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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4.10.21 15:55:20
  • 최종수정2014.10.21 15:53:08

조혁연 대기자

임진왜란 당시 같은 성(城)에서 8개월의 시차를 두고 '2차 전투'가 발생한 것은 진주성이 유일하다. 1592년 음력 10월에 벌어진 7일 밤낮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조선인은 1천여명, 일본군은 1만3천여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왜군의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무리하게 성벽으로 기어오르다 진주성 안 조선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김시민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10월 1일자>

김시민 사당인 충민사는 괴산읍 능촌리에 위치한다.

인용문 뒤에는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라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진주성 1차전투 패배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함께 복수를 곱씹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진주성 1차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왜군 정병이 육지에서 당한 최초의 대규모 참패였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해 호남 진출에 실패했고, 또 의병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부산-한양 수송로가 자주 차단됐다. 그리고 1차 전투에서는 왜장 우시등원랑(羽柴藤元郞)도 사망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 남부의 정병을 다시 모두 모으고, 본토에서 증원군을 파견토록 하는 등 진주성 2차 공격을 명령했다. 그 명령서에는 '김시민의 목을 베어오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증원군 안에는 임란 종전후 일본열도의 패자가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포함돼 있었다.

왜군 10만명은 1593년 6월 22일부터 8일 동안 진주성을 2차로 공격했고 결과는 1차와는 반대로 나타났다. 조선군이 대몰살했고, 이때 그 유명한 기생 '논개'의 순절사건도 일어났다.

'진주를 포위하고서 지난해에 패전한 원수를 갚는다고 떠들었다. 원래 임진년에 적병이 진주를 칠때 목사 김시민이 이를 막아 저당치 못하고 달아났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런 지 8일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죽은 자는 관민을 합하면 6만여 명에 달했고, 우마·계견(鷄犬)까지 남기지 않았으며, 적들은 성을 불태우고 참호와 우물을 메우고 나무도 베어 전날의 원한을 풀었다.'-<징비록 제 2권>

진주성 2차 전투는 김시민의 후임목사 서예원(徐禮元·?~1593)이 이끌었으나 애초부터 리더십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으로 성안을 울면서 배회했다.

'(서)예원은 겁을 먹고 전립(戰笠)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니, (…)적이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제군(諸軍)이 일시에 궤산되고 종인도 탄환을 맞아 죽었다.'-<선조실록 26년 7월 16일자>

서예원은 풀섶으로 달아났다가 생포돼 왜군에 의해 목이 베어졌다. 왜군은 이런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잘못 알았다. 왜가 참수를 해 교토의 저잣거리에 내건 목이 김시민의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안 것은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접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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