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을 포함한 충청도에도 아리랑이 존재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계에서 '충청도 아리랑'이라고 개념화시켜 놓은 것은 없다. 그렇게 볼 정도의 음악적인 틀과 정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국 만주 정암촌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이 '청주아리랑' 또는 '충청도아리랑'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는 강력한 견해가 있다. '청주아리랑'은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이 처음 발견, 지난 200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한다고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하는 것 대단하고 /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찮나.(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시아버지 죽서어 좋댓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 시어머니 죽어서 좋댓더니 / 보리방아 물저놓니 또 생각나네.' 후렴은 앞과 같다. 정암촌의 노랫자락이 '청주 아리랑'으로 인정받으려면 우리고장 청주 주변에 비슷한 노랫가락이 조금이라고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음악적인 혈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암촌 아리랑의 핵심적인 노랫말은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다. '날 가라레'는 '나를 집밖으로 나가라'라는 뜻이다. 이 노랫말이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선정 이유를 "아리랑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됐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15종목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아리랑 하면 가장 궁금한 것이 어원이다. 현재 무려 40개의 어원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없다. 대신 '무어원설'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이 설은 '노랫말 아리랑은 의미 없는 사설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아리랑이 생겨난 시점도 궁금하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고대, 고려, 조선초기, 근대 발생설 등 대략 4가지 설로 구분되고 있다. 고대 발생설은 이병도 박사가 주장했다. 그는 아리랑의 '아리'는 낙랑을 뜻하고, '랑'은 한자 '고개 령'(嶺) 자의 변형으로, 바로 평양(낙랑) 아래에 있는 '자비령'을 의미한다고 봤다. 고려시대 발생설은 고려속요에 선이 닿아 있다. 고려속요의 하나인 '청산별곡'에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쳥산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아비가 묘터를 스승이 비문을, 제천 정보연 정철은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2대 문호로 일컬어지고 있다. 정철의 가계는 아들 정종명(鄭宗溟), 손자 정양(鄭瀁), 증손 정보연(鄭普演·1637∼1660) 순으로 이어진다. 정종명과 정양은 문벌의 자손답게 문관의 벼슬을 했다. 증손 정보연도 처음에는 그 길을 걸었다. 특히 부친 정양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했다. 정양은 1600년생, 송시열은 1607년생이다. 따라서 송시열은 생전에 정양을 '형'이라고 호칭했다. "송시열은 정형 안숙(어릴 적 이름)의 영구가 서울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충주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병들어 깊은 산골에 엎드려 있는 처지이므로, 몸소 조제(노제를 지칭)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삼가 아들 기태(基泰)를 보내어 대신 영연(靈筵)에 곡하게 하면서 고합니다."- 송자대전 행간에는 정보연이 지조가 있었으며, 청아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대범하여 세속의 일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송시열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우암은 일찍이 그의 단아한 인품을 칭송하여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감옥이 열악한 환경을 지녔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죄인들에 대한 복지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요사이 장맛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 필시 옥사가 지체되어 갇혀 있는 죄수가 있기 때문에 화기를 손상시켰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의 죄수로 강도 이외에 장형 80대 이하는 모두 석방하고, 장형 80대 이상으로 연로한 자는 보방(保放)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용한 문장 중에 '보방'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보방은 '보석'(保釋) 제도의 일종으로, 보증인은 세워야 한다는 점은 오늘날과 같았다. 그리고 당시는 영구 보방 외에 한시적인 보방도 존재했다. "의금부·형조·사헌부에 전지 하기를, 지금 추위를 당하여 여러 날 구속되어 있으면 바람과 추위의 엄습을 당해서 혹시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를까 염려되므로 (...) 겨울 기간을 한하여 보방해서 추국하도록 하여 나의 흠휼하는 뜻에 부응하라."- 옥이 너무 비좁아 보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는 '"본부에 갇힌 사람이 모두 1백 70여 인이고 전옥서에 옮겨 가둔 자도 40여 인이라, 갇힌 사람은 많고 옥은 좁아서 갇힌 사람들이 앉아 눕지 못합니다. (…) 전교하기를, "처녀의 가장 및 양부에게 시집가서
조선시대 청주옥(獄)은 철당간과 흥업백화점 사이에 둥근 담장 모습으로 위치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조선전기 청주옥에 갇혔던 유명 인물로는 이색과 권근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돼 청주옥에 갇혔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파평군 윤이(尹彛)·중랑장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밀고했다. 이는 명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한 음모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색·우현보·권근 등 많은 대신들이 연루 혐의를 받고 청주옥에 갇혔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에 우현보·권중화·경보·장하·홍인계·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이색·이임·우인열·이인민·정지·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해 여름에 이색 이하 여러 폄소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의 옥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라고 돼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중앙공원 압각수 설화다. 익
정철의 묘는 그의 손자인 정양(鄭瀁·1600∼1668)과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에 의해 1665년 경기도 고양에서 우리고장 진천 문백으로 이장됐다. 손자 정양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현재 문백에는 정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정종명의 묘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바로 정종명의 아들이 정양이다. 정양은 진천현감을 역임하기도 했고, 또 병자호란 피난일기인 '강도피화기사'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도피화기사'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청나라 군대를 만나 온갖 고생을 한 경험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정양 자신도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이때 한쪽 눈을 잃은 것으로 돼 있다. 피난도중 아내가 배위에서 출산을 하면서 가족들이 이중의 고초를 겪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양의 묘는 진천이 아닌 우리고장 제천 금성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송시열이 쓴 정양의 묘표(비석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부인 이씨는 덕화를 받아 공을 섬기는데 매우 예법이 있었는데 불행히 먼저 죽었다. 두 번째로 그의 묘를 옮겨 제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는 면리제(面里制)가 근간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현재 里 밑에 자연부락 지명이 존재하나 이는 법적 행정지명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골지역은 '~리 OOO번지' 식의 주소를 갖는다. 일제는 1914년 우리나라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농촌지역의 경우 부(府)와 현(縣)을 폐합, 군(郡)으로 일원화했다.이때 도내에서는 영춘, 청풍, 연풍, 청안, 문의, 청산, 황간현 등이 면(面)으로 격하됐다. 이중 청풍현은 바로 청풍면이 되지 않고 1914~1917에는 비봉면(飛鳳面)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행정명으로서의 면은 태조 때부터 등장한다. '목조는 두타산성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에 이르러 살았는데…'- 조선전기 우리고장 보은에서도 면(面) 이름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산현의 월경지(越境地)인 주성부곡을 서술하면서 '북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월경(越境)은 청산(靑山) 임내의 주성부곡(酒城部曲)이 현 북면(北面)에 터무니 없이 들어와 있다.'-
