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목적으로 1444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조선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그로부터 20년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세조가 초정약수를 찾은 것 역시 치료 목적이었으나 병명은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가려운 증상의 피부병을 '아양'이라고 불렀다. 세조는 이 '아양' 치료를 위해 충청도 순행에 나섰다. 세조는 권력 찬탈 과정에서 조카 단종과 동복동생 안평·수양대군을 죽인 까닭에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가지가 저절로 올라갔다'는 정이품송 전설도 정통성 시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각종 야사도 세조가 얻은 피부병을 그의 정통성 시비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자신을 꾸짖었다. "네가 내 자식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라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이후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이 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비명했고, 세조는 피부병을 얻었다.' 피부병 치료를 위한 세조의 충청도 순행은 1464년 1월 하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정은 이와 관련한 '특별 경계령'을 충청병영에 내렸다. '충청도
옥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규흥(金奎興·1872~1936)은 중국 망명생활 중에도 고향땅을 팔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규흥(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3일의 KBS 스페셜에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으로 방영되는 등 근래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독립 운동가의 한 명이다. 특히 배경한(신라대) 교수 등 학계에 의해 "공화제를 주창한 중국 신해혁명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담했고, 이것이 중국 혁명파의 조선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약한 편으로, 그가 지론으로 주장한 '둔전제적 독립운동'이 어떤 실천과정을 통해 전개됐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왔다. 충북대 사학과 김호진 씨의 석사논문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송건호(宋建鎬·1927~2001)는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아버지 송재찬과 어머니 박재호의 3남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은진송씨로 조상은 대대로 충남 대덕군 동면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송건호의 증조부는 그런 가족을 이끌고 산너머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했다. 옥천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는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왜놈들이 보기 싫다며 스스로의 호를 '하곡'이라 짓고는 첩첩산골로 찾아들었다. 언론인 송건호를 평생 지배한 반골정신은 어찌보면 이런 가통(家統) 때문에 유전적으로 획득됐다. 송건호는 옥천 증약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한성사립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과에 입학했다. 그가 처음부터 신문기자를 꿈꿨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학재학 때부터 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사의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는 유신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런 태도는 당시 정권에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1975년 의 기사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정권은 신문 광고주 압박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 를 압박했다. 그 결과, 신문 광고란이 백지 상태로
는 1934년 2월 17일자 기사에서 시골 마을 한 천재소년의 출현을 사진과 함께 요란스럽게 보도했다. '충북 제천군 청풍보통학교에 3학년에 재학중인 천관우 군은 제천군 청풍면 읍리 천영석씨 셋째 아들인데 다섯 살 때부터 읽기와 쓰기가 능하여서 일반은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명석했던 소년 천관우는 청주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사학과 학부 졸업 논문으로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 ~ 1673)의 사상을 썼다. 당시는 조선시대 실학에 대한 개념도 성립돼 있지 않았던 시기로, 그가 당시에 쓴 이 논문은 실학연구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했다. 그는 학계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6.15 전쟁이라는 시대의 불우를 만나면서 1951년 에 입사, 언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문재가 또 한번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952년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수할 때였다. 그는 이때 기행기 '그랜드캐년'을 썼고, 이 글은 명문을 인정받아 제 2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1968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K형, 나는 이것을 보려 여기에 온 것입니다. 별안간 일진의 바람이 거세게 불
조선시대 호조(戶曹)는 조세, 부역, 인구 등을 담당했던 관서로, 그 수장은 지금의 경제장관에 해당하는 호조판서(정2품)다. 각종 문헌은 조선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로 충청도관찰사도 역임한 윤현(尹鉉·1514-1578)을 자주 기록했다. '윤현이 비용을 아끼고 보관해 두는 것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각사에 오래 묵어 썩고 깨진 물건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뒤에는 모두 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사옹원에서 깨진 사기 그릇을 거두어다가 저장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이 인용문의 악센트는 뒤에 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지만, 그 비아냥은 곧 탄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에 궁성을 수리하게 되자 단청 물감을 담을 그릇이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깨진 사기 그릇을 내어다 나누어 주니 사용하기에 넉넉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나라 도간(陶侃)이 나무 톱밥을 사용하게 했던 것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의 무장인 도간은 배를 만들다 남은 나무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곧 요긴하게 사용됐다. 