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본관은 봉화다. 정도전은 삼봉이라는 호와 도담삼봉에 얽힌 전설에서 보듯 일정기간 단양에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첫 벼슬길에 나선 곳도 단양서 가까운 충주다. 우현보(禹玄寶·1333~1400)의 본관도 단양이다. 게다가 그는 말년에 고향행을 원했다. '조선이 개국된 뒤에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는 특별히 공에게 후사하고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단양백(丹陽伯)에 특진시켰다. 그해에 공이 죽었는데,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라 하였다'(연려실기술) 따라서 우현보의 고향이 단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은 대단한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도 단순히 경쟁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넘보는 원수같은 라이벌이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 우현보 가족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정몽주 사람이었던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됐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장손인 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
유배에 관련된 형벌 용어는 의외로 많다. '도배'(徒配)는 도형에 처한 뒤 유배(귀양)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도형은 징역, 즉 중노동을 의미한다. 장배(杖配)는 매질을 가한 후 귀양 보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밖에 찬출(竄黜)은 벼슬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찬적(竄謫)도 같은 표현이다. 유배형 중 어느 특정 지역을 정하여 머물게 하는 것을 부처(付處)라고 한다. 정배(定配)도 거의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도중에 유배지를 환경이 더 안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다. 이를 이배(移配)라고 한다. 그 반대는 양이(量移)로,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강등하여 서울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을 일컫는다. 여말선초에 유배와 복권을 밥먹듯이 한 인물이 있다. 우현보(禹玄寶·1333~1400)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자 우왕은 우현보를 좌시중에 임명하고 반군 세력을 방어토록 명령한다. 좌시중은 종1품에 해당할 정도의 높은 벼슬이다. 이성계의 회군이 성공하면서 우현보는 좌시중에서 파직됐다. 회군에 성공한 후 이성계는 명분을 축척하기 위해 '뜸'을 많이 들인다. 이때 공양왕이 잠깐 등장했고, 우현보도 복권이 돼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고려말 신진 사류의 한 인물로 남은(南誾·1354~1398)이 있다. 정도전 사람인 그는 정몽주가 이끄는 구세력과 대립했다. 신진 사류가 혁명을 추구했다면, 정몽주가 중심이 된 구세력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따라서 남은은 정벌군에 포함돼 위화도까지 진군했지만 계속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급기야 전회에 밝힌 조인옥(趙仁沃·1347~1396)과 함께 우군통제사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한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지 4년만에 조선이 개국됐다. 그는 개국공신 1등에 책록돼 전지 2백결과 노비 25구를 받았다. 이는 정도전과 같은 규모다. 천도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실록은 정도전과 함께 남은도 한양천도에 적극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먼저 계룡산 일대를 둘러본다. '남은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히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행차는 이미 계룡산에 가까이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 하였다'.(태조실록) 이성계는 계룡산 다음으로 경기도 광실
공민왕은 환관(내시)에 의해 살해됐다. 뒤를 이은 우왕(禑王·1365~1389)은 이를 크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우왕은 요동정벌 결정이 내려지자, 최영을 원정군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과 함께 서경(평양)에 머물도록 한다. 그곳에서 원정군의 진군을 독려했다. 공민왕 살해를 보면서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최대의 패착이었다.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는 것은 반란을 의미한다. 생사의 게임이 시작됐다.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왕과 최영 장군은 서경을 떠나 급히 수도 개경 방어에 나섰다. 실록이 이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 관점이 승자의 시각인 점은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우왕은 대군이 돌아와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瓜)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 (…)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이성계를 우군통제사, 조민수를 좌군통제사에 임명했다. 이에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내세워 출병을 반대한다. 이때가 1388년(우왕 14)이다. 