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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표

수필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과학 선생님 말씀이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일의 크기'를 구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마만큼의 일을 해야 할 때, 작은 힘을 들이면 오래 해야 하고 큰 힘을 들이면 짧게 해도 된다. 세상살이도 이와 같다.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공부도 그렇다. 너희가 지금 힘을 크게 써서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편안하게 살 거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하게 될 거다. 노력하지 않고 잘되길 바라는 건 공짜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다."

이후 이 말씀은 내게 진리였다. 이 말씀을 듣고 대오각성하여 죽어라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이 말씀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손톱만큼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살았다. 성실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관계는 더하기와 빼기가 없도록 했다. 사리가 분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조금씩 성취가 쌓이고, 어느덧 어느 정도의 명예와 먹고 살 만한 부를 얻게 되었다. 모두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데 따른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랑스러웠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그저 나보다 적은 노력을 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앞에서 얼마간은 교만하기도 했을 것이다.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와 술자리에서 언쟁을 했다. 그는 인구가 10만 남짓한 작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초중고를 나오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그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는 시민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다. 소신과 행동이 분명한 그가 내겐 항상 멋있게 보였다. 그런 그가 날 만나고 싶다고 청주엘 왔다. 처음에야 분위기가 좋았다. 그동안 잘 살았다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우리는 소주를 한 잔 한 잔 얼큰해지도록 마셨다. 그러다가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역정을 얘기하는데,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신념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자랑하는 거였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그가 열심히 살았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저만 열심히 살았나?' 하는 심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랜만에 대학 다닐 때처럼 그와 토론을 해보고 싶다는 흥취도 일었다.

시동은 내가 걸었다. 한껏 제 기분에 취해 있는 그의 말허리를 냅다 분질러 버렸다.

"야, 이 친구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당연하지. 공짜 바라면 도둑놈 심보고."

"도둑놈 심보? 웃기고 있네. 이 사람아, 세상은 온통 공짜투성이야. 네가 지금 이 정도로 사는 게 모두 네 노력의 정당한 대가라고? 건방 떨지 마, 인마."

초장부터 토론이 되지 않았다. 내가 내뱉는 말들은 예의도 없고 질서도 없었다. 이내 그 말들은 저 스스로 이리저리 날뛰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가 나랑 똑같았으면 큰 싸움이 날 뻔했다.

다음 날 새벽. 갈증으로 자다 일어나 비몽사몽 중에 물 한 잔 마시는데, 문자 수신 알림음이 터졌다. 그 친구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네 말이 맞더군. 세상은 공짜투성이였어. 내 고향 친구들 중 대학에 간 건 극소수더라고. 거기에 내가 낀 건 부모를 잘 만난 덕인데, 그게 공짜였던 거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교장까지 하고 정년퇴직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받은 거였어. 그러니 상당 부분 공짜라고 해야겠지. 지금까지 건강한 것, 우리 아이들이 잘 큰 것,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등등. 내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이 사실상 공짜더라고. 숨 쉬고 잠자는 것, 인간인 것, 지구에서 산다는 것, 등등. 끝이 없더라고. 근데, 너무 늦게 안 게 아닌지 몰라. 공짜로 받은 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갚을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아서 말이야. 중요한 걸 알게 해줘서 고마워."

아오! 난 아직도 술이 안 깨서 해롱거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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