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공녀(貢女)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다. 고려 원종은 무신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종은 그 과정에서 원의 힘을 빌렸고, 고려는 그 대가로 부마국이 되었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사위나라 고려에 대해 해동청(海東靑·매) 등 각종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다. 공물 목록에는 공녀(貢女)도 포함돼 있었고, 그것의 표면적인 이유는 원나라 병사 장가들기였다. 원나라를 무너트리고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도 조선 전기까지 공녀를 요구했다. 조선은 영락제(永樂帝)을 시작으로 선덕제(宣德帝)까지 26년간 총 7차례에 걸쳐 1백여명의 공녀를 받쳐야 했다. 명나라의 제 3차 조선 공녀 요구는 1417년(조선 태종 17)에 있었고, 이때 2명의 10대 소녀가 선발되었다. 《태종실록》은 이에 대해 '중국에 진헌할 처녀를 가려 뽑게 하였더니, 황씨·한씨를 상등으로 삼았다. 황씨는 용모가 미려하니 고 부령 황하신의 딸이고, 한씨는 선연하니 고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가운데 황하신의 딸은 처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황제가 황씨의 처녀 아님을 힐문하니, 그제야 이르기를, "
중국과 바티칸 교황청이 머지 않아 수교를 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1783년(정조 7) 12월부터 4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필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이듬해 1월 북경교구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당시 조선은 중국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는 1784년 귀국해 임의로 천주교 제도를 만들어 미사를 올렸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그 같은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는 믿음이 깊은 윤유일(尹有一)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구베아 주교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책망했다. 이때부터 첫 영세자 이승훈을 중심으로 외국 성직자 영입운동이 일어났다. 구베아 주교는 이에 화답해 처음에는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인 밀사를 만나지 못하면서 조선 입국에 실패했다. 그 후속으로 선발된 인물이 조선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
속리산 법주사~세심정 구간에 '세조길'이 개설돼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조는 1464년 2월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 복천암을 찾았다. 약간 다르지만 이때 거둥[擧動]한 길이 최근 개설된 세조길의 바탕이 됐다. 세조길은 평소의 등산로가 아닌, 법주사 수원지의 남쪽 사면으로 우회하고 있다. 『세조실록』은 당시 세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福泉寺)에 쌀 300석, 노비 30구, 전지 200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2개 인용문에 등장한 지명은 보은현 동평(東平)·병풍송(屛風松)·속리사(俗離寺)'복천사(福泉寺) 등이다. 동평은 보은지역 동쪽에 있는 들[野,] 복천사는 지금의 복천암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병풍송'은 '머물렀다', '행궁으로 돌아왔다'는 서술어가 뒤따르
신유박해 떼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배론의 토굴(土窟)로 피신, 이곳에서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였다. 이때 토굴 안의 황사영에게 신유박해의 참상과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인물이 김한빈(金漢彬, 1764-1801)이라고 전회에 밝혔다. 토굴의 사전적인 의미는 '땅을 파서 굴과 같이 만든 큰 구덩이'이다. 이런 토굴은 수평굴인 횡혈(橫穴)과 수직굴인 수혈(竪穴)로 나눠진다. 배론 토굴은 횡혈로 그리 깊지는 않다. 배론 토굴을 만드는 데는 김한빈보다 당시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金貴同, ·~1802)이라는 인물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귀동이 배론을 찾은 목적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측 기록을 수집·정리한 책으로 『사학징의(邪學懲義)』가 있다. 줄여서 '징의'라고도 부르는 이 책에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직업 및 입신 동기, 신앙활동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사학징의』는 김귀동 자백 내용을 '저는 본디 고산(高山) 사람입니다. 제천(堤川)의 흙과 나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옹기를 구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계획으로 올해 2월 초승에 배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 기간 동안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대대로 노론 집안이었던 그녀(김한구 딸)는 집권 보수세력인 노론과 손을 잡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 반대세력 남인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이 과정에서 남인계열이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약종(若鍾) 이 사형에 처해졌고 약전(若銓)은 흑산도,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용가의 맏사위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약용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했다. 그는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제천 배론으로 피신, 신학당 뒤편의 토굴에 은거했다. 그는 이 토굴에서 신유박해 참상과 교회재건 방책 등의 내용이 담긴 '황사영 백서'를 써,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백서는 62×38㎝ 크기의 명주천으로, 그 위에 1만3천300여자의 한자를 적었다. 백서의 내용 중에는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
