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과 사우(祀宇)는 명현과 관련된 전통시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좀 다르다. 서원은 유학 발달과 관련된 충신이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을 제향한다. 반면 사우는 가문의 인물을 주로 모시고 있다. 우리고장 충주 신니면의 박팽년 사우(충북도기념물 제 27호)가 대표적인 사례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는 신항(莘巷)서원이 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3) 조강 등이 청주지역 여러 사림들과 상의하여 지금의 용정동(속칭 이정골)에 세웠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딴 '유정'(有定)서원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의 위패를 모셨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란 기간중 왜군에게 점령당한 청주도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전화를 입었다. 유정서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구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란후 농경지가 급감하고 유랑자가 많아진 상황에서 복구가 쉽지 않았다. 당시 유정서원의 원장은 서계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었다. 그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동향의 院儒가 무려 1백명에 가까운데 지금 참여하는 사람은 불과 11명에 불과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이 올 발굴 30주년을 맞았다. 충북대 박물관팀이 지난 1982부터 2003년까지 총 6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십여기의 고분에서 4~5세기 무렵의 한성백제기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무기류로는 철갑옷, 화살촉, 철도끼, 철창 등이 나왔고 말과 관련된 무구류로는 말재갈, 등자(발걸이) 등이 수습됐다. 이밖에 '손잡이잔'(파배) 토기도 수습됐다. 고고학적 발굴에는 종종 비화가 뒤따른다. 신봉동고분 발굴에도 비화가 존재하고 있다.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그해 3월 대학 동기인 고고학자 심정보 씨 등과 원래는 상당산성을 산책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차용걸 교수가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자 "상당산성 대신 가까운 야산인 신봉동 일대를 산책하자"며 장소를 바꿨다. 차 교수는 이날 신봉동 일대에 도굴된 고분이 매우 많이 존재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충북도에 긴급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충북대 박물관팀에 의해 정식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유물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도굴갱이 1천개가 넘었다. 특히 도굴범이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나무 위에 망루까지 설치해 놓고 마음껏 무덤을 파헤쳤다. 그
꿈의 사전적인 정의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이다. 꿈의 가장 큰 특징은 꿈꾸는 '나'는 '나'이면서도 현실의 '나'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고전인 주례(周禮)는 일찌기 점몽 편에서 꿈을 꾸게 된 원인에 따라 꿈을 정몽(正夢), 악몽, 사몽(思夢), 오몽(寤夢), 희몽(喜夢), 구몽(懼夢) 등 여섯 종류로 분류했다. 정몽은 깨어나도 기억이 생생한 꿈으로 어떤 문제에 깊이 고심하고 있을 때 주로 꾸게 된다. 악몽은 심히 놀라 꾸는 꿈, 사몽은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꿈속에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잠에서 로또 당첨되는 꿈을 꿨다면 바로 '사몽'이 된다. 이밖에 오몽은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이나 평소에 말한 것을 꿈에 보는 것을, 구몽은 두려워하는 꿈을 말한다. 이밖에 꿈과 관련된 표현으로 비몽사몽(非夢似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태몽(胎夢), 호접몽(胡蝶夢) 등이 있다. 이중 호접몽은 장자(莊子·BC 369 ~ BC 289?)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꿈을 꾸고 난 후 그 꿈의 인상
전회에 조선시대 화폐 대명사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유통시킨 인물이 우리고장 충주시 소태면에 묘가 있는 허적(許積·1610∼1680)이라고 밝힌 바 있다. 틀린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따라 상평청(常平廳) 설치를 건의한 인물이 있었다. 1633년(인조 11)의 김신국(金藎國)이라는 인물이다. 상평통보는 숙종 때 처음 발행돼 조선후기까지 같은 것이 유통된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평통보는 그 모양과 유통 형태에 따라 무배자전(인조 11년), 단자전(숙종 4년), 대형전(숙종 5년), 중형전(영조 28년), 소형전(순조 7년), 당백전(고종 3년), 당오전(고종 20년) 등 7종류로 구별되고 있다. 무배자전은 뒷면에 문자가 없어서, 단자전은 뒷면 상부에 약자로 주전소를 표시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숙종-순조 연간에 상평통보가 대·중·소형으로 구분되는 것은 크기가 작아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면이 있다. 왜 동전 크기가 작아졌는냐는 점이다. 원료 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 재료인 구리와 주석의 확보가 쉽지 않게 되자 갈수록 엽전 크기를 작게 만들었다. 김신국은 화폐의 필요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인조