우왕과 팔도도통사 최영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진군을 명령한다. 이성계가 압록강에 이르러 다시 한번 회군을 요청한다. 이번에는 4불가론에 하나를 더해 '5불가론'을 내세웠다. 5월 13일이다. 당시 고려는 명나라가 철령위 반환과 과도한 조공을 계속 요구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을 파견한 상태였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보낸 사신 박의중이 아직 귀국하기도 전에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사직과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라며 5불가론 내용을 개성에 보냈으나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5월 20일 이성계는 여러 참모들과 논의한 끝에 회군키로 결정,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때의 상황이 실록에 실려 있다. 하늘이 내편임을 의연중에 내비추고 있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하자 당시 조정은 새 왕조의 국호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을 복수로 정해, 그중 하나를 명나라로부터 낙점 받기로 했다.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명이다. 명나라 사신으로는 자청을 한 한상질(韓尙質·?~1400)로 정해졌다. 이성계는 주문(奏聞)으로 불리는 당시 외교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는다.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태조실록) 본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성계는 '왕씨들이 혼미해 나라가 스스로 망하는데에 이르러, 백성들의 추대로 자신이 등극하게 됐다'라는 식으로 문장을 쓰고 있다. 내용중 '소방'은 당시 한반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당시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자문(咨文)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문은 조선시대 때 중국과 왕복하던 외교문서의 하나를 일컫는다. '그 조칙에, 동이(東夷)
태조 이성계는 '창업지주'(創業之主) 자격으로 일등 개국공신 17명을 선정했다. 창업지주는 나라를 처음으로 세워 왕조를 연 임금을 일컫는다. 일등 개국공신은 배극렴, 조준, 정도전, 이지란, 정총, 정탁, 이방원, 이방간 등이다. 이들에게는 전지 150결, 노비 15구 이상이 하사됐다. 조선시대 1결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르나,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평 정도로 환산된다. 따라서 개국공신에게는 대농장이 하사된 셈이다. 당시에는 노비를 인격체가 아닌 재산 일종으로 봤다. 따라서 1명, 2명이 아닌 '口'로 표현로 했다. 일등 개국공신에는 이성계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형제간 인물이 있다. 정총과 정탁이다. 정총(鄭摠·1358~1397)에 대해서는 전회에 태조 이성계의 고명 및 인신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전문 문제로 트집이 잡혀 이역땅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명'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신인'은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 정도를 의미한다. 정탁(鄭琢·1526~1605)은 정총의 친동생이 된다. 그도 일등공신에 책록된 만큼 적지 않은 공헌도를 지니고 있다. 사석에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어야 한다"고, 지극히 예민한
고려말 유학자인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을 가리켜 흔히 '삼은'(三隱)이라고 한다. 세 사람의 호는 각각,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등으로, 모두 '숨을 隱' 자로 끝난다. 여기에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협조하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때 지어진 한시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길재) 정몽주와 길재는 그 출생지가 영남이다. 정몽주는 영천, 길재는 금오산 인근의 선산이다. 따라서 이들은 훗날 조선 영남사림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영남 사림은 그 시작을 '절개'로 했듯이 항상 대의와 명분을 중시했다. 당연히 두 왕조를 섬기는 것을 충이 아닌 변절로 봤다. 권근이 그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권근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스승과 제자가 각기 다른 길을 간 셈이 됐다. 이는 세조대의 신숙주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때문에 당시 각종 야담집은 권근을 부정일색으로 기술하고 있다. '신광한의 집에 공의 초상이 있었는데, 김안국은 절을 하면서, "이 분이 우리 도(道)에
권근(權近·1352~1409)은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저술로 달랬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쳐햐 할 저서가 있다. 바로 권근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다. 보물 제 1136호인 입학도설은 권근이 익주(지금의 익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저술한 책으로, 일종의 성리학 입문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부 내용은 책 제목 그대로 도설(圖說), 즉 그림설명을 달아 이해도를 높였다. '오경천견록'은 유배지 충주 양촌에서 1391년(공양왕 3) 저술작업을 시작한 책으로 14년 만에 완성됐다. 그 사이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유교의 근본경전인 5경, 즉 역경, 서경(書經), 시경, 예기, 춘추를 주석한 이 책은 '역(易)'을 본체(體), 춘추를 용(用)으로 인식했다. 서거정과 안정복이 권근의 두 저서를 이례적으로 호평했다. '경은 천품이 순수하고 지식이 깊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육경(六經)을 모조리 꿰뚫어 전성(前聖)의 오묘한 이치를 발명하고 후진의 사표가 되었으며, 오경천견록·입학도설 등의 저술은 학자들의 지남(指南)이 되었다'.(서거정의 동문선) 이때의 '지남'은 이끌어 가르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권
