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연일 주의보·경보 등이 발령되는 등 폭염이 계속 되고 있다. 섭씨 31~35도를 기록하는 최근의 폭염은 분명히 30년 평균보다 3~4도 정도 높은 면이 있다. 도내 주요 지역의 평균 최고기온은 청주 31.8도, 충주 31.4도, 제천 30.5도, 보은 30.7도, 추풍령 30.3도 등이다.(표 참조) 이는 30년 동안의 최고 기온값을 평균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상청 기후자료를 분석하면 최근의 폭염은 무더운 것은 사실이나 기상이변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의 폭염을 계기로 △역대 한낮 최고기온 △가장 무더웠던 해 △7월과 8월 폭염 비교 등 충북의 기후관측 역사를 살펴본다. 지금까지 도내 최고기온 최고는 39.8도로, 1939년 7월 21일 추풍령에서 작성됐다.(표 참조) 최고기온 최고는 특정지역에서 일별로 작성된 최고 기록으로, 월별 단위로 산출한다. 이 기록은 1940년 8월 1일 대구에서 작성된 40.0도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기록이 작성된 시점도 8월이 아닌 7월이라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기상대 관측이래 도내에서 가장 무더웠던 한 해는 1994년 7월 하순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추풍령을 제외한 청주·충
[충북일보] 무신란(영조 4년·1728)은 일단락 됐으나 여진은 계속 됐다. 영조 31년(1755) 전라도 나주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월 20일 나주객사 망화루(望華樓)의 동쪽 두번째 기둥에 흉서가 내걸렸다. 괘서에는 "백성들은 곤궁한데 더욱 침학을 당하고 있으니 구제하고자 한다. 군사를 움직일 것이니 백성들은 놀라지 말라"는 내용이 익명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전라감영은 윤지(尹志·1688∼1755)라는 인물을 괘서의 범인으로 자연스레 지목했다. 마을 사람들이 윤지의 짓이라고 수군거렸고, 가노(家奴)들 또한 자기 상전의 짓이라고 진술했다. 윤지는 소론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제주에서 10년, 나주에서 20년 등 당시 3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하던 인물이었다. 소론의 영수였던 그의 부친 윤취상(就商·?-1725)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김일경 당여(무리)로 지목돼 국문을 받고 처형됐다, 그는 유배생활이 길어지자 점술사 정수헌(丁壽憲)이라는 인물을 가까이 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나는 시기를 예상해 보는 점을 자주 쳤다. 《추안급국안》이라는 당시 수사 기록에 의하면, 술사 정수헌은 윤지가 '田'자를 고르자 "'口' 자가 '十'자를 머금고 있으니 10년 동안 헛
[충북일보] 한국 근현대사학회(회장 충북대 박걸순 교수·사진)와 중국 상하이(上海)의 푸단대가 5일 푸단대 강당에서 '한국과 중국의 공동 항일투쟁과 승전'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특히 이번 학술회의는 올 광복 70주년을 맞아 1920년대 상하이에서 일제를 상대로 벌인 공동 투쟁을 재조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학술회의에는 한·중·일 학자 20여 명이 참석하여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먼저 김희곤(사학) 안동대 교수는 '한국독립운동과 상하이의 역사적 의미' 주제의 기조발제에서 3.1운동의 진원지로서 상하이가 갖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이어 배경한 신라대 사학과 교수, 장슈위 연변대 역사학과 교수, 이재호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쑨커즈 푸단대 교수, 쑨옌훙 건국대 국사학과 교수 등이 차레로 발표에 나선다. 토론에는 마쓰다 아야 북경대 교수, 진춘산 연변대 교수, 이계형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등 한중일 학자들이 관련 내용을 토론할 예정이다. 발표 후에는 박 회장이 좌장을 맡고 14명의 한·중·일 학자가 참여하는 종합토론을 하게 된다. 박걸순 회장은
[충북일보] 오늘부터 '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총 10회로, 그 첫번째 주제는 '비숍의 남한강 소강(溯江)' 이다. 영국 잉글랜드 출신의 여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은 구한말 한반도를 여행한 후, 당시의 기억을 바탕으로 1897년 영국에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을 출간했다. 출간 당시 영국 출판계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이 책에는 19세기 조선의 풍물, 종교, 기생, 민요, 서민 생활 등에 대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특히 남한강 소강(거슬러 올라가기)과 하강(下江) 부분에는 우리고장 충주~단양 수계의 강촌(江村) 생활상이 정감있으면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비숍은 1894년 4월 14일 한강 마포나루(추정) 쯤에서 승선했다. 그 배에서는 통역자 밀러(F.S. Miller)와 선주인 '늙인 김씨', 그리고 김씨가 고용한 조선인 외에 나머지 2명 등이 동행했다. 비숍은 배 1척과 3명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선주 김씨에게 한 달에 임대료 30달러를 계약했다. 그러나 김씨는 1명만 고용하기로 하고 얼버무
[충북일보] 유석현(劉錫鉉, 1900~1987)은 충주 출신으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도모했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충주의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단원으로서 의열투쟁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요원확충을 위하여 1922년 국내에 잠입, 판사 백윤화(白允和)로부터 군자금 모금을 시도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유석현은 1923년 의열단의 제2차 폭파·암살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결국 일제에 의해 8년형을 선고받았다. 류자명과의 만남과 의열단 가입 유석현은 1900년 5월 14일(음력)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33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간이농업학교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류자명(柳子明)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석현은 류자명에게 수학하며 그의 독립사상에 깊이 공감하였다. 유석현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든 것은 3·1운동이었다. 류자명의 회고에 따르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당시, 그는 간이농업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3월 10일을 기해 충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분무원종공신이 선전된지 1년 후 영조 임금에게는 《서정록》이라는 책자가 올려졌다. 이 책자는 분무원종공신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추가로 공신에 포함시키는 명담을 담고 있다. 공신 제외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우의정 이태좌(李台佐)는 관료로서 불만을 쏟아냈다. "조정에서 공을 논하여 상(賞)을 행한 것이 이미 충분한데도 군교(軍校)들이 모두들 별단자(別單子)에 들지 못한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있으니, 상을 바라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영조는 이에 대해 "전례에 따라 만들어 군정(軍情)을 위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서정록》을 작성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무신란의 본산지인 청주지역 등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또 다시 크게 증가했다. 그 유형은 ①현재의 관품에서 승진하는 경우(가자·加資), ②노비 등 천민의 위치에서 면천되는 경우, ③국가부역을 일정기간 면제받는 경우, ④중인에서 양반이 되는 경우 등으로 분류됐다. ①과 관련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청주(淸州)의 토포 군관 고윤창(高允昌)에게는 가자하며, 군뢰 이왕산(李往山)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인용문 가운데 '토포'는