서민경제의 주거래 수단은 뭐니뭐니 해도 동전, 지폐 등으로 구성되는 화폐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조선 숙중대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앞서 고려 조정도 이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고려 조정은 곡식, 면포 등 현물로 경제적인 거래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숙종 7년에 비로소 관청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고 해동통보(海東通寶)라는 글자를 표면에 새겼다. 드디어 종묘에 고하고 처음으로 돈을 썼으며 (…) 민간에 무역을 허락하여 돈의 편리함을 알게 하였다.'- 인용문 중의 숙종은 조선이 아닌 고려의 임금, 그리고 해동통보가 주조된 숙종 7년은 1102년이 된다. 그러나 해동통보는 오래 유통되지 않았다. 고려 백성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현물을 매매수단으로 선호했다. 고려사에 등장해 있는 내용을 조선후기 이긍익(1736-1806)이 연려실기술에 다시 수록했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화폐를 쓰게 한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나 백성들이 쓰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이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또 폐지하였다'라고 썼다. 조선 조정도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선조-광해군 연간의 명신으로
얼마전 '이화령 구간 복원 기공식'이 현장에서 열렸다. 금년 10월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연장 46m, 폭 14m의 생태너널이 구축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일제에 의해 끊어졌던 우리 민족의 대동맥을 이어 민족정기와 얼을 되찾게 됐다"는 요지의 축사를 한 것으로 언론이 보도했다. 민족 정기를 거론할 때 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이른바 '일제의 만행'이다.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받았다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 △지명을 개명했다 등의 내용이 단골로 뒤따른다. 이화령에서의 일제 만행은 두번째 유형인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로 설명됐다. 일제의 만행은 상당부분 사실이고 문헌이나 행정기록 등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이화령을 신작로 형태로 개통시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화령이 한반도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가 아닌 고려시대다.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 만큼 고려시대에 작성됐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사는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대왕의명을 받아 기술했다. 고려사에 이화령(梨花嶺)의 또 다른 표
조선시대 관청에서는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고을 벼슬아치의 명단을 기록했다. 이를 환적(宦蹟)이라고 불렀다. 안책(案冊), 수령안(守令案) 등도 같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환적을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에 청주수령을 역임한 인물은 총 25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기별로 살펴보면, 15~16세기 조선 전기의 청주수령은 총65명인 가운데 이중 44%인 28명이 문과 급제자로 조사됐다. 반면 무과 출신자는 4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5세기 청주수령 중에서는 문과 출신자가 7할에 가까우나, 16세기에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4할대로 떨어졌다. 반면 16세기에는 무관 출신이 7.7%에 이르고 음관도 6명으로 11.5%에 이르는 등 15세기에 비해 문관의 비율이 급락했다. 이밖에 17~19세기의 청주 수령직은 194명중 140명이 문과 출신으로, 72.2%를 차지하였다. 이에 비해 음관 출신은 53명으로서 27.3%, 무과 출신은 1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들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 지면서 음관 출신자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현종 연간에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 중에 이만영(李晩榮·1604∼1672)이 있다. 그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1982년 3월 하순에 청주시 운천동 속칭 산직말 입구에서 오래된 비석 하나가 발견된다. 바로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된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碑)는 정방형의 형태로 3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 재질의 비는 높이 92㎝, 너비 91㎝, 두께 15~20㎝ 등의 제원을 지녔다. 발견 당시 비는 윗부분은 절단되고 아래 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마멸이 심해 비문 내용이 완벽히 판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비문 중에 '壽拱二年歲次丙戌'(수공이년세차병술)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壽拱'은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절에 사용하던 연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사적비로 확인됐다. 따라서 문화재 명칭도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문은 완전한 문장으로 해석되는 것은 거의 없으나 불교찬양, 왕덕 칭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신라 중심의 세계관도 엿보인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비문 판독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멈춰서 있다. 대신 이 비가 3면 비인가, 아니면 4면 비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완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다. 지난 1989년에
