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부른다. 사용 빈도는 낮지만 신어(神御), 성용(聖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도 같은 표현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어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중 태조 어진은 보물 제 931호, 영조 어진은 932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철종 어진은 1/3 가량이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물 1492호로 지정돼 있다. 어진 중 유일하게 군복(軍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려한 색채와 세련된 선도 돋보이고 있다. 현재 태조 어진은 서울이 아닌 전주 경기전 단 1곳에만 보관돼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 어진은 전란 등을 우려해 전국 5곳에 분산·보관했다. 보관하던 전각도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달랐다. '의정부가 이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의 전직(殿直)은, 청하옵건대, 영흥 선원전(璿源殿) 의 전직의 예에 따라 감사의 천망(薦望)대로 임명해 보내되, 전주와 경주에는 토관(土官)이 없으니…'- '전직'은 전각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인용문 중에 집경전이 보인다. 이 전각은 처음에
폭군 연산군(燕山君·1476~1506)이 처음부터 폭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권 3년차까지는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정을 나름대로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생모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엄씨의 모함으로 내쫓진 끝에 사사(賜死)당한 것을 알고부터는 희대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광기 중 음탕한 짓에 해당하는 내용을 당시 사관이 사론(史論)으로 적었다. '왕이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녹수(綠水) 및 괴는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를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 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이같은 유형의 내용은 연산군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연산군일기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라고 했다고 적었다. 정력과 관련된 내용이다. 연산군의 성격은 음탕함을 넘어 폭력성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즐겨하던 실록 속의 형벌 내용으로는 포락, 착흉, 촌참, 쇄골표풍(碎骨瓢風) 등이 있다. 포락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죽이는 것을, 착흉은 가슴을 뽀개는 것을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왕자(단종)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 한명회 등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자들을 포섭, 원로대신을 무력으로 공격·살해했다. 바로 계유정란이다. 세조의 역사는 이들을 정난공신이라고 적었다. '정난'(靖難)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수양대군 지칭)·정인지·한확·박종우·김효성·이사철·이계전·박중손·최항·홍달손·권남·한명회를 1등으로 삼고… 인용문 중 박종우(朴從愚··∼1464)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후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도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민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직책으로 정1품의 품계를 지녔다. 박종우의 간접적인 유품인 완문, 계하사목,교첩 등이 우리고장 충주의 운봉박씨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완문은 충훈부에서 내린 것으로, 정난공신 박종우의 공적을 인정하고 박흥래가 그 자손임을 확인하
국어사전에서 감옥(監獄)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설명구를 만날 수 있다. '대한 제국 때 형벌의 집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융희 원년(1907)에 감옥서를 고친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감옥'이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이다. 갑오경장 무렵에 감옥이라는 표현이 들어오면서 토종어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감옥'이라는 표현이 수입되자 경무청 산하 전옥서(典獄署)를 감옥서(監獄署)로 바꿨다. 이후 '서' 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감옥'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감옥은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감옥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옥을 살핀다'는 뜻이 된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앞으로 '감옥'이라는 말 대신 '교도소'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가 과거 읍성터를 발굴조사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명문이 새겨진 성돌 외에 우물터, 성벽 기초석 등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더 많은 발굴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청주읍성은
이홍윤 역모사건의 파장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충청도와 충주목은 그 행정적 위치가 연좌법에 따라 한 단계씩 강등됐다. 1549년의 일이다. 이때 청홍도 관찰사로 부임한 인물이 이해(李瀣·1496∼1550)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현감으로 삼았다.'- 전회에 최하손 고변사건을 다루면서 당시 유신현감이었던 이치(李致·1504∼1550)라는 인물을 언급한 바 있다. 이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갔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같은 시기 이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이해도 거의 닮은꼴로 희생됐다. 이는 그가 당시 권력자였던 이기, 윤원형 등 소윤 일파와 권력의 대척점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인종 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를 우의정에 앉히는 것을 반대하고 되레 탄핵했다. 이해는 이 때문에 이기와 그의 심복인 이무강(李無彊·?~?)의 원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와 이홍남이 크게 다투는 사건이 벌어
'사신은 논한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비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홍남이 꾸며낸 일이었다. 그런데 이홍남이 자손을 둔 것이 어찌 천도(天道)이겠는가.'- 이홍윤 역모사건은 16세기 중반 우리지역 충주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외형상 이 사건은 곧 종결되는가 싶었으나 또 다른 사건의 발단이 됐다. 그것의 출발점은 역시 이홍윤 사건이었다. 명종은 이홍윤 사건 후 이른바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유신현 현감으로 부임한 인물이 이치(李致·1504∼1550)다. 그 직전 연좌제에 따라 행정적 강등과 이름이 바뀌는 조치가 단행됐다. '충청도(忠淸道)를 고쳐 청홍도(淸洪道)로 만들고, 충주(忠州)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李초두변+己 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李瀣)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李致)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이와 관련, 당시 사관이 실록 말미에 이례적으로 '사신은 논한다. 다시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옥사가 한번씩 이루어질 적마다 이기 등의 직급이 올라가니 아, 슬프도다'라는 내용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관이 영의정 이기만을 특정해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충주인 이약빙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사됐고, 그의 아들 이홍남(李洪男·1515 ~?)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이홍남은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나기 위해 '이홍윤(동생)이 배광의, 김의순 등과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 편지를 승정원에 접수했다. 