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4년(1748) 3월에 발생한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은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문의 괘서 등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3월 17일 한양도성 궁궐에 괘서가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중순에는 충청도 청주에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 와언이 유포되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행렬이 길을 메웠다. 곧이어 청주 인근 문의지역에 "문의 백성들은 어육(魚肉·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倭人 같은데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弓弓이 이롭다"는 비기(秘記)가 유포되면서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됐다. 지금까지의 내용 전개는 누군가가 사건을 면밀히 기획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감영이 수사에 나섰고 그 결과, 이지서라는 문의지역 50대 사족(士族)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의 요적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에 의해 기포되었는데,
[충북일보] 정감록(鄭鑑錄)은 약간 개념이 모호한 예언서이다. 감결(鑑訣),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의 비기를 통칭하여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감결만 가리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중 정감록의 원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감결은 이심(李沁)·이연(李淵)이라는 인물이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沁이 말하기를 백두산에서 내로운 맥운이 금강으로 옮아가고 태백산맥에 이르게 되니 산천鍾氣가 계룡산으로 흘러들어가서 鄭氏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후에 가야산으로 흘러들어가니 趙氏의 천년 땅이 되고, 다음으로 전주 范氏(범씨)의 육백년 땅이 된다. 송악에 이르면 王氏가 도읍을 부흥할 것이다."- 정감록은 단순 예언서를 뛰어넘어 역성혁명의 구체적 대상, 각 왕조의 교체순서, 왕조의 존속시간 등을 풍수지리를 곁들여 자세하게 설정하여 놓았다. 정감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은 300~500년 사이로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것으로 예언돼 있다.문의현 이지서의
1748년(영조 24) 한양도성의 궁궐투서 사건이 일어난 그 해에 청주와 문의현 지역에서는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가 또 처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男負女戴(남부여대대)의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남부여대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중(湖中)에 한 괴인이 있어 요망스런 말을 창도하기를, '왜구가 곧 쳐들어 온다.' 하여, 인심이 소동되는 것은 물론 가족을 이끌고 피하여 달아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인용문 가운데 湖中은 청주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여느 속담의 표현처럼 발(足)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갔다. 소문은 경기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산골짝으로 숨는 사람도 생겨났다.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하의 인원들이 모두 짐을 꾸려 메고서 서 있는가 하면, 산골짝으로 숨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호중만 그럴 뿐이 아니라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다고 하니, 마땅히 기포(譏捕)해야 될 것입니다."- 인용문 가운데 畿內는 경기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는 익명서와 마찬가지이니, 엄히 방지하는 방도가 없을
[충북일보] 1748년(영조 24)은 무신란(1728)이 일어난지 꼭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 임인(18일) 한양도성에서 의문의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졸(卒)을 부른 후 괘서 하나를 던져 넣고 몇마디 지껄인 후 달아났다. "초혼(初昏)에 어떤 사람이 궐문 밖에서 흥원문(興元門)의 수졸(守卒)을 부르면서 문틈으로 하나의 봉서를 던져 넣고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선전(李宣傳)에게 전하라." 했는데, 선전관 이택(李澤)이 과연 바야흐로 입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뜯어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여…."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선전'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씨 성을 가진 선전'이라는 뜻이다. 선전관의 준말인 선전은 왕을 호위하고 전령을 전달하며 나아가 병졸의 진퇴를 명령하는 무직(武職) 관료로,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괘서를 엉겁결에 건네받은 수졸이 이 과정에서 긴급체포되었고, 그 이유는 인용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같은 괘서의 경우 그 확산을 우려해 관련 내용을 일체 기술하지 않는 관례를 지니고 있다. 영조는 수졸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범인을 뒤쫓게 하고 당시 좌의정 조현명(趙顯命·1
[충북일보] 보은 이제동(李濟東) 역모사건에는 느닷없이 신필대(申必大)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동 역모에 가담한 보은 사람 이흥득이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이귀흥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귀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들이 황간(黃澗)·영동(永同)·청주(淸州)·문의(文義) 등지에 있는데, 청주(淸州)의 신필대(申必大) 같은 이도 여기에 들었다. 네가 우리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필대는 보은이 아닌 청주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728년 무신란 끝난지 5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영조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은 역시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란 청주지역 2인자였던 신천영(申天永)의 가까운 혈족이었다. 당색이 남인이었던 신천영은 신숙주의 후손으로 무신란 당시 이인좌로부터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이는 오늘로 치면 광역단체의 군사업무르르 총괄하는 직책으로, 지역사령관에 해당한다. 신필대는 1728년 무신란 당시 신천영을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신천영을 그를 직접 영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
