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고려 제 5대 임금인 경종(955~981)은 관리들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제도에 의해 고려의 관리들은 가을철이 되면 농민의 개인 농토에서 수확량을 10%를 가져갔고, 또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임야를 제공받았다. 그런 전시과는 벼슬의 높고 낮음인 관품(官品), 그리고 인품(人品)에 따라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이 가운데 인품은 시행 초기부터 골칫거리가 됐다. 인품은 개성 신·구 세력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주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목종(穆宗, 980~1009)이 초기 전시과의 불합리성을 개혁하였다. 본명이 왕송(王誦)인 목종은 전시과 외에 학문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행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성애를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종의 생모는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이다. 그녀는 중 김치양(金致陽·?~1009)과 불륜에 빠져 아들을 낳았고, 목종이 후계자로 정한 당숙 대량원군 순(詢)을 제치고 그 사생아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목종은 둘의 음모를 눈치채고 서경(평양)에 나가있는 강조(康兆)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
[충북일보] 중국 어선들의 서해 불법어로 행위가 빈발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시대에도 '당선'(唐船)의 해상 불법행위가 거의 일상화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떼로 몰여온 당선들은 서해 백령도를 통째로 에워싸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그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민덕기 교수가 얼마전 《한일관계사연구》 제 42집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명나라 조정은 왜구의 침략 행위가 극성을 부리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외국과의 무역과 선박 왕래 등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금(海禁) 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한 조각의 널빤지도 바다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不許寸板下海)는 표현이 등장했다. 조선도 이 시기에 왜구의 노략질에 대한 방어책으로 먼 바다 항해 금지, 섬비우기 등을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로 인해 왜구가 더욱 창궐을 하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1360~1424)부터는 해금정책을 완화했다. 그러자 '황당선(荒唐船)'으로도 불렸던 당시 중국 어선들이 서해에 대거 출현,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명나라에 이어 등장한 청나라도 대만 정씨(鄭氏)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정씨정권
'임꺽정(林巨正)'은 우리고장 괴산출신 홍명희(洪命憙·1888~?)가 지은 일제 강점기의 장편소설로 유명하다. 그러나 임꺽정(?~1562)은 조선 중기인 명종대에 실존했던 도적의 우두머리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을 꼽은 바 있다. 백정 출신으로 알려진 임꺽정은 서울까지 진출하는 등 신출귀몰하였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사론(史論)에서 이렇게 썼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조선 조정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다. 임꺽정을 생포한 인물은 당시 경기·황해·평안도의 3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1570)이었다. 토포사는 조선후기 도적이나 반란 세력의 진압 임무를 맡은 특수 관직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는 남치근이 임꺽정을 체포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재령(載寧
[충북일보] 괴산군 청청면 화양리의 만동묘(萬東廟·충북도기념물 제 25호) 계단이 비정상으로 좁고 가파른 것은 풍수와 주역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청운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정해 씨가 《한국문화연구》 제 22호에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만동묘 건물은 묘우 5칸, 가운데 문 3칸, 좌우 좁은 문 각 1칸 등이고, 이를 오르내리는 계단은 숨을 몰아 쉴 정도도 매우 가파르면서 좁은 구조를 하고 있다. 실제 현장을 가보면 발을 전후가 아닌 좌후 횡방향으로 디뎌야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만동묘가 명나라 황제를 모신 것이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경건함과 엄숙성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단을 그렇게 조성했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다. 그러나 박씨는 이를 반박, "풍수와 주역적인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계단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논문에 의하면 만동묘가 입지한 터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입지하고 있으나, 풍수의 최종 목표점이라 할 수 있는 혈처에 입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주산과 이를 마주 보는 안산 그리고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뚜렷하게 입지하고, 그 사이로는 혈처에 생기를
[충북일보] '신라 지배를 받던 진천의 특정 집단이 전망이 빼어난 야산에 화장묘를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조성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진천 종합스포츠타운 조성사업 부지인 진천읍 신정리 38-12번지 야산(137m)에서 장골기(藏骨器)가 사용된 신라시대 집단 화장묘가 발굴돼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원장 장준식)은 지난 3월부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사업을 벌여 최근 신라 석곽묘 2기, 화장묘 20기, 토광묘 1기 등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신라 화장묘는 왕성이 있었던 경주에서 여러 기가 발견된 사례가 있으나 지방에서, 그것도 장골기 20기의 화장묘가 집단적으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기의 화장묘는 묘제에 따라 대략 △단순형 △이중형A △이중형B △이중형C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단순형은 원형의 U자 세로구덩(수혈)을 판 후 골분이 담긴 장골기를 안치한 사례로 13기가 발굴됐다. 이중형 A는 넓은 구덩 안에 다시 작은 구덩을 판 후 용기를 매립한 경우로 2기가 발견됐다. 이중형 B는 골장기를 매납한 후 주변에 돌을 세워 이를 보호한 유형으로 4기가 발견됐다. 이중형C는 대형 토기 안에 소형
