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정황상 의병들의 반격은 1차 전투에서 패한 그날 야간에 준비를 해 다음날 새벽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728년 3월 23일과 24일 사이다. 장담의 조카 경수(景洙)는 순직한 삼촌을 대신해 청안읍치 인근 마을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담의 조카 경수로 하여금 연명겸의 집으로 가게하여 사청리(射廳里)와 상용문리(上龍門里), 용문리(龍門里)와 내외룡동(內回龍洞), 외회룡동(外回龍洞)에서 고르게 선발하게 하고 출신(出身)인 閔道昌과 더불어 거느리고 오게 했다.'- 전통용어 '출신'은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아직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후 경수는 매박리(梅朴里)로 가서 종질인 장태화(張太和), 조강동(釣江洞)으로 가서 권대열(權大悅)을 규합하는 등 60여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마을이름(里)은 '1872년 청안현지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안현에는 읍내면, 북면, 남면, 동면, 서면, 근서면 등 6개 면이 존재했다. 이중 사청리는 근서면, 매박리, 회용동, 조강동 등은 읍내면에 위치했다. 근서면은 지금의 증평일대, 읍내면은 청안면 읍내리에 해당하고 있다. 의병들은 청안현청 가까이 접근해 북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
[충북일보] "그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짜 청안현감 鄭重益의 반군에 가담한 임필현(林必玄)이 한 이 말은 당시 기층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다. 토역일기 상으로 확인되는 반군 인물은 명현(命賢), 석창(碩昌), 몽엽(夢燁), 금립(今立), 시세(時世), 시만(時萬), 세강(世强), 반리(伴里), 임필현, 신평(信平), 차동(次同), 흥석(興石), 귀현(貴玄), 비억(非億), 명이(命伊), 성좌(性佐), 명이(明伊), 막남(莫男) 등 모두 18명이다. 이중 시세, 시강은 형제간이나 가까운 혈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차동, 흥석, 귀현 등은 당시 청안현의 관노였다. 나머지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느낌상 막동, 몽엽 등도 관노로 보여지고 있다. 각사등록, 영조무신별등록 등 1728년 무신란을 기록한 다른 기록에는 雄伊, 京元 등의 관노 이름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신년 반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층민으로 '부역을 제외시켜주고 부역을 삭감시켜준다'는 꾀임에 빠져 참여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이 반드시 신역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이인좌가 파견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청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감의 인부(印符)를 빼앗는 것이었다. 인부는 관인(官印)과 병부(兵符)의 준 말로, 임금의 신임장과 동일시 됐다. 관인은 말 그대로 관에서 찍는 도장을 의미하나, 병부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군대를 움직일 때면 임금의 교서와 함께 반드시 부절(符節)의 일종인 병부를 맞춰봤다. 부절은 대나무나 옥 따위로 만든 신표로 하나는 조정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관에게 주어,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두 조각을 맞춰봤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병부제를 운영한 것은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5.16 등 근현대의 모든 쿠데타는 군대가 국가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나면서 성공했다. 1728년 3월 19일.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인부를 빼앗기 위해 부하 금립(今立), 시세(時世) 등을 진짜 청안현감 이정열(李廷說·?-1728)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냈다. '19일 사렴이 今立, 時世 등이 고을 원이 印符를 탈취하기 위해, 시각을 정해서 보냈다. 두 역적이 고을 원이 피해서 숨을있는 곳에 가까이 도착하여 검을 빼들고 곧다로 들어가서
[충북일보] 무신란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은 실록에 칼을 잘 다뤘던 인물로 표현돼 있다. 다음은 이인좌가 경기도 죽산전투에서 관군에 사로잡힌 후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과 정중복·정중익 등 형제이며….'- 청주읍성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당시 진짜 청안현감으로 있던 인물은 이정열(李廷說·?-1728)이었다. 그는 반란군이 진격해 오자 관청을 버리고 도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때가 청주읍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간지 이틀 후인 3월 17일로, 원문은 이렇게 적혀 있다. 聚會軍卒 太半不至: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태반이 오지 않았다. 勢難守成 姑避其禍: (이정열은) 성(관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동안 그 화를 피하고자 했다. 仍卽棄官而走 鼠伏山谷: 인하여 관청을 버리고 달아나 산곡에 깃들어 납작 숨었다. 官屬無一人從之者: 관 벼슬아치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청안현 읍치는 무주공산으로 변했고, 이런 가운데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이 3월 18일 부임했다. '18일 오시에
[충북일보]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
[충북일보] 민원보(閔元普), 민덕효(閔德孝), 민백효(閔百孝), 민복효(閔復孝), 민득효(閔得孝), 민관효(閔觀孝),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1728년 무신란에는 충주목의 남인계열 사족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여흥민씨와 그 인척들이 유독 많았다. '김덕유는 충추 사람으로 민암의 사위이고 한세홍의 내구(內舅)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으므로….'- 이런 여흥민씨 중에는 '효'자 돌림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민원보의 항렬이 높고, '효'자 돌림은 그 아래임을 보여준다. "충주목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의 아들 민복효·민득효는 연좌시켜 교형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에 '부인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민원보는 무신란 충주지역 주모자로, 연좌제에 의해 두 아들이 교형에 처해졌고 다만 어미만 고령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 《영조실록》에 민원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충주지역 인물은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충북일보] 환국(換局)은 정권이 급작스럽게 교체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조선 숙종대에 이같은 환국이 경신, 기사, 갑신년에 3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 받았다.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기사환국으로는 서인, 그리고 갑술환국으로는 다시 남인을 몰아냈다.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됐고, 서인은 그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됐다. 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먼저 사약을 받았지만 남인의 영수 민암(閔墨+音·1636-1693) 역시 갑술환국(1694)으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사됐다. 민암의 동생이 민희(閔熙·1614-1687)이고, 그 또한 형과 같은 남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남해안의 궁벽한 곳으로 유배돼 끝내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죽었다.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가 74세이었다.'- 1728년 일어난 무신란과 관련해 청주지역만 많이 부각돼 있으나 우리고장 충주지역의 호응도 무척 강했고, 이를 이끈 인물이 민희의 손자인 민원
[충북일보] 경종의 급서하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 대부분은 영조에 호감을 갖지 않은 세력인 소론과 남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중에는 권서봉(權瑞鳳·?-1728)이라는 인물로 있었고, 그는 이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야 했다. '임금이 오두석과 이삼령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오두석·이삼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권서봉(權瑞鳳)·최선·정전·이가운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서봉의 유배생활을 그리 길지 않아, 무신란 1년 전인 영조 3년(1727)에 해배됐다. '을사년 이후 이명의는 북변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인용문 중 '근읍'은 말 그대로 가까운 읍, 그리고 '방한'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권서봉은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인좌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인좌는 사람을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