1728년(영조 4) 무신란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조문보(趙文普)가 있다. 그는 노비, 상인 등 하층민이 아닌 보은현감이라는 고위 관료이면서도 무신란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적인 사표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직손이었다. 그는 무신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른바 홍성룡 옥사에 연루되어 옥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칼을 풀어주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했다.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신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칼은 전통시대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중에서 쓰고 있던 형틀도 칼이었다. 이처럼 영조가 죄인을 각별하게 대우한 것은 그가 조광조의 직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통을 지닌 조문보가 무신년 역모에 가담한 것은 민원보와 관련이 있다. 민원보(閔元普)는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조총, 환도, 철편 등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인물로는 김덕삼(金德三)이 있다. 무신란은 정치적으로는 소론+남인이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는 노비+상인 등 당시 소외 계층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괴산에 살던 김덕삼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부호(富戶)였다.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 수사관이 낙형(烙刑)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 형신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 내용을 보면 인용문은 반란에 가담한 어떤 인물이 김덕삼에게 "40~50냥을 꿔주면 사건이 끝난 후 갚겠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50냥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백50만원 정도가 된다. TV 역사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신병주(건국대)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조선시대 양(兩)-전(錢)-푼(分)의 현재 환율은 각각 7만-7천-7백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이 공식대로 하면 50냥x7만원=35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덕삼이 실제 돈을 꿔줬는지는 《영조실록》 등 문헌으로는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장지(
무신란이 발생한지 25일 가량이 지난 1728년 4월 10일. 지금의 괴산송면 집에서 청주로 끌려온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4명의 어린 아들을 둔 채 반군 지도자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인자와 이웅좌가 모두 적괴이니 그 아우 이기좌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같은 날 당시 진짜 진천현감이었던 임상극(林象極·?-?)은 효시되었다. 처형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한양으로 끌려간 후 군기시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죄 때문에 효시됐는지 사료에는 죄명이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영조실록에 그 죄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감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이라고 한 것은 역률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진천·회인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는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과 관련된 것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은 이진동(李鎭東)이라는 경상도 안동 유생이 무신란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했고, 그 목적은 무신년에 창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에서 누락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정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음은 이진동이 상언하는 내용이다. 상언과 상소는 형식이 비슷하나 전자는 평민, 후자는 관료가 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 날짜 정조실록에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당시에 김중헌(金重憲)이라는 영남인이 우연히 우리고장 청주 객점(주막)에 묵었다가 반란군 지도자를 살해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하였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적이 중헌에게 오형(五刑)을 다 시행하였
[충북일보] 1728년 3월 24일. 청안지역 의병들은 이날 먼동이 터올 무렵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이끌던 무신년 반란군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리고 청안현청에서 정중익의 목을 지체없이 베었다. '내가 두 조카와 서종(庶從) 인심에게 말하기를 "종익을 비록 베었더라도 남은 역적이 아직도 많다. 너희들과 더불어 찾아내어 형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라고 했다.'- 잔당에 대한 의병진의 소탕작전도 그 즉시 진행되어 일부는 즉결처분하고 더러는 옥에 가두었다. 여기에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던 임필현(林必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수색하니 즉 필현이 간청의 장을 보관하는 창고 가운데 숨어 있는데 먼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범하지 못하자, 내가 몸소 앞으로 나가 필현을 끌어내어 머리를 검으로 쳤다.'- 임필현은 "그대들이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계책이 망령되어 내놓은 것은 오래지 않아 그 머리와 목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의병들의 설득을 거부하고 말머리를 돌려 정중익에게 돌아갔던 인물이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청안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안현감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