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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여성 독립운동가 8人

그녀들의 고단했던 외침과 희생
굴곡진 역사에 묻힌 그 이름…세상 밖으로
신순호·박재복·어윤희·오건해·이국영·임수명·윤희순
도, 광복절 개관 목표 미래여성플라자에 전시실 조성

  • 웹출고시간2019.02.20 20:34:30
  • 최종수정2019.02.23 09:40:49

한국혁명여성동맹 모습. 뒤 왼쪽부터 윤용자, 이상만 선생 며느리, 이숙진, 최소정, 오광심, 연미당, 최형록, 이순승, 손일민 부인, 조용제, 오영선, 송정헌, 정정산, 오건해, 최동오 부인, 김수현, 노영재, 이헌경, 정정화, 이국영, 김효숙, 방순희, 김정숙, 김병인, 유미영 .

[충북일보] "식민지가 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조선인들끼리 싸우면 안 된다."

"조선의 독립이 간절하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 역)'의 실존 인물인 남자현 의사(1872~1933)는 단지(斷指·손가락을 자름)의 고통을 세 번이나 삼키며 이같이 다짐을 했다고 한다.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1910년)부터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 35년의 항일독립운동역사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꽃'이 아닌 굴곡진 역사의 증인이며 주체였다.

충북에도 서슬 퍼런 일제의 총검에 맞섰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현재까지 공적이 인정돼 건국훈장 서훈을 받은 충북의 독립운동가는 512명, 이들 중 여성은 1.6%인 8명에 불과하다.

△오건해(1894~1963, 청주, 애족장) △신순호(1922~2009, 청주, 애국장) △임수명(1894~1924, 진천, 애국장) △박재복(1918~1998, 영동, 애족장)△신창희(1906~1990, 청주, 건국포장) △이국영(1921~1956, 청주, 애족장) △어윤희(1880~1961, 충주 애족장) △윤희순(1860~1935, 충주, 애족장)이 바로 그들이다.

충북도는 지역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활동상 등을 알리는 전시실을 광복 74주년인 오는 8월 15일 개관을 목표로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미래여성플라자에 조성할 계획이다. 사업비는 국비 1억5천만 원과 도비 5천만 원 등 총 2억 원이 투입된다.

온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꼽히는 청주 고령신씨.

이 가문은 청주 상당산성의 동쪽에 있다고 해 일명 산동신씨(山東申氏)로 불렸다.

청주 산동신씨는 고령신씨 가운데에서도 매우 번성한 문중을 이뤄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 산동신씨는 문중 개화의 길을 걸으며 많은 인재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를 지낸 신규식, 신채호가 대표적 인물이다.

신건식 오건해 부부와 딸 신순호.

신규식의 동생은 신건식(1889~1955), 신건식의 부인인 오건해와 딸 신순호는 산동신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오건해는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독립운동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1942년부터 해방 때까지 한국독립당당원으로 활동했다. 오건해는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데 정성을 다했다. 오건해가 만든 음식은 굶주린 독립운동가들의 배를 채우고 정신을 채웠다. 오죽하면 오건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을까.

신순호는 1938년 8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한중 합동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1940년 9월부터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했다.

신순호는 5세 때 어머니 오건해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아버지를 찾아간 뒤 1938년 8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중국과 합동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여군으로 입대했다.

1942년 9월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돼 근무했고 이듬해 8월에는 외무부 정보과로 전보돼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신순호의 남편 박영준도 광복군 제3지대에서 훈련총대장으로 활동했다. 박영준의 아버지인 박찬익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애국지사다.

임수명과 남편 신팔균 장군.

임수명은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으로 항일운동을 한 신팔균(1882~1924, 독립장) 장군의 부인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무장투쟁가로 알려진 신팔균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진천에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초)를 설립,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임수명은 결혼 후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환자를 가장해 입원한 신팔균과 만나 1914년 결혼했다. 결혼 후 중국에서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임수명은 만삭이었을 때 남편을 잃었다. 주변에서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알면 낙태가 될까 염려해 일체 알리지 않고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선해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사직동 303번지에서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복녀를 출산하여 자녀 삼남매를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흉보(凶報)를 듣게 됐고 둘째 아들을 병으로 여의게 되자, 갓난 딸과 함께 부군을 쫓아 자진(自盡)했다고 한다.
박재복은 1938∼1939년 대전의 군시공장에서 여공으로 근무했다. 당시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다'는 등의 말을 퍼뜨렸다가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창희는 1921년부터 중국 상해에서 민필호 등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고,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 중경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이자 광복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했다.

이국영은 1941년 한국여성동맹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1년에는 3·1 유치원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 자녀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생계부 부원으로 일했다.

1921년 청주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중국 중경에 조직된 한국혁명여성동맹 대의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중경의 3.1유치원에서 연미당·정정화 선생 등과 함께 교민 자녀를 교육하기도 했다. 그는 또 한국독립당 당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어윤희

어윤희는 충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익힌 뒤 16세에 결혼했으나,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에 참여했다가 죽어 어린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開城)의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에 입학했고 졸업 후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낙도 주민의 전도와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직접 '독립선언서'를 개성 일대에 배포해 개성 만세운동의 불씨를 제공하는 한편, 거사 당일인 3월 3일에는 1천5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재소자들과 함께 다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육혈포(六穴砲:권총) 탄환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광복 뒤에는 개성에서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해 고아들을 돌봤다고 한다.

윤희순

윤희순은 조선 말기 의병장 유홍석 선생의 며느리다. 윤 여사는 1907∼1908년 강원 춘성(현 춘천)에서 군자금을 모아 의병 활동을 지원했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시아버지와 남편 유제원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895년 시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의 노래',의병군가, 병정가 등을 를 지어 부녀자들이 부르게 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여자의병의 선봉이 되어 군자금을 모아 의병에게 제공해 의병활동을 뒷받침했다.

노랫말은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 쏘냐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다.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시부와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남여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조선)는 목숨을 내놓을 것이니 너희(중국)들은 무기를 내 놓아라."

최초의 여성 의병지도자 윤희순은 만주대륙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휘하며 포효할 정도로 기개가 단단했다고 전해진다.

임수명과 윤희순은 다른 이들과 달리 독립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 역사에서 가족없이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이름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독립유공자에 비하겠냐마는 각지에서 보내온 독립운동 자금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를 행방을 모른 척 해주거나 '좋은 일'에 쓰라며 가락지, 비녀는 물론 머리카락을 잘라 내어준 이들이 없었다면 8·15 광복까지 독립운동은 계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 관계자는 "충북에 본적을 두거나 거주했던 흔적을 근거로 흉상 제작이나 기록물을 전시할 예정"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공훈이 재평가되고 이들의 업적이 도민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안순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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