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死生契闊) /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與子成說) /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執子之手) / 단둘이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與子偕老)'. 중국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격고'(擊鼓)라는 한시다. 춘추전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의 애절함이 배여 있다. 이 표현이 국내에 유입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과 함께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살아서는 같은 방을 쓰고(生則同室) / 죽어서는 같은 무덤을 쓰네(死則同穴)'도 있다. 조선시대도 백년해로가 주요 미덕이 됐다. 따라서 평민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질투 등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을 경우 남편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이같은 행위를 아내를 버린다는 뜻에서 기처(棄妻) 또는 휴기(休棄)라고 불렀다. 아내가 무척 싫어졌으나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남편들은 이때는 아내를 소박(疏薄)했다. 내쫓지 않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당한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첩 주위를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 거치른 두뺨위에 눈물이 어려 /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가수 남상규씨가 불러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추풍령'이다. 가사 내용이 너무 정겨워 1·2절 모두를 소개했다. '추풍령'은 남상규씨 뿐만 아니라 배호, 나훈아, 이미자 씨 등도 불렀다. 그 만큼 추풍령은 지금의 50대 이상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 일이키는 노래다. 추풍령면소재지에서 김천 방향으로 잠깐 달리면 추풍령 노래비를 만날 수 있다. 고풍스런 한자 글자체 때문에 꽤 오래 전에 세워진 노래비처럼 보이나 그렇지는 않다. 지난 88서울올림픽 때 성황 봉송을 기념, 그해 9월 영동군에서 세웠다. 추풍령는 '秋'와 '風' 자가 만나면서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지명어다. 언뜻보면 명시(名詩)에 등장하는 시어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중국 무협영화에 나오는 이름같기도 하다. 지명 추풍령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 놓은 사료는 존재하
고려와 조선 조정은 출장나가는 관원들을 위해 국영 숙박시설인 원(院)을 운영했다. 원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됐다. 임진왜란 후 이른바 참(站) 제도가 도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흔적이 지명에 더러 남아 있다. 조치원, 광혜원, 장호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광혜원은 한때 '양질의 쌀이 만 되(升)나 난다'는 뜻으로 만승면(萬升面)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난 밀레니엄 때 주민들이 과거 역사를 되찾자는 의미에서 지금의 광혜원으로 개명했다. 광혜원 주민들이 이름을 바꾼 데는 나름의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가 있다. 청주에서 서울을 가려면 지금은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한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는 달랐다. 청주-오창-진천-광혜원-용인 등을 경유했다. 바로 17번 국도다. 조선시대 거유 우암 송시열도 이 코스를 자주 이용했다. 문집 송자대전에 우암의 동선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만의'는 수원을 말한다. '19일에 만의(萬義)에서 출발하여 20일에 죽산 광혜원에 머물렀는데(…) 21일에 국장도감 낭청이 지문의 첨가와 개정에 관한 일로 진천(鎭川)까지 뒤쫓아왔다. 22일에 승지가 또 뒤쫓아와서 서원(청주 옛이름)에서 유지(諭旨)
전회에 지리지의 표현을 빌어 우리고장 단양인물인 황계옥을 소개한 바 있다. '본조 황계옥(黃啓沃)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본문 중 '문명'이 있었다, 즉 문필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은 시를 잘 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황계옥은 투철한 관료정신 외에 또 다른 진면목을 지니고 있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는 시짓기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관은 서거정, 이승소 같은 당대 문장가들이었다. '문신을 불러서 춘설(春雪)을 제목으로 금체고시(禁體古詩) 20운(韻)을 짓도록 명하고, 서거정·허종·이승소·이파(李坡)·어세겸·노공필로 하여금 등급을 정하게 하였는데, 홍문관 정자(正字) 황계옥이 수석을 차지했으므로 표피좌자(表皮坐子)를 하사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금체고시는 금체와 고시가 합쳐진 표현이다. 이중 금체(禁體)는 특정어의 사용을 금하는 시를 말한다. 가령 눈(雪)이 제목으로 들어간 시에는 옥(玉)·은(銀)·여(麗)·서(絮)·노(鷺)·학(鶴)같은 글자를 쓰지 못한다. 고시(古詩)는 말 그대로 옛 형태의 시로, 구수(句數)·자수(字數)에 제한이 없고 압운(押韻)에도
성안은 인구가 조밀하고 또 목재건물도 적지 않게 존재, 보기와 달리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1419년(성종 2) 함경북도 회령성 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영안도 관찰사 성준(成俊)이 치계 하기를, "3월 10일 회령부의 성 안에서 실수로 불이 나 연달아 3백여 집을 태우고 남녀 6명과 소 3두와 말 4필이 타서 죽고, 관중(官中)에 소장된 문서와 군기(軍器)도 타서 훼손된 것이 거의 10분의 8에 이르렀으니…' 당시 조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차관(敬差官)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때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리를 일컫는 말로, 세곡, 군사, 구황, 재민(災民)과 관련된 업무 등을 수행했다. 이때 경차관으로 선발된 인물이 황계옥(黃啓沃·?~1494)이다. 성종이 변방의 화재에 이같이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은 화재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여진족의 침입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황계옥이 성종을 알현하고 회령으로 출발했다. '아마도 야인(野人)이 틈을 타서 소란을 피울 듯합니다. 이 고을은 다른 여러 고을의 예가 아니고 야인이 왕래하면서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많으니, 관사(館舍)를 영조(營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실수로 불을 낸 인민
적지 않은 사람들이 1592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토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1년 앞서 왜승 겐소(玄蘇)를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협박을 해왔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조헌이 이를 알고 겐소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겐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양측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정명가도에 관련된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 '이보다 먼저 일본국 사신 현소(玄蘇) 등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여 성절사 김응남(金應南)이 갈 적에 왜적이 중국을 침범할 뜻을 갖고 있음을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의 정명가도에 대한 내용이 오키나와(琉球) 사람을 통해
