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문신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추강집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여기서 사육신(死六臣)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세조 집권 후의 당시 조정 분위기는 사육신을 거명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다 죽어간 이들을 역사 한 모퉁의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은 사육신 정원(?)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논란 끝에 지난 90년대 우리고장 옥천출신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추가됐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호칭도 '사칠신'이라고 불러야 보다 정확하나, '사육신'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육신 명단에는 올라있지 않으나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해 음독 자살한 인물이 있다. 청재(淸齋)를 호로 갖고 있었던 박심문(朴審問·1408년∼1456)이다. 그는 중앙정치 무대가 아닌, 변방 평안도 의주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해 그의 이름이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고종 때이다. '병자년(1456, 세조2)에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죽게 되자, 원통하고 분하여 조카 중손(仲孫)에게 말하기를, "내가 감히 성군(세조를 가리킴)을 하찮게 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문종(文宗·1414~1452)은 아버지 세종을 많이 닮았으나 병약했다. 재위 2년 4개월만에 병사하니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문종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당시 대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어린 단종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한다. 이런 까닭에 수양대군 세조가 왕권 찬탈을 위해 주도적으로 일으킨 계유정난 때 이들이 1차적으로 제거된다. 반면 당시 영의정으로, 문종의 부탁을 함께 받았던 鄭분(?~1454)은 화를 입지 않았다. 정분과 정인지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일설에 의하면 정인지의 구명 노력으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정국은 계속 심상찮게 돌아갔다. 그는 영의정의 몸으로, 하삼도 체찰사로 보내진다. 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일정 지역의 민정을 살펴보는 고위 임시직을 일컫는다. 사가들은 이 역시 처남 정인지의 배려로 보고 있다. "간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올라왔다. 그는 하삼도 체찰사 임무를 마치고 상경하는 도중 세조의 유배 전지(傳旨)를 접하게 된다. 하삼도는 충청, 전라, 경상도, 전지는 임금의 뜻이 담긴 공문서를 의미한다. 이 부분에 우리고장 충주가 등장한다. '체찰사로서 영남에서 돌아와 충주에 이르러 황보인ㆍ김종서 등의 머리를
계유정난은 수양대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김종서 부자, 황보인, 허후 등을 제거한 사건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계유정난과 관련, 1등 공신에 오른 인물 중에 한확(韓確·1403~1456)이 있다. 그가 계유정난 때 어떤 역활을 했는지는 사료 상으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정난공신 1등'에 오른 것으로 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즉위식 때 그의 위치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백관을 데리고 세조에게 인사를 올린 인물이 한확이었다. 백관은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이때 한확은 백관의 대표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사직(社稷)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다 같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하게도 경사로운 때를 맞아, 저 서기(瑞氣) 어린 해와 구름 속에 천명(天命)도 새로운 거룩한 성대(盛大)를 얻어 보고 태산(泰山)과 반석(盤石) 같은 바탕에서 다시 무강(無彊)하신 큰 계책을 기대하는 바입니다."(세조실록) 세조와 한확의 이런 교분은 '사돈'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세조 장남 도원군(20세 요절)은 한확의 딸 수빈한씨를 아내로 맞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인수대비, 즉
수양대군 세조는 왕위 찬탈을 위한 첫 작업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을 일으켰다. 김종서 부자,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이 역모죄로 희생됐다. 세조 즉위 10년 후에 작성된 단종실록은 계유정난이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이 시기 대신으로 허후(許 言+羽·?~1453)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살생부에 들지 않아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는 희생된 계유정난 대신들이 죄가 없음을 자주 거론했다. 특히 그는 황보인과 막역한 사이였다. 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궁궐에서는 한 바탕 '파티'가 벌어진다.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술을 돌리고 풍악이 울리자 재상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으나, 허후는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세조가 그 까닭을 묻자 재일(齋日)이라고 핑계하였으나 세조는
단종(端宗·1441∼1457)의 마지막은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다르다. 세조실록은 단종의 마지막을 매우 짧게 적고 있다. '노산군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때의 노산군은 단종의 강등된 이름을, '이 소식'은 삼촌 금성대군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기록대로라면 단종은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지 않았고, 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된다. 사가들은 세조실록에 대해 즉위 후의 일은 대체로 사실대로 기록했으나 왕위찬탈 과정은 왜곡이 심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때 사관으로 참여한 인물은 신숙주, 한명회 등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사약, 교살 등의 표현이 모두 등장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문헌대로라면 단종은 사약이 아닌 목졸려 타살당한 것이 된다. '나장'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을, '통인'은 관아에 딸리어
수양대군이 1456년(세조 2) 왕위에 등극하자,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고 한다. 김시습,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원호 등이 그들로, 사육신과 대칭된다. 생육신은 방랑을 하거나 두문분출하는 방법 또는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면서 단종을 추모했다. 이 와중에 우리고장 충북과 인연을 만든 인물로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원호(元昊·1397∼1463)가 있다. 김시습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설잠'이라는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했다. 그는 청주 상당산성도 방문, '遊山城'(유산성)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꽃다운 풀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물었고 / 살진 고사리 비갠 뒤라 더욱 향긋해 /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니'. 원호는 집현전 직제학(종3품)을 역임될 정도의 학구파 관료였다. 