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문물을 보고 개방과 개혁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동생 봉림대군에게 청나라는 오랑캐 국가로 단지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소현세자의 급서와 부왕 인조의 승하로 보위에 오른 봉림대군(후에 효종)은 포병 10만명 양성을 계획하는 등 북벌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색(色)도 멀리할 정도였다. 나아가 같은 북벌론자인 우암 송시열을 이조와 병조판서에 동시 임명, 북벌을 진두지휘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은 이른바 관념론적인 북벌로 효종의 군사적인 북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이는 효종 서거 후 예송논쟁이 두 차례나 일어난 것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우암은 속으로 전전긍긍하였다. 당시 정치 지형은 효종과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山黨)이 군사적인 북벌을 매개로 암묵적인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벌의 반대는 곧 두 권력 관계의 파탄을 의미했다. 당시 송시열·송준길 등은 산당, 한양을 거주지로 했던 김육(金堉) 등은 한당(漢黨)으로 불렸다. 전자는 대동법 시행을 반
[충북일보] 높은 당도에 훨씬 커진 과실 크기. 반면 한층 얇아진 껍질. 금년은 보은 대추가 과거 명성을 명실상부하게 되찾은 한 해였다. 보은 생대추가 2015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에서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보은 생대추는 올 과일산업대전에서 산림과수 대추분야에 내걸렸던 최우수·우수·장려·특별상 등 4개 부문을 싹쓸이했다. 그 중심에 '복조'라고 불리는 보은 생대추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복조는 명성과 달리 씨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품종 등록도 되어 있지 않는 등 미스터리 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복조'는 왜 씨없는 대추가 됐을까 왕 생대추의 대명사가 된 보은 복조는 그 원산지가 경북지역이고,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곳과 사람은 보은지역이고 보은 사람이다. 지난 80년대 보은 삼승면 지역의 대추농가는 경북 지역을 방문해 높은 당도, △씨알이 굵은 과실, △얇은 껍질을 생산하는 대추나무를 가져다가 보은 지역에 식재하였다. 보은지역은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처녀 눈물짓는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의 대추 명성지역이었으나 지난 1950년대 빗자루병이 창궐하면서 그 명성을 잃었었다. 보은지역 대추
이명상(李明相, ?~1909)은 단양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호좌의진 이강년부대의 청풍 단양 장의장으로 활약한 후기 의병장이다. 이강년이 순국한 뒤에는 김상태와 함께 김상한 부대의 소모장으로 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충북 굴지의 한학자 의병장 이명상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가족관계나 어린 시절 등은 자료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908년 7월 일제 경시총감관방주리(警視總監官房主理)인 경시 청목계삼(靑木戒三)이 그를 추적 조사한 비밀조사 보고서(警秘 제2944호의 1, 1908. 7. 16)가 남아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그의 인상에 대하여 나이는 54∼5세로 머리는 검으나 수염은 희끗희끗하고, 얼굴은 평평하고 둥글며 마마자국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와 친교가 있는 사람이 서울에 고관으로 있으며, 7촌에 해당하는 인척이 헌병 정위(正尉)인데 역시 서울에 살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특히 그를 '충청북도에서 손꼽히는 한학자'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학문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그는 일찍
[충북일보]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을 둘러싸고 최근들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사용된 재료에 따라 시멘트 미륵대불, 청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 순으로 불리워져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은 1939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제작했다. 그리고 월탄스님이 주지로 있던 1987~1990년 사이에는 청동미륵대불, 석지명 스님이 주지로 있던 2000년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이후 청동색 녹이 배어나오면서 금년 4월까지 3번째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금동미륵대불은 말 그대로 금동+미륵+대불의 조합어이다. 일련의 진행을 보면 법주사는 불가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것들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 금동은 곧 황금색을 의미하고, 따라서 석불, 철불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불상은 황금색을 나타내고 있다. 황금색에는 부처의 이른바 32길상(吉相)이 관여한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의 표현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
[충북일보] 이중봉(李重鳳, 18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했던 후기 의병이다. 그는 일제의 가속되는 침략과, 특히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소식에 분개하여 의병으로 봉기하였고, 이강년 부대에서 우군장과 소모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제천을 중심으로 한 호좌의진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이강년이 가장 신뢰한 부하 의병이었다.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통탄하다 이중봉은 충청북도 청풍군 도화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중봉(李中鳳)을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이나 가족,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거의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에서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조차 그의 생몰년이 모두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1908년 일제의 통감부 문서를 통하여 그가 1871년 출생이라는 사실과, 『폭도사편집자료(충청북도편)』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청풍군 출생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이권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에는 25개 교구가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제 5교구 본사로, 도내에만 60여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종갓집격인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했다. 