전회에 영동 황간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황간이 현의 지위를 한때 상실한 적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황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금의 면이 됐다. 이 설명에는 빠진 부분이 있다. 황간현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년) 지금의 옥천 청산현에 병합돼 현 자체가 없어진 적이 있다. 이를 둘러싸고 두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의 황간현감은 박몽열(?~?朴夢說)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당시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 고현에서 진군하였는데, (…) 우리의 제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黃進)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백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실록은 전반부에는 병마절도사(병마)를, 뒷 부분에는 현감급 참전인물을 적고 있다. 다음 내용에는 황간현감 박몽
영남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동 황간이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간주돼 왔다. 황간은 지금은 면(面)이다. 그러나 황간은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줄곧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황간은 지금도 인구수가 적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궁벽한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인구가 적었고, 족제비털, 송이같은 토산물이 많이 나왔다. '궁벽'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나 실록에는 자주 등장한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는 뜻이다. '호수가 3백 8호요, 인구가 7백 42명이다. (…)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많이 차다.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지초(芝草)·수달피·삵괭이가죽이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이다.'- 인용문 중 토공은 해당지역 토산물로 궁궐에 진상하는 것을, 토산은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나 진상 대상은 아닌 품목을 말한다. 황간의 이같은 모습은 중종(16세기) 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지리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약수를 가장 많이 찾은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격무로 얻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약수가 나는 곳을 즐겨 찾았다.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사람의 움직이는 행동은 '거동'(擧動)이라고 한다. 반면 임금의 움직임은 쓰기는 '擧動'으로 쓰지만 읽기는 '거둥'이라고 읽는다. 인용문 중 거둥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등장했다. 익히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로 거둥을 하고 나서도 훈민정음 창제작업을 골몰하게 된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 상소문이다. 요약을 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언문 같은 것은 (…) 어찌 이것
지금의 문의는 일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의는 고려시대부터 '현'(懸)의 행정적 지위를 가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개편 때 청원군 소속이 되면서 '면'(面)이 됐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문산관(文山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이다. 문의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궁벽하게 인식됐던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이 부분은 대청호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첨지돈녕부사 안종렴이 숙직에 들어갈 당번날에 처부의 제삿날이라고 거짓 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추핵하니, 종렴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매 항복하므로, 문의현(文義縣)에 부처(付處)하였다.'- 유인숙(柳仁淑·1485∼1545)은 을사사화 때 윤임의 당여(같은 일파)라는 이유로 사사된 인물이다. 이때 희증, 희맹, 희안 등 그의 세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유배지도 문의였다. 그러나 풍수적 의미의 문의는 달랐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문의를 풍수상으로 매우 중하게 여겼다. 특히 문의의 진산인 양성산은 명당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같은 논리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천인이 돼야 했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1506)는 천인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이 때문에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성종의 친형)의 가노(家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 했던 것으로 사료는 적고 있다. 그녀는 '노비의 아내'였던 시절에 노래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의 가노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연산군과 장록수 사이에 연분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이었다. 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날 미복 차림을 하고 한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집을 찾았다. 게서 만난 것이 장녹수다.
얼마전 청주인물 박훈(朴薰·1484∼1540)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광조와 절친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6년 동안 성주, 의주, 안악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의 부친이 박증영(朴增榮·1464∼1493)이다. 그는 22살 나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오를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때 인재육성 차원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 때 처음 도입됐고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두 사가독서 출신이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됐다가 성종 때 다시 부활됐으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그 기능이 흡수됐다. 박증영은 29살 나이로 단명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그가 총명함과 더불어 기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