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이 어린 몸으로서 큰 기업을 이어받으니,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다. 다만 끝까지 잘 다스리기에 힘써야 하지만 처음 정치를 바르게 하여야 하는데, 거의 조종의 훈계를 삼가 따르고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여 융평한 시대에 이르기를 기약하노라".- 단종이 모화관이라는 곳에서 무과시험을 치룬 후 합격자 40명을 상대로 이른바 '일장 연설'을 하는 모습이다. 이때 40명 중 1등을 한 인물이 권언(언자는 堰의 土대신 身·?~1467)이다. 그는 그러나 자신을 뽑아 준 단종 대신 수양대군의 사람이 된다. 수양대군이 뜻을 품고 은밀히 무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종서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계유정난 계획이 착착 실천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언은 정난이 일어나는 날 매복조로 활동한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람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권언·권경·한서구·한명진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홍순손·유서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문종은 자신이 단명할 것을 알고 황보인, 김종서, 남지 등에게 어린 아들 단종을 잘 보
태종이 상왕이 된 후 임금인 세종, 양녕대군, 그밖의 대신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 양녕대군 폐위에 따른 그 간의 속앓이를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부정(父情)을 거론하는 중에 단호함이 배여 있다.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 양녕을 의정부에 회부하건 육조에 회부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 그때 가서 나더러 잔인하다는 말은 말 것이며…',- 전회에 밝힌 기첩 어리(於里)사건 이후 상소와 탄핵주장이 빗발쳤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녕을 왜 국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계속 감싸느냐"는 투였다. '"양녕 대군 이제는 군부(君父)께 죄를 얻었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니온데, 전하께서 특별히 우애의 정으로 불러서 접견하시고 인하여 수일씩 머무르게 하시와 태종의 유교(遺敎)를 어기시니, 온 나라 신민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을 조화시키는 권력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의 기구는 왕권 견제용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이 대소 신료의 상소와 탄핵 주문을 견디지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와 사이에서 양녕, 효녕, 충녕 등을 포함해 4남 4녀를 얻었다. 이중 장남 양녕을 1404년 왕세자로 책봉했다. 양녕의 나이 10살 때였다. 그러나 그는 궁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왕세자 교육을 받지 않았고 궁궐이 금지한 매사냥도 곧잘 나갔다. 태종의 속을 가장 썩인 것은 여자문제였다. 그는 17살부터 기방을 들락거렸다. 그것도 난봉꾼으로 출입했다. 그는 정종의 애첩인 초궁장과 사통하고, 매형의 첩이었던 칠점생이라는 기생과도 상간했다. 양녕에게 있어 정종은 큰 아버지가 되고, 이때의 매형은 진천인물 이거이 아들인 백강이다. 난봉질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이 어리를 만나지 못하게 하자, 그녀를 장인(김한로) 어머니의 시종으로 변장시켜 궁궐로 데려와 아이를 갖게 했다. 이 사건으로 태종은 양녕을 폐위키로 결심한다. 그리고 왕세자를 잘 교육시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목메어 울었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이야기하라" 하고, 인하여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었다. 이어서 하교하였었다. "너는
회안군 이방간(?~1421)은 야욕을 숨기고 있었다. 이 야욕을 충동질한 인물이 박포(朴苞·?~1400)다. 그는 제 1차 왕자의 난 논공행상에서 자신이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포가 방간의 집을 찾아갔다.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靖安公)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하였다'.- 본문 중 '정안공'은 태종 이방원, '공'은 회안군 자신을 일컫는다. 이 대화는 제 2차 왕자의 난이 실패한 후, 체포된 방간이 이방원 진영의 이숙번(1373~1440)에게 털어놓는 말들이다. 정안군 이방원이 곡절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자의 난 등 자신이 세제(世弟)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했다. 이른바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이중에는 연사종(延嗣宗·1360∼1434)이라는 인물도 포함돼 있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를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쟁취했다. 이는 그 만큼 적이 많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사병도 건재할 시기였다. 신변에
수양대군 세조가 김종서 등을 살해하기로 최종 결심을 하고 거사일에 맞춰 뜻을 같이 하는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계유정란이 시작됐다. 막상 생사 갈림의 거사가 겁이 났는지 일부는 주춤거렸고, 또 다른 일부는 뒷문을 통해 도망치기도 했다. 이때 수양대군에게 처음의 결심처럼 빨리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인물이 두 명있었다. 한명회와 홍윤성이다. '의논이 분분하자, 더러는 북문으로 빠져나가므로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 홍윤성(洪允成·1425~1475)은 얼마 안 있어 진행된 궁궐안의 대규모 살육 때 또 한번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쇠몽둥이를 휘두른 사람 중의 한 명이 홍윤성이었다. '군사를 세 겹으로 짜 세워서 세 겹 문을 만들고 한명회는 생살부를 가지고 문의 안쪽에 앉았다. 여러 재신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는데 첫째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들을 떼고,둘째 문에 들어오면 그 이름이 생살부에 실렸으면 홍윤성·유수·구치관 등이 쇠몽둥이를 들고 때려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 조선시대 박연 등이 꼽힌다. 이중 박연(朴堧·1378~1458)은 영동에서 생과 몰을 함께 했다. 세종대에 활약한 박연은 악보 편찬, 악기 제작 등 한국 음악사에서 다방면의 공헌을 남겼다. 그는 대금을 잘 부는 등 그 스스로 빼어난 연주가이기도 했다. 