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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가 휘날리는 일본의 역사 불감증 심각

36. 비밀병기를 연구한 '노보리토연구소'
극우세력에 절망하지만 그래도 양심적 인사에 희망
노보리토연구소의 잔인한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사용
전쟁과 과학기술의 올바른 관계는 평화 창조에 긴요

  • 웹출고시간2013.07.02 17:35:1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6. 비밀병기를 연구한 '노보리토연구소'

■ 일본의 과거사 문제

오늘날의 일본은 과거의 일본제국과 다르다. 하지만 지금도 과거의 일본제국을 연상시키는 사건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욱일승천기이다. 일본제국의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욱일승천기가 도쿄 도심의 시위대 손에서 휘날리고, 심지어 전 세계인이 TV로 보고 있는 국제경기장 관중석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몰지각한 역사의식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제국을 단절하지 못한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인적 계승이다. 일본제국의 침략과 탄압, 학살과 수탈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 패전 이후 미군정이 끝나자 국가를 인수받았다. 그리고 일본경제를 세계 2위 수준까지 성장시켜서 과거사를 묻어버렸다.

둘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가르친 역사교육이다. 일본제국이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고 세계적인 강국이 된 과정을 극적으로 보이게 장식을 했다. 시바료타로의 이른바 '밝은 메이지'가 그것이다. 그러니 제국주의 팽창의 역사 속에서 침략과 수탈의 실상은 숨겨지게 되었다.

마지막이 극동군사재판의 전범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던 것이다. 점령지에서 침략군이 소리쳤던 만세의 대상인 천황도 그대로였고, 전범 재판 대상자가 소수에 그친데다 그나마 처벌도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오히려 인도인 팔 판사와 같은 부적절한 인사의 헛소리가 전범재판을 부정하는 핑계가 되었다.

독일은 전후 지금까지 나치스전범을 스스로 추적해서 처벌해왔다. 일본은 반대로 전범까지 야스쿠니신사에 모셔놓고 앞으로 "나라에 여러 일이 있을 때 의지"하겠다고 한다. 그러니 반성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7월 1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브루나이의 수도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역사는 혼(魂)'이라고 강조했던 박은식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한 개인, 한 민족의 영혼을 다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기시다 외상이 "일본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대로 과거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는 기존의 인식은 아베 정권에서도 동일하다"고 말했다.

여러번 반복해온 이 말이 빈말인 것은 이제 모두가 안다. '다대한 손해와 고통'은 일본제국의 영광에 가려지는 부산물에 불과하고, 그것이 오히려 일본제국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공의 흔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정치인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1959~) 규제담당상은 일본군 위안부 즉 일본군 성노예가 "전시 중에는 합법인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은 "도의대국(道義大國)을 지향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일본의 도의를 우파들은 그렇게 본다.

아베 총리는 작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시 "(1차 총리 시기)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지 못했던 게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에 목숨을 바친 분들을 모신 장소에 가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이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선 '국가에 목숨을 바친 분'이 아닌 '침략과 학살에 앞장선 전범들의 우상'이 있는 곳이 야스쿠니신사이다.

■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의 설치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을 이끌어온 침략자들과 그들을 계승한 우익만 일본을 대표하는 세력인가. 그렇지는 않다. 일본우익의 집합체인 일본회의(日本會議)에는 약 3만명의 구성원과 약 800만명의 가맹단체 회원이 있다. 큰 정치세력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이 1억 2천 700만 일본인을 모두 대변하지는 못한다.

반면 소수이지만 일본의 역사를 이들과 다르게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을 침략의 길로 이끈 과정을 '밝은 메이지'가 아니라 '어두운 과거'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헌법으로 국민의 권리가 천황이 신민에게 준 '은혜적 권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에선 민권은 영구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라고 강조하였다. 포악한 군부에 반대하고 민주주의 실현에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대학 평화교육노보리토(登戶)연구소 자료관」은 그런 전통이 갖고 있는 힘을 보여준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던 「육군노보리토연구소」는 일본제국의 비밀병기연구소였다. 11만평 부지의 100여동 건물에서 기술장교 등 연구인력 250명을 포함한 1천여 명이 대량살육 무기를 연구했다.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이 연구소는 군산관학(軍産官學)이 협력해서 설치한 가장 큰 연구소였다. 여기서 일본 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채용해서 군부의 요구에 따라 인류사에서 죄악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비밀무기를 개발하고 제조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각 특무기관에 보내 즉각 작전에 활용을 했다. 특무기관원 양성기관인 나카노학교가 연동해서 모략전쟁에 사용했는데 일본제국의 침략과 학살행위를 학문으로 지원했던 기관이 이 연구소였다.

전쟁 중에는 보안이 철저해서 이 연구소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전쟁 말기 가장 먼저 나가노현의 지하벙커로 이전해서 숨겼을 정도였다. 패전 이후 모든 연구내용을 미군에 인계하고 증거를 인멸하였다. 이 연구소 관계자도 전범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731부대와 똑 같았다. 관동군 방역급수부(防疫給水部)란 이름으로 존재한 이시이 시로(石井四·, 1892~1959)의 세균전부대도 연구결과를 미군에 넘겨주고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메이지대학은 1951년에 이 연구소 부지 3만평을 불하받아 이쿠타(生田) 캠퍼스로 사용했다. 1980년 말 노보리토연구소의 실상을 알게 된 시민들과 학생들이 과거 연구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노보리토연구소 보존을 위한 시민회'를 조직해서 "어두운 과거도 후세에 있는 그대로 남겨줘야 한다"며 자료관 설치를 주장하게 된다. 놀랍게도 메이지대학은 이 주장을 과감히 수용했다.