그는 왕위를 찬탈당하자 고향으로 낙향했고, 단종이 승하한 뒤에는 영월로 들어가 삼년 동안 묘살이를 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국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 밤마다 잠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 하늘은 귀 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단종(端宗·1441~1457)이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지은 자규시(子規詩)이다. '자규'는 피를 토하며 운다는 두견새를 의미한다. 그 피가 땅에 떨어져 꽃으로 다시 피어나니 두견화다. 진달래를 두견화로도 부르는 것은 핏빛 색깔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종은 17살 꽃다운 나이에 삼촌(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일부 기록은 '자살을 했다', 또 다른 사료는 '교살을 당했다'라고 적고 있으나, 세조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엄흥도(嚴興道·?~?)의 영월엄씨 문중사와 송자대전은 단종의 마지막을 다소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 되었던 단종이 화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지난 1970년대 이른바 '사육신 자격' 논란이 일어났다. 조선전기 문신인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핵심에 위치했다. 당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유응부(兪應孚·?~1456)를 사육신에서 제외시키고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김문기는 집현전 학자 출신이면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반면, 유응부는 非집현전에 무신 출신이면서 역할도 다소 왜곡돼 있다"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논의한 끝에 "유응부는 존속시키돼,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의했다. 따라서 지금의 사육신 정원(?)은 한 명 더 늘어난 7명이다. 호칭도 '사칠신'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나, '사육신' 명칭을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논란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됐다. 남효온은 앞서 언급한 6명을 거론하면서 김문기는 기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문기에 관한 사실을 유응부의 것으로 기술하는 오류를 범했다. 김문기는 단종복위 운동에 있어 성삼문, 박팽년 만큼이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것도 병력 동원과 관련이 있다. 실록에는 다음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을 가리켜 이른바 사육신이라고 한다. 대부분 능지처참됐고 일부는 혹독한 고문으로 심문 중 사망했다. 박팽년은 후자에 속하고 있다. 두 경우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유성원(柳誠源·?~1456)으로, 역모가 탄로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만 그가 자결한 정황은 다소 다르게 기록돼 있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그의 저서 '추강집'(秋江集) 육신전 편에서 유성원의 자결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자년(1456, 세조2)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을 잡아갈 때에 유성원이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제생(諸生)들이 성삼문의 일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대(冠帶)도 벗지 않은 채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거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더니, 조금 뒤에 관리가 와서는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을 가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일이 발각되자 성삼문·박팽년 등은 차례로 잡혀와서 모진
홍재전서(弘齋全書)는 금성대군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패를 모실 자리를 설치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자, 유(금성대군 지칭)가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신다"하고 북쪽을 향해 슬피 운 후 다음,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죽었다." 홍재전서는 정조가 지은 시와 문장을 모아서 편찬한 것을, 전패는 객사에 봉안된 위패로 임금을 상징한다. 함께 거사를 했던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1457)도 박천에 유배된 끝에 그해 가을 교살됐다. 이보흠은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그는 규휼제도의 일종인 사창제(社倉制)를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 큰 성과를 거뒀다. 때문에 당시 대구 백성들로부터 '순량'(循良)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문종은 이런 이보흠을 정4품 고위직인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했다. 한 마디로 이보흠은 '문종의 사람'이었다. 형(문종)의 아들(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이런 이보흠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그는 즉위 후 얼마안가 이보흠을 궁벽한 외직인 순흥부사로 발령냈다. 이때의 외직은 지방직을 말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정황상 세조는 금성대군과 이보흠 모두가 자기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단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교서는 국왕이 발표하는 문서를 말한다. "혹은 이르기를, '수양 대군이 장차 과인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 하여, 서로서로 의혹하고 혼란하여 안팎에 만연되니, 이것은 우리 군신을 이간시키고 국가를 동요시키려는 것이다. 만일 뜬말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곧 잡아서 고하라. 반드시 중한 상을 주겠다". 소문은 현실화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제거하는 등 왕위찬탈 음모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명분은 신권이 왕권을 넘본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때 단종이 남긴 교서 내용이다.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과 인심의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1차는 이른바 사육신이, 2차는 금성대군이 주도했다. 세종은 6명의 부인 사이에 18남 4녀를 두었다. 이중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문종이 장남, 수양대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송강 ' 정철(鄭澈, 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으로,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정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도 지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한 것을,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후속편으로 3.4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밖에 성산별곡이라는 가사작품도 존재한다. 이때의 '성산'은 고향인 담양 지곡리 일대를 말한다. 정철은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고장 진천에 묘, 사당, 신도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정철은 그의 나이 58살에 강화도에서 병든 몸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모가 영면해 있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묻히게 된다. 그러다가 40여년 후인 1665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밑으로 묘가 옮겨지고 또 사당도 건립되게 된다. 이 작업은 우암 송시열이 주도했다. 역사가들은 이 부분을 매우 세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사료에는 '묘에 물이 나기 때문에 후손들이 송시열과 상의해 묘를 이장하게 됐다'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두 가지의 정치적인 이유가 작동했다. 정여립 모반사건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