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강 건너편 괴산읍 능촌리에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의 위패만을 모신 사당으로 알고 있다. 김시민은 임란 종전후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릴 정도로 명장이었다. 그는 왜적 2만명을 맞아 불과 3천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진주성에서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적의 유탄을 맞아 숨지기는 했으나 진주성을 방어해 냈다. 그러나 충민사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김제갑(金悌甲·1525∼1592)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다. 그는 왜장 모리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70살이 거이 다 된, '고령의 문관'이었던 거는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됐고, 부인, 아들 등 전가족이 몰살됐다. 사실 그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데는 불운이 크게 작용했다. 방금 '고령의 문관'이라고 표현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령인 관계로 '임지를 교대하라'는 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계족산(鷄足山 419m)은 대전시 중구에 있는 보문산 공원과 더불어 대전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장동 산디마을을 가운데 두고 한바퀴 빙도는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동안 먼 서쪽으로는 계룡산 북쪽 가까운 곳까지 들여놓은 유성 시가지 서남쪽으로는 대전시가지와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동쪽 대청호 주변의 환산과 백골산, 국사봉등의 산군과 어우러진 호반의 정취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드넓은 대전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계족산 정상 봉황정에서의 탁트인 조망은 계족산 산행의 백미이다. 산 모양새가 닭발 모양으로 생겨서 이름 붙여졌다는 계족산의 옛이름은 봉황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계족산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계족산성을 비롯해 30여개에 달하는 산성과 산성터가 남아있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산성외에도 절터 및 각종 사찰이 남아있다. 또한 계족산에 있는 임도를 이용한 황톳길은 등산외에도 맨발 걷기, MTB등을 즐길 수 있다. 계족산은 크게 두줄기의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능선은 대전시가지의 동쪽과 맞붙어 장동고개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짧은 능선으로 대덕구의 아파트 단지에서 올라오는 들머리가 많다. 산행내내 서쪽으로는
전회에 백두대간 운하사업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경세가 하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적극적인 찬성을 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역시 엄청난 규모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윤이 말하였다.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道)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서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하여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역사'는 세곡선에 올라 노를 져었던 역부(役夫)를 의미한다. 이때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인물이 한옹(韓雍·1352∼1425)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씨(韓氏)는 '청주'를 단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곡산(谷山), 평산, 안변, 한양, 당진 등 한때 10여 본으로 분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원됐다. 따라서 현재의 한씨는 엄밀히 말하면 청주, 곡산 등 2개의 본관이 존재하고 있다. 한옹이 바로 곡산을 관향으로 갖고 있다. 현재 곡산 한씨는 전국적으로 4천9백여명(1천5백여 가구·
조선초기 경상도 세곡(稅穀)은 마산창 등 남해안 3창에 모아져 서해를 거쳐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그러나 바닷길로 운송하다 보니 사나운 바람을 만나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태종 3년(1403)의 침몰 사고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무려 34척의 배가 동시에 침몰했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해중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 실록은 이날 침몰 사고의 재산손실과 인명희생 규모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태종은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을 바닷길이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태종은 생각이 대범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세곡을 운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구상을 한 바 있다. 결국 환경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조선
고려 공양왕 때에는 말 한마리를 팔면 노비를 두세명 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초에는 14세~40까지의 노비로는 무명 400필, 14세이하, 40이상의 노비로는 무명 300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말(馬)의 값은 450필이었다. 노비가 말보다 더 싼 셈이었다. 이밖에 여종을 팔 때애는 뱃속의 태아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16세기 인물인 미암 유희춘은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열살짜리 사내종에서부터 예순일곱된 늙은 계집종까지 모두 여섯명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우리고장 보은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종을 막 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뿐만 아니라 겁탈하는 모습이 실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생겨난 속담이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 였다.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 남씨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노비 목숨을 경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용석(龍石)의 사건이 있다. 그는 사랑하던 양반집 종년을 데리고 도망갔으
바람이 차다. 곱게 물든 단풍의 화려함은 여전함을 시샘하듯 '우수수' 털어내는 가을바람이 차다. 몸은 움츠러들고 걸음은 '종종종' 자발적다. 하긴 나뿐 아니라 모두들 춥긴 추운 모양이다. 누렇게 물든 황금벌판을 달리는 그림속 주인공울 기다리는 찬샘마을앞 수많은 '타슈'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심드렁한 것을 보니... 둘레길은 찬샘마을앞을 가로지르는 마을길 오른쪽으로 '쇠점고개' 팻말을 따라 시작된다. 헤설피 드러난 목덜미로 소름이 돋는다. 듬성듬성 빈자리 늘어가는 가을 들판을 가로지르는 임도를 지나 20여분 오르니 쇠점고개이다. 외진 고갯마루엔 키다리 안내팻말과 바람만이 길목을 지킨다. 쇠점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냉천골과 이어지고 왼쪽 능선을 따라가면 노고산성 오른쪽 능선을 따라가면 함각산과 견두산성, 추동으로 이어진다. 잠시 일행들 기다릴겸 고갯마루에 주저앉아 가을햇살을 즐긴다. 스산하다. 사방을 에워싸는 산속의 작은 소음속 평화로운 일상이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미세하게 감지되는 기척 잠시 숨죽이며 살펴보니 저만치서 서성이는 고라니 한 마리가 눈에 띈다. 저또한 무슨 기척을 느낀건지 한동안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그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우
