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품인가, 위작인가. 진품이라면 저자는 누구인가.' 훈민정음 창제(1443년)보다 8년 앞서, 한글의 제자(製字) 원리를 실험한 "圓覺禪宗釋譜"(원각선종석보)라는 불교 고서가 현존하고 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만약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으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는 새롭게 쓰여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보은군과 보은문화원은 7일 오후 2시 보은문화예술회관에서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인 강상원 박사와 정성욱 시인 등을 초정,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 강연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본보는 강 박사의 발표문을 미리 입수, 그 내용을 살펴봤다. 불교계를 대변하는 그는 발표문에서 '원각선종석보는 훈민정음보다 8년 앞서 한글의 글자 원리를 실험한 불교 고서'라는 점을 가장 강조했다. 이 설은 강박사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기는 하나 수년 전부터 국내 불교계 일부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노태조(대전보건대) 교수는 지난 2003년의 '원각선종석보의 찬성 경위'(불교문화연구 제2집) 논문에서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스님(2000년 열반)이 소장해 오던 것을 려증동 교수를 통해 공개하게 됐다'고 서술한 바 있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방문하기 위애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조정 대신중 누구를 대동했는지 당일 기록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 세종실록은 그날 기사를 '임금과 왕비가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니,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따라갔다'(上及王妃幸淸州椒水里 世子隨駕)라고만 적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초정약수에 1차(봄철)로 머물 때인 1444년의 3~5월 동안의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우의정 신개(申槪),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판중추원사 성달생(成達生), 병조판서 정연(鄭淵), 영흥대군 이염(李琰),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등 6명의 대신과 1명의 대군 이름이 등장한다. 이중 영흥대군 이염은 세종의 8번째 아들로, 문종의 동생이 된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 세종을 호종(扈從), 즉 호위하며 뒤따라간 대신들은 더 있었다. 개인문집에 △초수리 △호종 △당시 풍경묘사 등의 내용이 등장하면 세종대왕을 호종한 신하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그런 예에 해당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 성종의 특명에 의해 편찬된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다. 문집에는 '扈從淸州 次醴泉懸板 三首'(호종청주 차예천현판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개천절 노래의 작사자인 위당 정인보(鄭寅普·1893~1950·사진) 선생의 의관장(衣冠葬·초혼묘의 일종) 충주 가금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교훈의 공간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는 묘소안내 표지판도 도로확장 과정에서 사라져, 올 위당의 묘소는 쓸쓸한 개천절을 맞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위당은 6·25동란 중인 1950년 7월 20일 북으로 강제로 끌려가던 중 9월 7일 미군 폭격으로 황해도 서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육신은 독립운동가 현상윤, 송호성, 박열 등과 함께 평양 인근의 '재북인사묘'에 안장돼 있다. 이에 남한에 남아 있는 위당의 핏줄들은 그가 생전에 입었던 두루마기를 부인 조씨묘와 합장하는 방법으로 몇해전 충주 가금면 장천리 1081-1 선산에 의관장을 조성했다. 초혼묘 상석에는 음각자로 '담(치자나무 담)園公 太皇帝 三十년 癸巳 五月 六日生 庚寅 六·二五 動亂中 七月 二十日 拉北 號爲堂 延禧專門敎受 國學大學長'이라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는 독특한 물맛 때문인지 뭇 문인들이 많이 찾았고, 그 느낌을 시로 남겼다.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을 언뜻 적어도 신숙주, 서거정, 이승소, 방문중, 하연, 박팽년, 안평대군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초정약수를 직접 방문했는지, 아니면 소문만 듣고 시를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위에 열거한 인물 모두는 세종연간에 생존했다. 따라서 세종과 함께 초정약수를 찾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안평대군 등은 사료를 통해 직접 확인되고 있다. 열거한 인물 중 방문중(房文中)은 좀 특이한 인생 궤적을 지니고 있다. 그는 태종 때 과거에 급제했고 본관이 '남양'(지금의 수원)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을뿐 나머지 관직은 거의 기록돼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곧은 성격에 패기가 만만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실록에 나타났다. 고대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가 존재했다. 황제는 정비인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도 이 제도를 내심 크게 반겼다는 증거가 사료에 속속 존재하고 있다. 태종은 공식적으로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기록
고 신동문(辛東門·1928~1993·사진) 시인의 절필은 정치적 필화사건과는 무관한, '스노비즘'(snobbism)에 대한 반발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노비즘은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 또는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영국작가 새커리 '스노브 독본'이라는 소설에서 유래했다. 제 1회 신동문 문학제가 사단법인 딩아돌아문예원(이사장 박영수) 주최로 지난 26일 청주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이날 문학제에서는 대상 백민정(전남여상) 등 입상자 시상과 함께 이화여대 유종호 명예교수가 '신동문 시세계'를 주제로 특강을 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고 신 시인의 단양 귀농과 관련해서는 "필화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있어왔다. 실제 신 시인은 △경향신문 독자투고건(1964년) △창작과 비평에 리영희의 글 게재건(1975년) △신동엽 유고시집건(〃) 등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은 바 있다.