능을 살려주었다. 아내는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으며 아내이자 예술가이며 동지로써 그의 곁에 함께 했다. 운보 김기창, 한국미술사에 길이 남을 그의 작품은 두 여인의 사랑과 헌신에 대한 침묵의 화답이었다.

세 살 때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은 운보의 일생은 귀먹고 말 못하는 장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인간승리였다. 18세 때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래 선생은 '침묵의 심연' 속에서 무려 1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더욱이 운보는 10년을 주기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혁신하는 놀라운 청조성과 활화산 같은 정열을 보였다. 세필細筆에서 시작해 한국 산하의 정기를 수묵水墨의 농담濃淡과 단순한 색상으로 힘차게 그려낸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대담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를 거쳐 말년의 '걸레그림'에 이르기까지 실로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붓가는 대로 넘나들었다. "바보란 덜된 것이며 예술은 끝이 없으니 완성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바보산수를 그린다"고 했던 운보의 말씀은 대가의 금언이 아닐 수 없다.

자유와 순수, 그것은 더 없는 운보의 자산이자 해학과 천진성으로 드러나는 묵필의 분수령이 되었고, 무위와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대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미감과 형상성의 바탕이 되었다. 아내인 우향이 타계한 후 운보는 한동안 시름에 잠겼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 자신의 바보산수를 구체화하여 일탈된 작업세계를 펼쳤다. 운보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처한 장애와 환경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고, 둘째는 그칠 줄 모르는 정열과 창조적인 에너지로 인한 다양한 경향의 창출이며, 셋째는 바보산수에서 샘솟는 한국 미술의 정통성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그 현대적인 재해석이다.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과 대범성, 해학적 성정도 중요한 대목이다.

운보만큼 표현이 큰 예술가도 흔치 않다. 세밀묘사, 파격적인 묵법 등 참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다. 전통적 소재인 인물과 화조에서 청록산수, 민화풍의 바보산수, 현대적 풍속도, 그리고 추상적 이미지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폭이 넓고 끝이 없었다. 봉걸레에 먹을 듬뿍 찍어 병풍 위를 오가며 붓이 가는대로 자신의 전체를 품는 행위는 섬세한 붓끝으로 세밀화를 그리던, 힘찬 필치로 세상 모든 형태를 구사하던 작가가 마지막 어느 경지에 도달한 달인으로서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계산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봉걸레의 이런 작품들은 운보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운보의 모든 작품에는 작가만의 내밀함과 저 깊디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의 세계가 만나고 있으니 소리 없는 아우성이요, 살아있는 자연미학이라 할 것이다.

지금 자연은 만삭의 몸을 풀고 있다. 온 산하가 해산의 기쁨으로 들뜨고, 그 사이로 빛나는 일광이 눈부시다. 숲에선 떠도는 혼령처럼 소쩍새가 운다. 사연이 많은 것 같다. 그 사연의 길을 따라 나만의 길을 가야겠다.

/ 김수미 기자·변광섭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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