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구름조금충주 17.0℃
  • 맑음서산 18.6℃
  • 맑음청주 18.1℃
  • 맑음대전 18.5℃
  • 구름조금추풍령 19.0℃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홍성(예) 18.0℃
  • 맑음제주 21.3℃
  • 맑음고산 18.8℃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제천 17.2℃
  • 구름조금보은 17.3℃
  • 구름조금천안 17.8℃
  • 맑음보령 18.9℃
  • 맑음부여 18.7℃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김규흥, 망명중에도 고향땅 팔아 독립운동"

충대 사학과 김호진씨 규명
사업벌여 이익금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환 구상
그 일환 북경흥화은행설립·시베리아 차용 시도
죽향초 부근땅 이때 팔려…한때 옥천 최대거부

  • 웹출고시간2014.02.24 18:31:10
  • 최종수정2014.02.24 17:59:20

김규흥

옥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규흥(金奎興·1872~1936)은 중국 망명생활 중에도 고향땅을 팔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규흥(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3일의 KBS 스페셜에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으로 방영되는 등 근래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독립 운동가의 한 명이다.

특히 배경한(신라대) 교수 등 학계에 의해 "공화제를 주창한 중국 신해혁명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담했고, 이것이 중국 혁명파의 조선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약한 편으로, 그가 지론으로 주장한 '둔전제적 독립운동'이 어떤 실천과정을 통해 전개됐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왔다.

충북대 사학과 김호진 씨의 석사논문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했었고, 현 옥천 죽향초등학교 부지는 그의 목화밭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중국 망명 전에 진명학교에 보조금을 내고 또 현 옥천 죽향초등의 전신인 창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 고종을 알현한 것이 적발돼 일경의 감시와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자, 이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단신 망명했다.

그는 중국 신해혁명 동참 후 박용만과 함께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이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환하는 '둔전제적 독립운동'을 구상,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1922년 북경흥화은행의 개점식 모습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구, 8번째가 김규흥이다.

ⓒ 사진=옥천신문
그는 이 구상에 따라 1922년 '북경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고, 당시 이날 개점식에는 김구 선생도 참석했다. <사진>의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구, 8번째가 김규흥이다.

그는 또 조선,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 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고 나중에는 내몽골도 이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나 북경흥화실업은행은 목표액 10만엔의 1/10밖에 모금하지 못하는 등 가시밭길 시작이었다. 김규흥은 이때 고향 옥천에 손을 내밀어, 남은 전답을 팔아 중국으로 송금할 것을 부탁했다.

다음은 김규흥의 손자 한영(漢永·82·현 서울거주)옹이 논문저자 김호진씨와의 인터뷰중 답변한 내용이다.

"창명학교 전신인 죽향초등학교 앞에 아주 옥답이 있었어요. 그것을 계약하려고 전부 주선하였는데 삼촌되시는 분이 와가지고 중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무척 어려우니까 그 돈을 보내야겠다. 그래 가지고 그 돈을 요원을 통해 가지고,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요원을 통해 가지고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께서는 보내주셨어요'-<논문 62쪽>

김옹은 당시 김규흥이 △국내 가족이 중국으로 건너올 수 없는가 △중국에서 그의 편지가 옥천으로 오면 일본경찰이 반드시 사전 검열했다는 내용도 이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규흥은 결국 둔전제적 독립운동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중국 천진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국내로 운구돼 현재 대전 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 조혁연 대기자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매거진 in 충북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세종충북지회장 인터뷰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