조선 개국공신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정도전, 권근, 배극렴, 조준 등이다. 그러나 권근(權近·1352~1409)은 이들과 달리 조선 개국공신 명단에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은 개인 권근에게 있어 '고난의 시기'였다. 그는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외교문서의 일종인 자문(咨文)을 미리 봤고, 이것이 이유가 돼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다. '"권근(權近)은 성지를 사사로이 열어 보고는 신씨(辛氏 우창)에게 편당·아부하여 이임(李琳)에게 먼저 알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오며, 조종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맡은 관사에 내려 법대로 처형하소서" 하였다'.(고려사절요) 권근은 조금 감형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된다. 이때 이른바 '윤이(尹·), 이초(李初)의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라는 인물이 명나라 황제에게 가서 당시의 고려 사정을 전하고 명에게 고려 토벌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이때의 '고려 사정'은 이성계 등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것을 말한다. 이 고변으로 인해 고려말 구세력의 상당수가 청주옥(淸州獄)에 하옥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주
'대소 신료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태조실록) 이성계가 드디어 조선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개국과 동시에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는 이성계의 등극을 왕위 찬탈로 여겼다. 따라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내려주지 않았다. '고명'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신인'은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 정도를 의미한다. 건국 초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표전문(表箋文)을 지니고 명나라 사신으로 간 인물이 정총(鄭摠·1358~1397)이다. '표전문'은 표문과 전문의 합성어로, 명나라 황제와 황세자에게 건네는 일종의 외교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는 표전문 내용을 문제삼아 정충 일행을 구금했다. 당시 명나라의 트집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조선 사신을 구금한 이유를 적고 있다. '사람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올려 하례하니, 예의가 있는 듯하나, 문사(文辭)에 있어 경박하고 멋대로 능멸히 하여 근일에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주청한 장계 안에 주(紂)의 일을 인용했으니 더욱 무례하였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를 때 수양대군처럼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다. 대신 '아랫사람'을 조종했다. 이때 아랫사람 역할을 한 인물이 배극렴(裵克廉·1325~1392)이다. 그는 고려 왕대비(공양왕 어머니)에게 대놓고 고려 사직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시중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였다'.(태조실록) 이때 공양왕은 재위 3년째로 막 쉰살이 되는 나이였다. 그는 국새를 내놓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가니, 백관이 국새를 봉전하여 왕대비전에 두고(…) 13일(임진)에 대비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로 하여금 국사를 감록하게 하였다'.(태조실록) 공양왕은 폐위된 뒤 '공양군'으로
[충북일보] 옥천의 A 초등학교에서 동급 학생 간 집단 괴롭힘을 의심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경찰과 교육 당국이 조사하고 있다. 옥천 A 초등학교 6학년생 아들을 둔 B씨는 "아들이 동급생 6명으로부터 장기간 상습적인 언어와 신체 폭력을 당했다"라며 "이 사실을 아들의 카카오톡 대화방 등을 살펴보고 나서 알았다"라고 한 언론에 알렸다. B 씨는 "지난해부터 아들의 팔과 다리 등에 자주 멍이 들었고, 최근엔 친구 집에 다녀온 뒤 얼굴과 은밀한 신체 부위까지 멍들어 심각성을 인지했다"라고 주장했다. 또 "가해 학생들이 아들에게 음식값을 대신 내게 하거나 세탁비를 받아 내기도 했다"라고 했다. B 씨는 이 내용을 학교와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옥천경찰서는 "초등학교 재학생인 아들이 수개월 간 같은 학교 다수의 남학생에게서 신체·정신적 위해를 당했다"라는 내용의 학부모 진정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교육 당국도 경찰 조사와 별개로 이 사안을 이미 관리하고 있다. 해당 학교는 지난 11일 학교폭력 전담 기구를 열었고, 이튿날 B씨의 아들을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옥천교육지원청도 다음 달 1일 학교폭력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