송강 정철의 직손 중에 정호(鄭澔·1648∼1736)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을사환국으로 파직돼 문외 출송됐으나 말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장암사당'이 우리고장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화영산에 위치하고 있다. 장암사당이 창동리에 자리잡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충주지방 최초의 서원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된 팔봉서원으로 김세필, 이자, 이연경 등을 제향했다. 이때까지 팔봉서원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중앙정계에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은 대립은 향촌의 사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서원 건립을 통해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남인계 인물인 한치상(韓致相·?-?)은 팔봉서원을 자파의 서원으로 간주하고 1672년(현종 13) 사액을 상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수신이 추향됐다. 이로서 팔봉서원에 정치색이 입혀졌다. 앞서 1661년(현종 2)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운곡서원을 건립, 스승인 정구(鄭逑·1543-1620)을 모셨다. 정구는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로 부임 후 서당을 열어 충주의 유학들을 지도한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 지나도 /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문둥병 시인 한하운(韓何雲·1920~1975)이 1949년 '신천지'에 발표한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의 일부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 마치 광야의 고행처럼 묘사돼 있다. 다음 시 '벌'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한하운의 또 다른 시다. '죄명(罪名)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條項)에도 없는 /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 시 '소록도 가는 길'에서는 '붉은 황토길'과 '쑤새미 같은 해'가 공간과 시각적으로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반면 시 '벌'은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천부인권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문둥병의 본래 이름은 발견자 한센(G.A. Hansen)의 이름을 딴 '한센씨병'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한센씨병을 '나병'(癩病) 또는 '나질'(癩疾)이라고 불렀다. 실
북한 황해도 동북부에 곡산이라고는 곳이 있다. 지명사전은 곡산에 대해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때는 영풍군(永豊郡), 고려시대에는 곡주(谷州)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명의 변동이 심했다. 태조 때는 현비 강씨의 고향이라고 해서 '곡산도호부'로 승격했다. 현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첩이었지만 본처 한씨가 일찍 죽으면서 조선 왕조의 첫번째 정비가 됐다. 1400년 이방원이 조선의 세번째 왕위(태종)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골육상쟁으로 얼룩졌다. 방원은 현비강씨의 두 아들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죽인 뒤 보위에 올랐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종의 등극은 강씨의 고향에도 영향을 미쳐 곡산도호부는 '곡산군'으로 격하됐다. 곡산 출신으로 또 다른 유명 인물로는 연사종(延嗣宗·1360∼1434)이 있다. 그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행동을 함께 했다. 2차 왕자의 난 때는 방원의 편에 가담해 방간을 제압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됐다. 현재 연사종은 곡산연씨의 실질적인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세종대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오면서 의서(醫書)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현재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도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돼 있다. 오랫동안 빨래판 용도 등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멸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비에서는 '元泰'라는 사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사학자들은 "신라 귀족의 한 명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金元泰'라는 인물이 원천동 신라사적비의 '元泰'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귀족들은 태반이 '경주김씨'였기 때문에 성 표기가 종종 생략됐다. 김원태는 성덕왕의 전비(前妃)인 성정왕후(成貞王后)의 아버지로, 진골의 성분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성정왕후는 716년(성덕왕 15)에 출궁(出宮)을 당하게 된다. 이 대목을 학자들은 귀족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김원태 일족이 패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원태를 703년(성덕왕 2) 7월에서 705년 1월까지 중시(中侍·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원문(元文)과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원문은 704년에 죽었으므로 성정왕후의 출궁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원태'가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에 등장해 있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된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우리고장 청주에 서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