정철에게는 정여립을 단죄한 기축옥사의 업보가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임진왜란 와중에 명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선조의 신임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기축옥사의 한을 곱씹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의 모함을 받아 지금의 강화도 송강촌이라는 곳으로 방축됐다. 실각한 그가 왜 강화도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선조의 부름이 다시 있을 것으로 보고 한양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는 추정이 있다. 반면 그의 문인(門人·제자)인 권필(1569∼1612)이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권필은 젊었을 때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이때 역시 그곳에 건저의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정철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은 바 있다. 권필은 이후 강화도에 정착, 그곳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혹자는 정철이 이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쫓기듯 들어간 강화도에서, 정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난과 병고였다. 그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는 약
우리고장 진천 문백에 영면하고 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중기 당쟁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인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진력을 다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 기간 동안 충청과 호남의 양호체찰사가 되어 우리고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체찰사는 왕명에 의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는 임시 고위관료를 말한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 사건에 대한 선조의 노여움으로 압록강 아래인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시로 남겼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고 /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 / 마음을 아는 넌 오직 백발이라 / 나를 따라 또 한 해를 지나는구나.'- 인용문 중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는 유배된 곳의 집담장 둘레는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배의 한 종류인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빽빽히 들어산 탱자나무가 담장을 이룬 것을 말한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가시가 나 있고, 또 그물처럼 촘촘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달여만에 유배지 강계에서 사
전회에 송강 정철의 아들 종명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장문이고 또 정종명 혼자가 아닌, 동생 홍명(弘溟)과 같이 올린 상소문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호·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이라는 것도 있다. 더욱이 상소하는 대상이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다. '신의 아비가 명종·선조 두 조정을 섬기게 되어서는 용호가 풍운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이 한때 견줄 데 없었으나 다만 강직한 충성 때문에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철은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놓고 무진 무진 먹세그려'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불같은 성격을 함께 지녔다. 두 아들은 '남과 화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은 아버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것이 아닌, 선조의 강권 때문에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위관(委官)은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 중에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 11월에 공을 우의정에
그날 서인 영수 정철과 동인 연수 이산해는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이산해는 그날 병을 핑계로 어전에 나가지 않았다. 정철은 이같은 음모도 모르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건의했다가 혼자 선조의 미움을 사 강계로 유배됐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논하는 것) 사건으로, 이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다. 기축옥사의 최고 국문관이었던 정철은 실각하자마자 기축옥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동인계열 사람 수백명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동인중 정철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북인, 온건론을 편 쪽은 남인으로 갈렸다. 정철의 아들중에 정종명(鄭宗溟·1565∼1626)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과 실력을 갖췄으나 군수직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아버지 정철 때문이었다. 이조가 정종명을 안성군수로 추전했으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이를 거부했다. "정종명은 간신의 아들로 여러 해 동안 폐기한 데에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수령에 의망된 적이 있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괴이하여 추구하고
조선시대 죄인은 옥(獄)에 갖혔어도 형량에 따라 형구를 차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흔한 것이 '가'(枷)라고 불리는 나무칼이었다. 이 나무칼은 죄의 경중에 따라 무게게 달랐다. 장형을 받은 죄인은 15근, 사형이 결정된 중죄인은 25근의 나무칼을 차야 했다. 1근이 6백그램인 것을 감안하면 25근은 15kg의 무게다.사극을 보면 어떤 죄인은 발에도 무엇인가를 차고 있다. 착고(着錮·또는 차꼬)라는 형구다. 이 착고는 두 개의 토막나무에 가로구멍을 파고 그 안에 죄인의 양쪽 발목을 넣고 자물쇠로 채운 모습이다. 을사사화 때 우리고장 충주인물 이홍윤이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는 중에도 이 착고를 찼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충주출신 사림파 사대부인 이약빙에게는 이홍남, 홍윤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복간인 둘은 재산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때 형 홍남이 귀양지 영월에서 빨리 풀려날 목적으로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다. 그 결과, 한달 사이에 충주백성 28명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관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