지리서는 말 그대로 당시의 지리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기록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수정할 내용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세종 때의 관찬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를 새롭게 수정·보완한 것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제목에 '新增'(신증)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수정·보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1478∼1534)이 진전문(進箋文)과 서문(序文)을 쓰는 등 사실상 대표저자 역할을 했다. 진전문은 책의 성립 과정을 알리는 문장을 말한다. 이행은 용재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러나 이행은 유배와 이배를 거듭하고 또 평안도 유배지에서 최후를 맡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첫번째 시련은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것에서 찾아왔다. 그는 이 사건으로 곤장 60대를 맞고 우리고장 충주로 유배됐다. '전교하기를, "승지 박열·이계맹은 금부에 가서 홍문관 원에게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박안성은 장형을 속받고 진잠에 부처하고, 응교 최숙생은 장 60을 때려 신계에 부처하고, 부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실려 있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저자로, 목가적이면서 권농(勸農)의 의미로 해석됐다.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은 동기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689년 그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고 희빈장씨의 소생인 균(均)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그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로 유배됐다. 동해 사람들은 이때 그 유명한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내용의 시조가 지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구만 사당이 남아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낙향했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주장, 역시 같은 내용의 시조비를 세웠다. 이와는 별개로 1920년대까지 창으로 불려진 내용은 요즘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9일자 시조 소개란에 실린 내용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엇느냐 / 뒷뫼에 사래 긴 밧흘 언제 갈려 하느니.' '노고지리'를 '노고질', '아이'를 '아희놈', '재 너머'를 '뒷뫼'로 표
조선 시대에도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눴다, 다시 주거 형태와 신역의 부담 형태에 따라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노예를 솔거노비, 관청이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노예는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외거노비는 약간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주인에게 곡식, 베 등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를 신공(身貢)이라고 불렀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으로 물건처럼 취급됐다. 가축이나 토지에 비견해 '말하는 재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는 단위를 '名'(명), '員'(원)이 아닌 '口'(구)라고 했다. 공노비 중에 선상노(選上奴)라는 노비가 있다. 말 그대로 지방에서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노비를 일컫는다. 이들 선상노는 관원의 수행, 각궁의 잡역, 성상(城上), 방직(房直), 고직(庫直) 등을 담당했다. 성상, 방직, 고직 등의 표현이 다소 생소하다. 성상은 각 관서의 소장기물을 맡아 간수하던 노예, 방직은 관청의 심부름꾼으로 달리 '방지기'라고도 불렀다. 고직은 창고를 지키던 노예를 말한다. 실록에 우리고장 백성이면서 군복무하듯 서울로 올라간 선상노의 사례가 더러 등장하고 있다
충북일보 '43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가 지난 29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충북일보 직원과 시민 등 40여명이 참가했다.오전 7시 청주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10시께 가야산에 도착했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가야산의 멋진 절경을 보기 위한 시민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도 발걸음을 주춤하는 참가자는 없었다.참가자들은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웅식 교수에게 산행 시 마음가짐 등에 대해 배웠다.김 교수는 "산행할 때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것은 물론 함께하는 사람들과 멋진 가을 전경에 흠뻑 취해보라"며 "마음을 비우고 산의 넒은 마음을 배웠으면 한다"고 했다.코스는 백운동주차장에서 출발해 만물상-상아덤(서장대)-서성재-백운사지를 거쳐 원점으로 돌아오는 약 7㎞ 거리.만물상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초반 오르막길이 비탈져 처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쉽지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3㎞(2시간30분)를 지나 만물상에 도착하는 순간 내려다보이는 가야산의 전경에 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7년 만에 개방된 만물상은 꼭꼭 숨겨놓았던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많은 등산객들을 홀렸다. 울긋불긋 오색단풍이
우리나라 회화사를 논할 때 조선 전기의 최고 작품으로 단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가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엄밀히 말하면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기획하고, 안견이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은 그에게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산문과 시가 곁들여져 있다. 전회에 이현로와 정분에 대한 서술을 한 바 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관찰사 안완경(安完慶)·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인용문 중에 안완경(安完慶·?∼1453)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관찰사 안처선의 아들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만큼 전도가 양양했다. 안평대군과 함께 거명됐다는 것이 다소 불안하다. 안완경이 어떻게 해서 안평대군과 친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때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안평대군은 문신, 수양대군은 무신을 포섭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안완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용(瑢)이 정자양(鄭自洋)을 시켜 충
출퇴근 시간과 맞물린 도심의 거리는 먹이감 찾아 이동하는 맹수들 처럼 치열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뒤퉁맞다. 그렇다고 서열에서 빠져나오는 일조차 쉽지 않다. 팍팍한 무리 속을 어렵사리 벗어난 레저토피아 탐사대원들이 도착한 곳은 비하동 만남주유소 광장이다. 들고나는 차량들의 바람기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주유소 광장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둘레길은 시작된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숲길은 폭신폭신 융단같다. 간간이 떨구어놓은 밤송이 궁금증에 헤집어도 보고 함초롬히 피어있는 쑥부쟁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정겨운 길을 따라 1시간여만에 부모산 산정에 오른다. 청주의 강서동에 위치한 부모산(父母山 231.7m)은 임진왜란당시 왜장 흑전이 침공하여 이고장 출신 박춘무가 그의 아우 춘번,아들 동명과 함께 칠백여의병을 모아 성내에서 대적할 때 군량과 식수가 떨어져 아사직전 이 곳 상봉에서 물이 솟아 생기를 얻고 왜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후 이산(악양산)을 부모산이라 하고 이 샘을 모유정(母乳井)이라고 한다. 현재 모유정은 통신탑이 서있는 정상아래 위치해 있다. 오래전 샘은 말라있고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함께 역사를 기억한다. 부모산의 주변에는 금강의 지류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