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한국의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는 구한말에 자본주의 맹아(싹)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내지 자본주의 내적 발전론이다. 반면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군은 일제가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충주목 출신이면서 단양군수를 지낸 유수원의 《우서》(迂書) 일고나면, 적어도 구한말의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의 '새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유수원은 점포 자본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점포를 육성·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그는 《우서》에서 '마판자(馬販子)와 배부상(背負商)들이 하루가 다하도록 분주히 다녀도 별로 팔지 못하고, 서울 입전(立廛)의 상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손님을 기다려도 팔을 내젓고 지나가는 사람이 10이면 8~9나 되니, 이로써 보아 비록 공상(工商)을 성행시키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우서 제1권)라고 자문했다. 인용문의 마판자는 말짐장수, 배부상은 등짐장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영세 규모로는 상업을 번창시킬 수 없다고 봤다. 나아가 그는 점사(점포)가 있어야
[충북일보]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내(苕川)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1801-1818년까지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충주 하담(荷潭)·목계·가흥,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 등이 등장하는, 남한강 물길을 소재로 한 한시를 많이 남겼다. 정약용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부모는 정지해(丁志諧·1712-1756)와 풍산홍씨이고 부모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과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尹小溫·1728-1770)이다.두 사람 사이에서 약전(丁若銓·1758-1816), 약종(丁若鍾·1760~1801), 약용 등의 형제가 태어났다. 다산은 풍산홍씨를 부인으로 맞아 6남 3녀를 낳았지만 그 가운데 2남 1녀만 얻었다. 다산의 조부모와 부모 묘는 모두 남한강 수계 부근인 충주목 가차산면(현 금가면) 하담진 근처에 위치했다. 하소나루라고도 불렸던 하담진은 금가면 하담과 건너편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를 연결했다. 다산은 시 (次長湖院·다산시문집 제1권)의 일부를 '내일은 하담 선영 성묘할 계획인데(來日荷潭謀O
[충북일보] 홍진(洪震, 1877~1946)은 대한제국의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3.1운동 시기 한성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으며,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또 민족유일당운동과 전선통일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여 대일투쟁을 위한 민족역량의 결집에 공헌했다. ◇ 대한제국의 검사,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하다 홍진의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홍산으로 1877년 8월 27일(음력)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삼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진의 출생지를 놓고는 충북 충주나 영동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는 홍진이 검사로서 최초 부임한 곳이 충주였다는 것, 또 그의 본적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서 홍진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홍진은 27세 되던 1903년부터 법관양성소에서 약 1년 6개월간 수학한 뒤 법관양성소 박사와 한성재판소 및 평리원의 주사를 지냈다.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된 그는 그해 12월 충북 충주에 소재한 충청북도재판소에 부임했지만, 1년 6개월 만인
[충북일보]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매주 충북대 사학과 임병덕 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를 연재한다. 내용은 '가까운 아스카'(1-2주), '나니와 궁적, 오사카성'(3-4주), '우지(宇治) 뵤도인(平等院)'(5-6주), '도후쿠지와 후시미이나리진자'(7-8주), '아라야시마(嵐山)'(9-10주) 등이다.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번 시리즈는 일본문화의 뿌리가 상당수 한반도에서 시작됐거나 관련이 있음을 심층적으로 전할 예정이다. 임교수는 고대 중국 법률과 죽간 연구의 권위자로,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 전문위원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법류사상사』,『유골의 증언-고대중국의 형벌』, 『중국고대문명의 기원과 전개』,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고대문화사』, 『동양사1』, 『구조율고』 등 다수가 있다.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위치한 '가까운 아스카'를 이야기하자면 이보다 앞서 성립한 야요이(彌生)시대와 야마타이국을 잠깐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일본열도는 기원전 3세기에 벼농사, 도기제작술, 관개기술 등이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농경생활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가 야요이시대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일본의 청동기시
유수원이 언제부터 귓병을 앓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나일 30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본격적인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조는 소론의 경세가인 유수원을 경상도사, 태천(지금의 평북)현감 등에 잇따라 임명했다. 그러나 유수원은 귓병과 노모 숙환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청각 상실로 인한 실의를 《우서》 저술 등으로 극복했다. 《우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수원의 또 다른 저서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이 있다. 관료 선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1741년(영조 17)에 쓰여졌다. 특히 그 내용이 탕평책과 관련돼 있으면서 영조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조는 유수원을 경연(經筵) 에 참석하게 했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유교 경전이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제도를 일컫는다. 영조와 유수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유수원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임금이 말을 하면 배석한 신하가 한자로 써서 유수원에게 보이고, 유수원 역시 답변을 붓으로 한자를 써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금이 유수원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
