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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을 찾아서 - 제천출신 언론인 천관우

"기개없는 기자는 연탄가스 중독자" 일갈
언관이자 사관, 고대서 연구 뚜렷한 족적
명문장의 기행문 고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
한때 '5공' 협력 후회, 부인은 충주서 쓸쓸

  • 웹출고시간2014.02.20 17:44:36
  • 최종수정2014.02.20 17:51:38
한국 현대 언론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물이 있다. 천관우(千寬宇·1925~1991)와 송건호((宋建鎬·1927~2001).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은 모두 충북 출신으로, 제천군 청풍면과 옥천군 군북리가 각각 고향이다.

두 사람은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의 길을 걷는 등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상당히 닮은꼴 인생을 살았다.

<충북일보>가 창간 11주년을 맞아 아직도 선명한 메시지로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족적을 조명해 봤다.

9살때 천재소년으로 소개된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는 1934년 2월 17일자 기사에서 시골 마을 한 천재소년의 출현을 사진과 함께 요란스럽게 보도했다.

'충북 제천군 청풍보통학교에 3학년에 재학중인 천관우 군은 제천군 청풍면 읍리 천영석씨 셋째 아들인데 다섯 살 때부터 읽기와 쓰기가 능하여서 일반은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명석했던 소년 천관우는 청주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사학과 학부 졸업 논문으로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 ~ 1673)의 사상을 썼다.

책(일조각)에 실린 생전의 천관우 모습.

당시는 조선시대 실학에 대한 개념도 성립돼 있지 않았던 시기로, 그가 당시에 쓴 이 논문은 실학연구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했다.

그는 학계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6.15 전쟁이라는 시대의 불우를 만나면서 1951년 <대한통신사>에 입사, 언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문재가 또 한번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952년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수할 때였다.

그는 이때 기행기 '그랜드캐년'을 썼고, 이 글은 명문을 인정받아 제 2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1968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K형, 나는 이것을 보려 여기에 온 것입니다. 별안간 일진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며 옷자락을 휘몰더니 휘날리는 눈, 눈. 멀리 이 협곡의 대안(對岸)인 '포웰' 고원을 운무의 품안에 삼키고, 기발(奇拔)한 봉우리를 삽시간에 차례차례로 걷우며, 마침내 눈 앞에 보이던 마지막 봉우리를 삼키고, 망망한 운해, 휘날리는 눈보라, 그리고 숨가쁜 강풍. 회명(晦明)하는 천지 속에서 나는 옷 젖는 것도 잊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랜드캐년 협곡에 서있는 느낌을 들게 하고 있다. 천관우는 1954년 <한국일보>에 들어가 곧 논설위원이 됐고, 2년 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편집국장이 됐다. 그의 나이 33살 때였다. 젊은 언론인의 기개는 '언관 사관'이라는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임금의 말 한마디로 생명이 좌우되기도 하는 시대, 그 속에서도 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언관의 책임이었다. 서거정 같은 이는 이 언관의 기개를 말하여, 항뇌정(抗雷霆) 도부월(蹈斧鉞) 이불사(而不辭)라고 했다. 아주 풀어서 얘기하면 '벼락이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가도 서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1962년 사상계 1월호>

당시 신문사는 이적이 매우 잦았다. 그는 1965년 <동아일보> 주필을 거쳐 1968년 <신동아>의 '차관' 관련 기사로 필화를 겪으며 해임됐다.

그의 반골정신은 이때부터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그는 불의를 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당시 기자들을 '연탄가스 중독자'에 비유했다.

그는 1969년 1월 10일자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언론상황을 '한국 특유의 비극인 연탄중독같은 것이다. 잠든 사이 스며든 가스에 취해 비명 한 번 못 질러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태다'라고 일갈했다.


천관우는 이때부터는 직접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는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창립하여 공동 대표로 추대되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강화되면서 더이상 사회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그러자 그는 칩거하면서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그의 명저인 고조선사삼한사연구, 가야사연구, 인물로 본 한국 고대사 등은 이때 연구·정리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천직인 신문인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아일보 출신인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당시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바람을 묻자 천관우는 이렇게 답변했다.

"우선 구속된 이들이 하루 바삐 풀려나와야 되겠고 또한 민주질서가 하루빨리 제도적으로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도 '멋있는 기자생활'을 다시 해볼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동아일보 1974년 12월 23일자>

1980넌 서울의 봄도 잠깐, 이듬해 신군부는 5·17 쿠데타와 함게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에게는 이때가 가장 큰 인생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이후 국토통일원 고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전두환 정권에 협력했다.

이때 유행한 말이 이른바 '5공협력 윤·천·지·강'으로, 각각 윤보선, 강원룡, 천관우, 지학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경향신문 최노석 기자가 천관우를 인터뷰했다.

'질문: 과거 체제 비판에 선봉에 섰던 것으로 알려진 천의장이 비록 민간단체이기는 하지만 정부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 협의회를 맡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답변: 나는 과거 장기집권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 항의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비판이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해야겠지만 언제까지나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 시점은 10·26 이후의 진통을 극복·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때문에 해보지도 않고 비판을 일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경향신문 1981년 5월 15일자>

천관우가 왜 5공에 협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여러 정황상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이 부분을 곱씹으며 후회했다.

후배 언론인 김삼웅(전 대한매일 주필)은 '언관·사관의 천관우'(인물과 사상)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후 천관우는 자신의 환력기념논총에서 '여기에 관여한 이후로 구설수가 잦은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다'고 쓸쓸하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또 자택에 칩거, 역사관련논문을 집필하면서 측근들에게 국정자문위원 등을 참여하게 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김삼웅은 '그가 1991년 타계하자 미망인 최정옥 여사는 충주시 연수동 주공아파트에서 극빈자 보호대상으로 생활했다'라고 적기도 했다. 생사 여부 등 그후의 소식은 확인되지 않았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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