(표 참조) 그러나 유 교수는 "신 시인의 절필에 대해서는 외압설 등 이런저런 얘기가 돌고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경위는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며 "주된 이유는 귀농 의지였다"고 밝혔다. 신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道岩面)은 지난 2007년 행정지명을 '대관령면'으로 개명하면서 대관령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일거에 가져간 바 있다. 본래 대관령은 강릉시 위치에서 볼 때 '동해쪽으로 넘어오는 큰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었으나 도암면이 선수를 치면서 강릉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대관령면은 백두대간 대관령이 지니고 있는 설원, 옛길, 고랭지, 목축관광 등의 이미지를 독식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 도암면은 전통시대 때는 강릉군에 속했었다. 때문에 지난 2007년의 개명은 일종의 지명 쿠데타였다. 강원도 영월군 서면 선암마을에는 한반도 모습을 닮은 지형이 위치하고 있다. 서면을 지난 2009년 지명변경을 통해 이의 홍보를 극대화하기로 하고 면이름을 '한반도면'으로 바꿨다. 이처럼 지명변경을 통해 자기 지역을 홍보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도내에서도 지난 2005년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개명한 것을 시작으로 △보은 내속리면→속리산면(2000년) △〃 외속리면→장안면(2007년) △〃 회북면→회인면(2007년) △충주 이류면→대소원면(2012년)으로 각각 개명했다.(표 참조) 그 결과, △'온천의 이미지가 살아났다'(수안보면)
장자 추수편에는 상상속의 새인 봉황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워낙 고결한 새이다 보니 함부로 먹지 않고 아무 곳이나 앉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릇 원추라는 봉황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약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夫원추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인용문중 '예천'(醴泉)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예천은 감천(甘泉), 즉 단맛이 솟는 샘이라는 뜻으로 태평성대에만 상서로운 기운이 솟구친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인용한 중국고전 예기는 '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예천이 솟아나는구나'(天降甘露 地出醴泉)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도 비슷한 분위기를 시를 남겼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해도 하늘이 모른다면 / 어찌하여 예천이나 지초가 땅에서 나겠는가 / 백가와 천사를 모두 궁구해야 하지만 /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 터득하여라.'- 효도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 현세가 곧 '예천의 땅', 즉 낙원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학군주로 다방면의 학자적인 경지에 올랐던 세종대왕이 '예천'의 의미를 모를리 없다. 그는 우의
'가금면대 금가면.' 충주지역의 두 면은 이웃하게 위치하면서 면이름이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최근까지 가금면의 우편물이 금가면으로, 금가면의 우편물이 가금면으로 배달되는 해프닝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의 개명이 확실시 되면서 이같은 해프닝은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면 외에도 충주지역에는 '유난히 이상한 면이름'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주위에서는 이같은 유형의 면이름으로 금가면 외에 살미면, 소태면, 동량면, 산척면, 신니면 등을 꼽고 있다.(표 참조) 이들 면이름은 △금가면에서는 집을 잘 지어도 금이 간다(금가면) △'살' 자가 한자 '殺'을 연상시킨다(살미면) △매우 쓰거나 짠 음식을 연상시킨다(소태면)라는 소리와 함께 종종 주위의 놀림 대상이 돼 왔다. 이밖에 △'동냥'으로도 발음되면서 '거지'를 연상시킨다(동량면) △'산적'과 발음이 비슷하다(산척면) △'신니' 혹은 '시니'로 불리는 등 발음이 까다롭다(신니면) 등의 소리를 듣는 면도 있었다. 나아가 이들 6개 면에는 "일제가 작명을 하다보니 그 모양이 됐다"라는 자조섞인 말이 따라 다녔고, 이는 지역의 이미지는 물론 자존심을 건드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한양도성을 출발한지 닷새만인 1444년 3월 2일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도착했다. 이때 신하들중 누가 세종대왕의 어가를 호종, 즉 뒤따랐는지 실록에는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다. 이보다는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유고문집인 '박선생유고'에 여럿의 인명이 등장한다. 유고문집은 '世宗幸椒井。時河公演,李公塏,申公叔舟,崔公恒,黃公守身,李公思哲及安平大君等竝扈駕'이라고 기술했다. 해석하면 '세종이 초정에 거둥했다. 이때 하인, 이개, 신숙주, 최항, 황수신, 이사철 및 안평대군 등이 함께 어가를 뒤따랐다' 정도가 된다. 그러나 박선생유고에 빠진 인물이 있다. 바로 당시 우의정 신개(申槪·1374∼1446)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가 실록을 몰래(?) 보자고 할 때 그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시대의 임금과 신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숨겨서 뒷세상에 전하였으므로, 호령(號令)과 언어·행동의 즈음에 이로 인하여 경계로 삼아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사관(史官)을 설치한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이성계는 사관이 자신을 어떻게 평했는지 무척 궁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번 말고 그 이전에
청원군 강내면 지명의 변경을 둘러싸고 벌어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번 갈등의 발단은 지난 2010년 상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보는 당시 한국교원대부속고 김순배 교사의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 지명의 문화정치적 변천에 관한 연구'를 인용, "미호천의 어원이 수계 한 지역의 지명인 '미곶'(彌串)에서 유래했다"고 2010년 5월 11일자로 처음 보도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처음 보이는 '미곶'은 이후 '彌串津'(미곶진·1872년 연기현 지방지도), '美九里'(미구리·1896년 구한말한반도지형도)를 거쳐 1910년대부터 지금의 '美湖'(미호)로 불려지게 됐다고 논문은 밝혔다.(표·대동여지도 참조) 본보가 이를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라는 코너를 통해 지난 2012년 7월 4일자와 같은 연월 6일자로 연속 보도하면서 '강내면'을 '미호면'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현재 강내면민들 사이에는 ①면이름을 '미호면'으로 바꾸자는 그룹 ②지금의 '강내면' 이름을 고수하자는 그룹 ③면이름을 '강내면'도 '미호면'도 아닌 아예 제 3의 이름으로 바꾸자는 그룹 등이 존재하고 있다. ①번 집단(면명칭변경 추진위원회)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