공신은 국가에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리는 칭호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구분된다, 정공신은 대개 3등으로 나뉘고, 그 수는 적으면 5~6인 많으면 100여명까지 이르렀다. 정공신은 등급에 따라 공신에게 내려지는 특전·토지·노비 등의 지급 정도가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원종공신은 그 공이 정공신에 미치지 못하나 다소의 공이 있는 자들을 역시 3등급으로 나눠 녹훈하였고 그 수는 적으면 9백여명, 많으면 최대 9천여명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이성계) 집권기에 발생한 개국원종공신의 경우 그 수가 무려 1천2백여명에 이르렀고 1등급에게는 토지 30결과 노비 3口가 주어졌다. 전통시대에는 노비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名이 아닌 口로 호칭했다. 이밖에 개국원종공신 2등급에게는 토지 15결, 3등급에게는 물질적인 혜택은 없고 특전만 내려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원종공신에 대한 토지와 노비의 지급은 없어지고 특전만 3등급으로 나누어 내려졌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분무공신(奮武功臣)의 공신호가 주어졌다. 분무공신 1등에 오명항(吳命恒·1673~1728), 2등에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
[충북일보]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李起鵬·사진)이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태어났음이 국내 역사학계의 공식 논문으로도 처음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이기붕 가 선대 가계의 몰락은 본보가 보도했던 대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구부(舅婦)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거듭 밝혀졌다. 구부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일컫는 표현이다. 충남대학교 사학과 손연하(孫煙霞·박사과정) 씨가 얼마전 한국근현대사학회(회장 박걸순 충북대교수)가 발행하는 『한국근현대사연구』 72집에 「리기붕의 성장과정과 정치기반 형성(1896~1953)」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이기붕은 1896년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부친 이낙의와 모친 송정현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후 18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종로구 사직동에서 성장하였다"(287쪽)고 밝혔다. 그는 또 "이기붕은 효령대군 16대손으로 그의 가계는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오른 명문가였다. 이기붕의 증조부 이회정은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상사를 발표하였던 일로 1883년 처형되었다"고 서술했다. 앞서 본보는 올 4월 4·19 특집기사(4월 17일자)를 다루면서
[충북일보] 한봉수(韓鳳洙, 1884~1972)는 청주 출신으로 1907년 후기의병에 참전하여 뛰어난 전공을 쌓았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의병전쟁으로부터 3·1운동으로 전승되는 독립운동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가교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의병장으로서 그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소개될 만큼 당시에도 유명하였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사격과 사냥에 자질이 뛰어난 아이 한봉수는 1884년 4월 18일, 충북 청원군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 세교리 197번지에서 가난한 농부 한진영(韓進榮)과 경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후에 청암(淸巖)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선조 중에는 문신 출신도 있었으나, 무신으로 무공을 쌓은 인물이 더욱 많다. 이는 그가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가문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였고, 그의 대에 이르러는 홀어머니가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상민
"전전하여서 문의의 茂陵亭에 갔었는데, 또한 李愼의 집 앞뒷산에 피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았 습니다. 內外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던 일이 과연 있었습니다. 兵營에서 저를 체포한 것은 제가 이 말을 전한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너무나 원통한 일입니다. 저는 박취림에게서 들었습니 다만, 言根은 12인을 거쳤습니다."-인용문은 문의 괘서사건 혐의자의 한 명인 우규장이 신문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그는 향리 출신의 사족으로 '松谷의 5, 6 촌락이 소요스러웠다'고 밝혔다. 그의 공초에서 보듯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됐으로 최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략 두 가지가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첫째, 저항을 준비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조직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괘서 후에 구체적으로 저항을 이끌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둘째, 자금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거사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지서는 20년 전에 청주에서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또 이를 부분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무신란'이라는 명칭을 두 번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지서가 말하기를, '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