메이지대학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화하는 시대에, 개인의 권리를 확립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법을 가르치는 메이지법률학교로 1876년에 창립되었다." 교명은 메이지에서 따왔으나 이른바 '밝은 메이지'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대학이 아닌 것이다.

■ 육군노보리토연구소의 모략전 무기

자료관에서 전시하는 노보리토연구소의 비밀무기는 다양하다. 그 가운데 물리학을 이용한 풍선폭탄이 주목을 끈다. 지표면 위 11km 근처의 대기권에는 북태평양 제트기류가 흐른다. 기구에 폭탄을 실어 이 기류까지 올려보내면 미국까지 가는데 거기서 터지도록 만든 무기였다. 최초의 대륙 간 공격무기라고 자평하고 있다.

3개 대대의 특별부대를 편성해서 제작한 풍선폭탄은 1만발. 1944년 11월 3일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맞아 후쿠시마, 이바라키, 지바현에 있는 3개의 비밀기지에서 동시에 풍선폭탄을 띄웠다. 모두 9,300발이었다. 이 풍선에는 직경 10m, 무게 200kg, 15kg 폭탄 하나와 5kg 소이탄 2발을 장착했다.

「육군 노보리토연구소의 진실」을 밝힌 단행본.(왼쪽)「육군노리보토연구소 비밀전의 세계 - 풍선폭탄 생물병기 위폐를 탐구한다」

그러나 전과는 미미했다. 1945년 5월 5일 오레곤주 브라이언에서 불발탄이 터져 소풍 나온 민간인 6명이 폭사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심리전의 효과는 컸다. 일본군이 소규모로 미 본토에 침투하거나 생화학무기가 장착한 것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 해군은 공중에서 요격하여 격추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생물학과 화학을 응용한 생화학무기는 제국일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절정의 무기였다. 독극물 합성을 위해 대만에서 맹독을 지닌 뱀을 들여와 연구를 하였고, 요인 암살용 무기도 만들었다. 또 영화에 나올 만한 독침만년필, 소이탄을 장착한 우산 등도 있다.

이런 무기가 사용된 사례가 있다. 중국 난징의 포로수용소에서 수행한 독극물 실험 기록이다. 한 증언자는 생체실험 연구원이 되어 홍차에 넣은 무색무취한 독극물을 포로에게 먹여서 살해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당시 중국 내륙에 퍼진 전염병은 이런 식의 생물학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노보리토연구소에서 만든 중국화폐.

1945년 시인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의문사했다. 윤동주의 당숙이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다가 함께 있던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 때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송몽규도 한 달 뒤에 숨졌는데 그 주사가 바로 이런 생화학무기 실험용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잔인한 짓을 하였나. 일본제국은 중국과 벌이는 장기전에 자신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24개 사단 68만 병력을 투입해서 주요 도시를 점령했으나 광대한 전선에서 거점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1937년에 시작한 이런 방식의 전쟁은 1945년까지 무려 8년을 끌었다. 전황을 유리하게 전환시키는 방법은 비인도적인 모략전쟁 외에는 수단이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위조지폐까지 만들었다. 중국 후방의 교란에 경제를 마비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942년 일본군은 홍콩을 기습해서 중국돈의 인쇄판을 노확해서 노보리토연구소로 가져왔다. 체계적인 공정 과정을 거쳐 대량으로 위폐를 만들어 중국 전역에 살포해서 인플레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돈 45억 엔 규모의 위안화를 만들어 이 중 30억 엔 정도를 뿌렸다. 장개석정권이 경제전에 밀려 동요되자 미국과 영국은 고액권인 천 위안과 만 위안 화폐를 찍어 공수했다고 한다.

■ 과학연구가 침략에 동원된 비극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전시물.

노보리토연구소는 인간의 과학이 양심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위험한 결과가 나타나는지 잘 보여준다. '731부대'를 밝혀낸 기록물의 제목은 「악마의 포식」이었다. 학문이 양심을 상실한 악마의 손에 들어가면 이처럼 커다란 불행을 가져온다.

이런 노보리토연구소 자료는 영원히 인멸될 뻔했다. 비록 일부만 살아남았지만 역사의 교훈이 될 자료가 적지 않다. 이 자료관은 미래를 위한 오늘날의 이정표로 기능할 수 있다. 다음 세대에 전쟁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활동이 일본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나치의 악행은 주로 최대의 희생자였던 유태인에 의해 밝혀졌다. 유태인을 가둬놓은 게토와 수용소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수기와 증언록으로 널리 전했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 각국에 전파되었다. 미국 수도 와싱턴D.C의 홀로코스트박물관과 우리 모두가 본 유태인학살 영화들이 그런 성과였다.

일본제국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의 예술가들은 그런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일본 우익들의 전범 미화작품이 영화로 드라마로 만화로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 일제 전범 잔당의 헛소리를 침묵시킬 예술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직 역사에서 교훈이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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