나무 톱밥은 눈이와 진창이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의 대표적 한시 작품인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전회에 여러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어학자 이종문 계명대 교수는 '몽혼'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한국한문학연구 제 47집에서 제기했다. 논문의 제목은 '이옥봉의 작품으로 알려진 한시의 작자에 대한 재검토'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은 윤현(尹鉉·1514-1578)의 '국간집(菊磵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한시의 제목이 우리 고장 지명의 '題贈淸州人'이다. '人間離合固無齊 / 忍淚當時愴解携 / 若使夢魂行有跡 / 西原城北摠成蹊.'-
현존하는 청주지역의 오래 된 사찰 중 풍수적 가람배치 원리에 비교적 충실한 곳은 우암산 자락의 보현사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불교는 가람의 배치에도 당연히 풍수적 고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 이를 부처의 얼굴이나 신체와 비교하는 등 땅도 불격화(佛格化)해왔다. 따라서 이마는 법당, 코는 불당, 입은 산문, 왼쪽 눈은 창고, 오른쪽 눈은 승당, 왼쪽 귀는 욕실, 오른쪽 귀는 화장실이 위치해야 한다는게 일반적인 논리였다. 얼굴이 아닌 신체에 비유할 경우 머리는 법당, 심장은 불당, 음부는 산문, 왼손은 창고, 오른손은 승당, 왼발은 욕실, 오른발은 화장실에 해당한다고 일컬어져 왔다. 법당은 불상을 모시고 설법을 하는 등 절의 으뜸 되는 집채, 불당은 단순히 부처만은 모신 집을 말한다. 반면 승당은 스님들이 좌선하며 기거하는 곳으로,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원광대 김혁배씨가 청주지역(청원포함) 보살사, 용화사, 보현사, 연화사, 백족사, 안심사, 동화사, 원리사, 현암사 등 14개 사찰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이같은 전통 가람배치 원리가 충실히 지켜진 곳은 우암산 자락의 보현사(주지 원봉스님·우암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현사의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이옥봉 시인의 삼척과의 인연과 작품세계를 조명하자는 문화계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옥봉(李玉峰)은 당시 충북 옥천군수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나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詩)를 짓는 것으로 고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첩으로 살면서 삼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2011년 8월 30일자 기사 내용이다.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이옥봉은 의 기사 내용대로 첩 신분으로 남편 조원을 따라, 1583~1586년 3여년 동안 삼척에 기거했다. 이옥봉은 이 기간동안 삼척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죽서루'와 '춘사'(春思)라는 한시를 남겼다. 시 '죽서루'는 매우 짧은 시이기는 하나, 하늘과 땅을 한 지점에서 조망하는 등 입체적인 풍광을 그리고 있다. '강물에 몸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江涵鷗夢闊) /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天入·愁長).' '강물'과 '하늘', '갈매기'와 '기러기' '꿈'과 '시름', '드넓고'와 '길기만' 등의 시어에서 보듯 이 시는 뚜렷한 대구(對句)를 하고 있다. '죽서루'는 서애집, 청창연담, 일사유사 등에 이옥봉의 작품으로 수
실학자 이덕무는 이옥봉의 한시를 "부녀자로서 대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녀 또한 자부심이 대단, 정실부인 아들에게 준다는 뜻인 '증적자'(贈嫡子)라는 시를 남겼다.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妙譽皆童稚) /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東方母子名) /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驚風君筆落) /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泣鬼我詩成).' 인용문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는 정실 아들의 글짓기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뒷문장은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로 돼 있다. 옥봉 자신도 그에 못지 않게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음 구절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옥봉은 정실 아들의 글솜씨에 대해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란다'라고 칭찬한다. 반면 자신의 글솜씨는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라고 더 자찬(自讚)했다. '읍귀'(泣鬼)는 '읍귀신' 즉 '귀신도 울린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이태백의 시를 보고 극찬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도
삼국 쟁패기의 주요 격전장의 하나였던 '독산성'(獨山城)은 충주 장미산성(337m·사적 제 400호)이 거의 확실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것이 정설화된다면 장미산성은 실체가 문헌으로 고증되는 역사적 사실을 또 하나 추가하게 된다. 김현길 한국교통대 명예교수는 얼마전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발간한 '충북학' 제 15집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논문 제목은 '백제 독산성 고(考)'로, △고구려의 남진과 나제동맹 △독산성의 위치 △백제의 독산성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등의 목차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대인 서기 427년 수도를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진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신라와 백제는 433년 이른바 1차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섰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 의지는 매우 강력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이 무너졌고 개로왕이 참수됐다. 그러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은 백제의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응전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와 신라가 주로 수비를 하는 국면으로, 이런 양상은 신라가 죽령을 넘는 551년까지 계속 된다. 를 보면 고구려→백제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