전회에도 언급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다. 이홍남, 홍윤 형제는 재산다툼으로 사이가 극히 안 좋은 터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역모사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3일 뒤 풍성부원군 이기, 좌의정 황헌, 좌승지 정언각 등으로 국청(鞫廳)이 구성됐다. 국청은 조선시대에 역적 등 나라의 큰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치하는 임시관청을 일컫는다. 다음은 국청에서 작성한 심문 내용이다. "이홍윤을 형신할 때 무송수 이언성과 모산수 이정랑이 그 초사에서 나왔으니 잡아다 추문하게 하소서. 또 모의책(謀議冊)이 충주 본가에 있다고 하여 먼저 간 도사(都事)로 하여금 가지고 오도록 하였으나 틀림없이 가지고 올지는 기필하기 어려우므로 다시 이홍윤으로 하여금 대체적인 것을 적게 하여 입계합니다."- 인용문 중에 모산수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천) 등 4곳의 계수관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 당시 조정은 역모나 반윤리적(일명 강상죄)인 사건이 일어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해 도(道)의 이름을 아예 바꿨다. 가령 충청도 충주에서 어떤 역모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충' 자를 빼고 '공'이나 '홍' 자를 넣었다. 이 경우 충청도는 공청도나 홍청도가 된다. 명종 때 충주에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형 이홍남이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꾀했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충주지역 유림 40-50명이 처형 당하거나 유배됐고, 충주는 목에서 유신현으로 강등됐으며, 충청도는 청홍도가 됐다. 어떤 사가는 이 사건을 지금도 "충주지역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저해요인이 됐다"고 평하고 있다. 당시 청홍도관찰사의 한 명으로 심수경(沈守慶·1516∼1599)이라는 인물이 부임했다. 그는 '물'(水)과 악연을 가진 관찰사로 유명하다. 1562년 정릉(靖陵·중종임금의 묘)을 이장할 때의 일이다. 경기도관찰사었던 그는 선창이 있어야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널 수 있음에도 불구, 이를 설치하지 않아 파직됐다. 대여는 국상 때 사용하는 큰 상여로, 1줄을 8∼15명
전회에 우리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천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세조 원년(1455)과 성종 15년(1484)에 각각 을해자와 갑진자도 만들어지나 조선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세종대의 갑인자였다.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갑인자 개량 지칭)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직전 김빈·호군 장영실·첨지사역원사 이세형·사인 정척·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인용문 마지막에 이천과 갑인자를 함께 개량한 인물로 이순지(·∼1465)가 보인다. 주부(主簿)는 종친부, 내의원, 전옥서 등 종6품군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순지는 일반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료에는 천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등장한다. 구한말 간행된 백과사전류로 증보문헌비고(1908)가 있다. 이 사료를 보면 당시 사람들도 북극고도, 즉 위도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황상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습득한 것으로 보여진다. '북극고도: 한양의 북극고도는 37도 39분 15초이다. 북극은 하늘의 지도리로서 그 곳에 매여 있어서 옮기지 않는다. 지평으로부터의 고도에 높고 낮음이 생기는 것은
조선시대 과학사를 논할 때 좌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장영실(蔣英實·?~?)과 이천(1376∼1451)일 것이다. 일반인들은 두 사람 중 장영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 유명한 자격루(1434)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든 자격루는 일종의 자동 시보장치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을 상징했다. 장영실은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했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또 다른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기도 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천도 천문기구, 금속활자, 화약무기 등의 분야에서 장영실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사학자들은 이중 금속활자 개량을 이천의 최고 업적으로 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조선시대들어 외형상 반쪽만 계승된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이 워낙 힘들다 보니 사대부 집안과 사찰에서는 목판으로 문집과 경전 등을 간행했다. 목판본이 많이 현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조선 조정은 고려 금속활자를 계승, 성능 개량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선초기의 금속활자는 시간적으로 계미자(태종), 경자자(세종), 갑인자(〃) 순으로 개량됐다. 바로 이천이 경자자와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 계미자
전회에 칠서(七庶·일명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말 그대로 7명의 서자들이라는 뜻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기도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 사건은 조작 여부를 떠나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옥사로 이어졌다. 이른바 계축옥사다. 당시 역모를 도모했다고 진술한 인물은 박응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도 서자의 서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의 씨앗이 된 친부는 우리고장 충주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1523∼1589)이다.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과 한자가 같다. 그러나 함흥차사의 박순은 음성, 오늘 소개하는 박순은 충주 출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영의정 박순은 칠서사건으로 인해 결국 서자 박응서를 잃게 된다. 박응서는 진술의 댓가로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박순이 첩을 얻게 된 사연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말이 15년이지 일국의 재상 자리에 15년간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덕, 행정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장인과 사위 관계는 장모와 사위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시집보낸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장모를 그렇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는 이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사위도 친아들처럼 여겼다. 따라서 장인은 자신의 집 근처에 서옥(胥屋·사위의 집)을 마련해주고 노비와 토지까지 보태주기도 했다. 조선전기 선비들이 유난히 처가살이를 많이 한데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흔하지 않지만 사위가 장인에게서 글을 배운 사례도 있다. 장가가서 글을 배웠다는 것은 학문의 시작이 크게 늦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위에게 글을 가르쳐준 장인은 그 마음씨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조선전기 경북 김천에 김시창(金始昌·1472∼1558)이라는 인물이 생존했다. 그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효행이 지극했는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두번 등장한다.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다음과 같이 천거하였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금산(金山, 김천 지칭)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젊어서부터 독실한 뜻으로 힘써 행하며 행동에는 옛사람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번 과거에 떨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