문명의 발달이 빨라지기 시작한 고려시대에도 높은 고개를 넘기는 종종 쉽지 않았다. 도둑이 들끓었고 맹수인 호랑이도 자주 출몰했다. 김부식이 지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호랑이와 불한당으로 인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경계 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은 그 대책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국립숙박시설의 일종인 혜음원((惠陰院)을 세웠다. 혜음원지는 현재 사적 제464호로 지정돼 있고, 이곳을 방문하면 숙박시설 외에 절터와 행궁지를 만날 수 있다. 충북 백두대간에는 제일 북쪽의 단양 영춘면에 여촌령(呂村嶺, 늦은목이), 맨 남쪽의 영동군 상촌면에 우두령(牛頭嶺)이 위치하고 있다. 모두 24개 영로이다. 이들 영로 가운데 충북 백두대간 세번째 고개인 고치령(串赤嶺) 정상에는 산신당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산신령과 단종을 신격화한 그림이 산싱당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고치령 산신당은 충북 북부와 경북 북부를 넘나들던 보부
[충북일보] 고려 초기 충주지역의 대호족이었던 충주유씨는 남한강 수운을 정치·경제적 기반으로 했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이와 관련하여 충주유씨의 당시 세거지로 지금의 중앙탑면 남한강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함께 나왔다. 전북대 대학원 유선영(柳善永) 씨가 얼마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은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충주유씨 긍달(兢達)이다. 그녀는 왕건과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고, 이 가운데 2남 왕요(王堯)는 고려 제 3대 국왕인 정종(定宗)이 됐다. 그리고 3남 왕소(王昭)도 보위에 올라 제 4대 임금인 광종(光宗)이 됐고, 장녀 낙랑공주는 귀순한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 출가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외척 가운데 권력의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유씨의 논문에 의하면 이처럼 충주유씨가 당대 최대 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강 수운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논문은 그 근거로 △통일신라 말기의 지방호족 발호 △후삼국기 왕건의 충주 진출 △남한강 수변의 곡창(穀倉)과 염창(鹽倉) 존재 등을 제시하였다. 논문은 전자에 대해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왕권 약화와 반비례해 지방호족의 권
554년 백제 성왕이 우리고장 옥천 관산성 부근에서 참수를 당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군은 말 한 마리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00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신라군은 성왕의 사지(四肢)는 돌려보냈으나 머리는 경주 왕성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신라는 백제 왕실과 국가에 대한 모욕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하였고, 이후 두 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백제 성왕이 접경의 여러 성 가운데 유독 옥천 관산성을 빼앗으려 한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을 봉쇄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백제는 그 직전 한강 하류지역에 신라에게 강탈당했다. 나-제동맹(433년)에 의해 신라와 합동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수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동맹 위반으로 한강 하류를 잃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축으로 하여
[충북일보] 경북의 상당수 언론이 백두대간 생태통로 사업을 두고 '추풍령 능선 연결'이라는 표현을 사용, 마치 추풍령 고갯마루(마루금)가 연결되는 듯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18일 경북지역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경북도는 2017년 말까지 210억 원을 투자, 추풍령 일대에 백두대간 생태통로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올 9월까지 기본·실시설계를 마치고 △10월에 공사를 시작하며 △육교형으로 건설되는 생태통로에는 모니터링시설도 설치하게 된다. 경북지역 상당수 언론은 이 과정에서 "고속도로, 철도, 국도, 지방도 개설로 능선이 끊어진 백두대간 추풍령 구간이 다시 연결된다"라는 표현을 사용, 마치 추풍령 고개 정상 위로 생태통로가 연결되는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백두대간 추풍령 마루금은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되는 지점으로, 경북이 추진 중인 생태통로보다 조금 북쪽인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충북 영동군은 해당 지점에 소공원과 함께 '추풍령 기념탑'을 설치한 바 있다. 바로 옆에는 가수 남상규가 부른,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으로 시작되는 추풍령
수레는 둥근 바퀴와 축의 회전운동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쉽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수레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원전 3천년전 서아시아로 추론된다. 수레의 등장으로 물자와 사람들의 이동 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도시 발달이 촉진됐다. 나아가 인류는 수레를 보다 잘 이용하기 위해 길을 닦았다. 현재는 그 수레가 자동차, 길이 고속도로 등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만주 집안현과 한반도 평양, 황해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벽화에는 18개의 고분에 40여개의 수레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고대 수레바퀴는 크게 텟쇠. 빗등, 살, 장구통, 메뚜기 등의 부품으로 구성돼 있다. 텟쇠는 목재 바퀴를 보호하기 위해 두루는 쇠, 빗등은 바퀴의 테를 이루는 목재, 살은 바퀴테를 유지하기 위해 빗등과 장구통 사이에 끼우는 것으로, 주로 참나무로 만들었다. 장구통은 바퀴 중앙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나무통으로 살이 이 부분에 모아져 꽂혔다. 메뚜기는 양쪽 바퀴를 가로로 연결하는 축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축구멍에 꽂은 쇠를 일컬었다. 수레바퀴 가운데 가장 만들기가 어려운 부분은 바퀴의 모양대로 철판을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