[충북일보=청주] 청주시와 청주교대가 청주남중 뒤편의 잠두봉 백로떼를 내쫓기 위해 소나무 간벌(솎아내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잠두봉이 지닌 우수한 입지성과 백로의 서식 습성상 백로떼를 완전히 퇴치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조류학회의 각종 논문에 따르면 백로는 산 경사면이 동향이면서 소나무가 우거진 곳을 서식·번식지로 가장 선호하고 있다. 조사 결과, 백로의 동향 선호도는 평균 4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향은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이점이 있고, 이는 사람들이 동남향 주택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한 일면이 있다고 논문을 밝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잠두봉 동쪽으로는 먹이활동 공간인 무심천이 흐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개구리 등이 서식하는 미호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백로는 하루에 번식지와 취식지(먹이공간)를 많으면 5번 가량 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가까운 취식지가 당연히 선호되는 가운데 먹이환경이 악화되면 최대 28㎞까지 원거리 비행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로가 유독 소나무숲을 좋아하는 것은 배설물로 인한 고사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또 고사현상이 일어나면 옆가지로 '이사' 가기가 쉽기 때문으로 조류 전
[충북일보] 조선의 실학파는 대략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학파와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학파로 대별된다.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은 중농학파, 유수원·박지원·박제가·홍대용 등은 중상학파로 분류된다. 중상학파는 달리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불렀다. 이용후생은 중국 고문헌 《상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고 있다. 중상학파와 이용후생학파는 달리 북학파라고 칭했다. 북학파의 북학은 청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알기 쉬우나 그렇지는 않다. 『맹자』의「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에서 유래했다. 남쪽의 낮은 문명 지역에 살던 초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북쪽의 선진 문명을 배웠다는 의미에서 '북학'(北學)이란 표현이 생겨났다. 박제가가 자신의 실학서를 《북학의》(北學議·1778)로 이름지은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와 유수원의 《우서》는 모두 조선후기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실학서이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대륙을 방문하고 와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롤모델로 했다. 이에 비해 유수원의 《우서》는 스스로의 탐구와 직관을 바탕으로 서술했으면서도 한층 진보적인 상업이론을 담고 있다. 유수원이 《우서》
[충북일보] 서쪽에서 올라오는 배 구면의 동무를 만나면 가끔가다 서로 노를 멈추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요즈음 산골짝 고을에 소금값이 많이 올랐던 걸 서울에선 쌀값이 근래 얼마나 하던가?- 조선시대 충주의 목계를 한시의 주제로 쓴 문인으로 조석윤(趙錫胤·1605∼1654)이 있다. 그는 1640년(인조 18) '賈客行'(고객행)이라는 칠언고시를 썼고, 이 작품은 그의 유고 문집인 '樂靜集'(낙정집) 제5권에 실려 있다.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낙정집》은 14권 7책의 비교적 방대한 분량으로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썼다. 우암은 서문에서 조석윤의 인품을 '공은 성품이 매우 조용한 데다 아무런 탐욕이 없었기 때문에 애써 수양한 것도 없이 저절로 도(道)에 가까워졌다'라고 적었다.◇지명 목계 1636년 해사록에 처음 등장한시 '고객행'은 전체 30구로 구성돼 있고, 이 가운데 1·5·9·13·17구의 운자(韻字)가 다르다. 운자는 시를 지을 때 정해진 자리에 쓰도록 규정한 글자를 말한다. 이는 '고객행'이 5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지명 목계(木溪)가 문헌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36년(인조 14) 김세렴(金世濂·1593
[충북일보]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괴산 출신으로 금산군수로 재임 중, 1910년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최초로 자결 순국한 열사이다. 그의 아들은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이고, 손자는 북한 사회과학원 원장을 역임하고 ≪조선왕조실록≫ 번역 사업을 총괄한 홍기문이며, 증손은 2004년 소설 ≪황진이≫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홍석중이다. 한편 그의 부친 홍승목은 중추원 찬의 등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가족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분단이 빚은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괴산읍 동부리 홍범식·홍명희 고택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에 말끔하게 복원된 고가가 있다. 이 고가는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건축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 이 고가는 홍범식이 나고 자란 곳이다. 뿐만 아니라 홍명희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내판에 홍명희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괴산에서 홍명희를 제대로 기리는 것은 시간을 더 요하는 것 같다. 홍명희 문학제가 파행한 것은 아직도 괴산에 어른거리는 '레드 콤플렉스'의 현
[충북일보] 조선시대 사간원 소속의 정언(正言)은 정6품으로 관품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러나 임금에게 간쟁과 봉박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로, 권력은 막강했다. 따라서 정언으로 벼슬을 시작하면 고속 승진이 보장되면서 관료들 사이에 엘리트 코스로 인식됐다. 간쟁은 임금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직언하는 행위, 봉박은 임금의 잘못된 지시를 되돌려 공박하는 것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정언은 임금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 경연에 참여했고, 인사문제와 법률 제정에도 관여했다. 유수원이 문과에 급제하고 처음 나간 벼슬자리가 정언이다. 그는 정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영의정이자 소론의 거두인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했다. "조태채(趙泰采)가 복법(伏法)될 때는 감히 천 리 길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짐바리에 가득하게 부의물을 보냈으니, 만약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차마 했겠습니까. 결단코 조적(朝籍)에 둘 수 없으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베풀게 하소서."- 조태채라는 인물이 죄를 지어 사형(복법)을 당했는데, 그런 범법자에게 어찌 부조를 짐바리 가득히 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조태구와 조태채는 사촌간이다. '사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