법주사의 법주는 '법이 머무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이는 창건 설화와 관련이 깊다. 창건주 신라의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고, 따라서 '법주사'라는 사찰명을 지니게 된 것으로 구전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설화로, 사찰명 '법주사'가 역사 기록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이다. 법주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철기(鐵器)에는 '統和二十四年歲次 / 丙午正月▨▨成幢 / 棟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통화(統和) 24년째 되던 해인 병오년 정월 일에 당(幢)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동량(棟樑)은 법▨(法▨)이다. ▨▨▨▨.' 정도가 된다. 명문 '法▨' 가운데 뒷글자가 마모돼 있어 '住' 자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나 전문가들은 '住'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통화 24년째의 병오년은 고려 목종
[충북일보] 교토의 북서쪽의 교외에 위치하는 이와쿠라에서 1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9월 말이 되니 어느새 아침·저녁으로는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가 되었다. 2009년 9월 27일, 그 동안 미루고 있었던 우지(宇治) 답사를 위해 이와쿠라를 나섰다. 이와쿠라는 일본의 동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작은 맨션 몇 개를 제외하고 주변 대부분이 단독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깔끔한 단독주택의 주차장에 벽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주차한 차가 눈에 띈다. 주차에도 그들의 깔끔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엿보인다. 이와쿠라에서 우지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이와쿠라에서 버스를 타고 국제회관역으로 가서 교토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교토역에 도착하면 된다. JR교토역에서 JR이나리역에 도착하면 후시미이나리신사, JR우지역에 도착하면 교토 우지 평등원에 갈 수 있다. JR대신 게이한 전철로 가고자하면 기온시죠역이나 산죠역에서 탑승하면 되는데, 교토에서 우지로 가는 게이한 전철은 2층으로 된 특급 열차로 매우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게이한 우지역에는 평등원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 이 버스를 타면 우지시의 우지신사 근처의 마을 입구까지 무료로 갈 수 있다. 우지천을 마주보는
[충북일보] 보은 지역에 조선시대 유명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이 잇따라 이주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로변에 안내 표지판이 설치돼 있지 않는 등 무관심으로 인해 이를 활용할 기회를 저버리고 있다. 역사가들은 조선 세종대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이천(李O·1376∼1451)과 장영실(蔣英實·?~?)이라는 인물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천은 무신이자 과학자로서 세종대의 해시계·금속활자·화포 개발과 개량을 주도하였다. 특히 이천은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미려한 것으로 평가받는 갑인자(甲寅字) 개발을 주도했고, 세종은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천은 예안(지금의 안동) 사람이나 그를 추모하는 전각인 추원각(追遠閣)이 보은군 장안면 오창리 70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전각 건물 안에는 이천이 무신으로서 세종대 육진을 개척한 내용을 기록한 '세종유서'(世宗諭書) 현판도 존재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에도
[충북일보] 최성천(崔聖天, 1884~1910)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휘하 장수로 알려져 있는 의병장이다. 그는 1910년에 소백산맥 이남의 산간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2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을 지휘하며 안동·예천·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는 등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베일에 가려진 의병장 최성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한 편이다. 다만 일제의 기밀문서에 의거해서 1884년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재판 판결문 기록을 통해 광부 출신으로서 충주 신기리(新基里)에 살았다는 정도의 사실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판결문에도 그가 살았던 충주 신기리가 어느 면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충주 일원에는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신기리라는 지명은 없었다. 다만 현재 충주와 인접해 있는 괴산군 괴산읍과 문광면에 신기리가 있는 것이 확인되는 바, 이 신기리를 충주 신기리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그가 서울 시해동(柴楷洞) 출신이라는 기록과 강원도 영월 하동면 직실리(稷實里)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으로 확실
통일신라시대 내제군(奈堤郡), 고려시대 제주군(堤州郡), 조선시대 제천현(堤川縣), 대한제국 이후 제천군(堤川郡), 현 제천시(堤川市). 이상에서 보듯 제천의 지명은 전통적으로 '둑'〔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의림지(義林池)의 유명성이 지명으로 옮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 지지리를 보면 제천은 삼국시대 때는 '내토군'(奈吐郡)으로 불리었다. 어문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내'는 흐르는 '내'〔川〕, '토'는 '둑'〔堤〕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시 삼국시대 제천의 지명 '내토군'도 의림지에 포섭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제천은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川), 의원(義原), 의주(義州) 등의 별호(別號)를 갖고 있었다. "제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이 내제군으로 했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1483)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 8년에 이를 없앴으며,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고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를 의천(義川)이라 하며 또 의원(義原)이라고도 불렀다."- 별호는 글자 그대로 본래 명칭 외에 다르게 불려지는 호칭을 의미하고 있다.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