테레사 수녀가 가톨릭 성인(聖人, sanctus)의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한국 가톨릭 성인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103위가 성인의 반열에 올라있다. 가톨릭 교회법상 성인의 반열에 오르려면 물리적, 윤리적 기적(奇蹟, miraculum)을 행하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반열에 오른 103위는 기적 확인 과정을 생략하고 지난 1984년 복자에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로마 교황청은 목숨과 맞바꾼 신앙심 자체를 기적으로 판단하였다. 한국 가톨릭 103위 가운데 충북과 연고가 있는 인물의 한 분으로 장주기(張周基, 1803∼1866) 요셉이 있다. 수원이 고향인 장주기는 1820년대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의 배론으로 이주하였다. 1855년 그의 돈독한 신앙심은 자신의 집이 신학교로 사용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신학교는 이 같은 배경 아래 탄생하였다. 배론신학교의 초대 교장은 프랑스 파리 외방교회 소속의 푸르티에(Pourthie, 한국명 신요안, 1830-1866)로, 1855년 6월 중국 상해를 거쳐 바닷길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배론신학교의 교수직은 프랑스 출신의 또 다른 신부인 프티
충북 불교의 '큰집'인 법주사가 요즈음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법주사는 충북도의 요청을 수용, 관광진흥 차원에서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적 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소승'(小乘), 널리 중생 구제를 목표로 하는 것은 대승(大乘)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법주사의 이번 결정은 대승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속리산 법주사는 국보와 보물급 유물을 많은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국보 제 64호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석연지의 겉면에는 활짝 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그리고 물그릇 모양의 내부는 많은 양의 물을 담수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그래서 석연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체로 통일신라 때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연지 조각의 정수는 몸돌 겉면의 연꽃 문양이다. 겉면 하부에는 돌아가며 각 면마다 2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해 강한 질감으로 돋을새김 돼 있다. 그 위에는 연꽃 무늬 8개가 역시 돋을새김 되어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전통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난간 모습의 조형물이 올려져있다. 석연지의 용도와 관련하여 그 안에 물을 채우고 연꽃을 띄웠다는 설이 구전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이 흉(서가)할 경우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꾸려 선대 왕의 실록을 간행,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역대 왕의 실록 가운데 '지리지'의 체계까지 갖추고 있는 실록은 이 유일하다. 바로 이다. 세종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중앙집권 강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세종은 지방의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지리지인 (新撰八道地理志)이다. 는 를 바탕으로, 누락된 내용까지 보완해 단종 2년(1454)에 완성되었다, 8권 분량의 는 고을마다 다소의 편차가 있지만 지방관의 인원, 연혁, 고을의 별호,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의 사방 경계, 호구(戶口)와 군정(軍丁)의 수, 성씨, 토질과 전결(田結), 특산물, 약재,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소 의외로 약재로 포함돼 있다. 세종은 애민(愛民) 정책의 일환으로 의료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진 의료문화로 수입한 중국 의약서 내용과 조선의 약초 이름·약효 등이 달라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의 노중례(盧重禮,?~1452)를 두 번이나 명
[충북일보] 부강지역은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됐지만, 근대기까지 청주 경제의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부강은 금강 물길의 내륙하항 종점으로 기능하였고, 이를 통해 서해의 각종 해산물과 소금이 청주지역으로 반입됐다. 그런 부강지역 사람들은 1백년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신영우(사학과) 충북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삶은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기 고종 정부는 세금부과를 정확히 하기 위해 측량작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그 성과물을 광무양안이라는 지대장부로 만들었다. 도 광무양안사업의 일종으로, 지난 1900년에 작성되었다. 지금의 부강지역은 문의군의 여러 면(面) 가운데 주로 '삼도면'(三道面)에 속해 있었다. 신교수는 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 집의 규모 △집의 종류 △지주(地主)의 분포도 등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주거상을 상당부분 복원하였다. 그는 "삼도면을 포함한 문의군의 집 규모는 2.5칸 정도인 것으로 분석됐다"며 "이는 같은 광무양안기의 충주지역 규모보다 다소 작은 수치"라고 밝혔다. 전통건축 개념의 '초가 3칸'은 부엌 1개에 방 2개가 딸린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2.5칸'
[충북일보] 돈이나 재물을 쓰는데 매우 인색을 사람을 가리켜 '자린고비'라고 한다. 그런 자린고비는 설화나 전래동화에 매우 다양한 행태로 등장한다. 먼저 '생선 매달고 쳐다보기'는 반찬값을 아끼려고 하는 행동이고, '파리 쫓아가기'는 파리 몸에 묻은 된장과 간장을 되찾으려는 동작이다. 또 '부채를 펴 들고 목을 움직이기'는 부채를 아끼려고 하는 모습이고, '생선 비늘 묻혀서 국끓이기' 역시 생선 살 돈을 아끼려고 하는 동작이다. 이밖에 '무장아찌를 아주 잘게 썰거나 통째로 상에 놓기'는 무장아찌를 먹지 못하게 하려는 모습이고, '엉덩이나 주먹으로 떡 찧기'는 절구와 절굿공이에 떡이 묻는 것이 아까워서 하는 행동이다. 이 가운데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생선 매달고 천장 쳐다보기'다. 몇 년전 TV 전파를 타면서 자린고비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국문학자들은 자린고비의 어원을 다소 다르고 풀고 있다. '겨른고비' → '저른고비' 혹은 '자른고비' →'자린고비' 순으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뒷말 '고비'는 한자 '죽은 아비 考(고)'와 '죽은 어미 비(女+比)에서 온 말로 본다. 그리고 앞말 '자린'은 제사나 차례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