박연은 3남 4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다. 3남인 계우(季愚)는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에 역임되는 등 장래가 가장 촉망됐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로는 소과와 대과(문과)가 존재했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것이 소과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는만 대과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박계우는 수양대군 세조가 왕권 찬탈을 도모하는 시기에 순절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종사(宗社)의 대계를 위하여 사(私)를 버리고 마지못해 대신과 대간의 청을 따르니, 부처(付處)한 이용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 이징옥의 아들 이성동, (...) 그리고 정분·이석정·조완규·조순생·정효강·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 이제부터 간당의 근본
세종의 장남인 문종은 병약했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얻지 못했다. 3명의 후궁을 둬 정비인 현덕왕후 권씨와 사이에 단종과 경혜공주를 얻었다. 현덕왕후는 경혜공주를 낳다가 난산 끝에 이틀만에 죽고 문종 또한 재위 2년여만에 병사했다. 따라서 단종과 경혜공주는 할아버지(세종대왕) 후궁인 청주 본관의 혜빈양씨에 의해 길러진다고 전회 밝힌 바 있다. 삼촌인 수양대군 세조는 금성대군,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연거푸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끝에 자진케 했다. 실록은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세종이 스스로 목을 메었다'고 적고 있으나 이를 믿는 전문가나 국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다른 기록에는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의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천민으로 강등돼 남도천리 순천도호부 관비로 유배됐다. 그의 남편, 즉 문종의
세종대왕은 정비 소헌왕우 심씨 외에 9명의 후궁을 더 뒀다. 이들에게서 19남 4녀를 얻었다. 후궁 중에는 혜빈양씨라는 인물이 있다. 내명부 궁녀 출신인 그녀는 병약한 문종을 보살펴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 네번째 후궁이 됐다. 그녀는 세종과 사이에 한남군(漢南君·본명 이어), 수춘군(壽春君·〃이현), 영풍군(永豊君·〃이전) 등을 얻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병사했다. 게다가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도 난산끝에 이틀만에 죽게 된다. 세종은 졸지에 고아가 된 친손자 단종과 그의 누이인 경혜공주를 혜빈양씨에게 부탁했다. 청주가 본관인 그녀는 세 아들의 어머니이면서 단종의 유모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때문에 단종은 8살 때 왕위에 오르고서도 혜빈양씨 품에서 잠들기를 원했던 것으로 일부 야사는 쓰고 있다. 여기서 비극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 세조가 압박을 가한 끝에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성삼문과 더불어 옥새를 지키려한 인물이 혜빈양씨다. 그녀는 우리고장 청풍으로 유배된 끝에 1455년 교수형을 당했다.영풍군은 어머니보다는 2년 늦게 살해된다. 영풍군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고 그 반대편에 섰다. 그는 사육신의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갈 때 수행한 여러 명의 인물 중에 민발(閔發·1419~1482)이 있었다. 사은사는 명나라 은혜에 답례한다는 명목하에 부정기적으로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민발은 이런 인연으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에 참여한다. 이때 수양대군의 옷깃을 잡고 간언한 인물이 민발이다. '세조가 정난(靖難)하던 날, 옷을 붙잡고 굳이 간(諫)하기를, "원컨대 계청(啓請)한 뒤에 행하소서" 하였으므로, 세조가 의롭게 여기었다'.- 본문 중 '계청'은 기분나는대로 행동하지 말고 계책을 먼저 세운 후 움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발은 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용양위 상호군(정3품직)에 임명되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민발은 이때부터 우쭐대기 시작했다. 요즘 표현으로 '오버'를 하기 시작한다. ' 민발이 임영대군의 말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임금이 민발을 불러 제지하였으나 민발이 듣지 않았다. 임금이 굳이 명하여 제지한 뒤에야 곧 그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바야흐로 명을 굳게 거역하였으니 너의 죄가 크다" 하니, 민발이 자기가 옳다고 굳이 고집하며 언사에 불손함이 많았다'.- 세조는 이때 민발
권력 앞에는 부모형제도 없었다. 1,2차 왕자의 난을 겪은 태조 이성계는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졌다. 따라서 그는 고여(高呂·?~1402) 등 최측근 심복만을 대동한 채 함경도 동북면으로 낙향한다. 이른바 이성계의 북순(北巡)으로, 함흥차사라는 표현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러나 실록 속의 이성계는 이미 그 이전에 심신이 피곤해 있었다. 정사(政事)를 돌보는 것도 자주 힘겨워 한다. '도승지 한상경에게 분부하여 도평의사사에 전교하였다. "내가 늙고 병들어서 정무를 게을리 하고 단지 경 등만 믿으나, 다스려 보려는 마음을 어찌 잠시인들 잊겠는가? 경 등은 모두 마음을 다해서 나의 부족을 도우라. 관찰사는 반드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 이에 시중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신 등이 모두 어리석고 못난 자들로서 성상(聖上)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심력을 다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돕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를 골라서 보내는 것은 실로 분부하신 바와 같으니,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소서"'.- 본문 내용 중에 김사형(1341∼1407)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는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이성계와 정몽주가 대결을 할
집현전(集賢殿)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고려 인종은 연영전(延英殿)이라는 기구를 집현전이라 개칭, 운용했다. 그러나 집현전은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집현전을 확대·개편, 본격적인 학문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세종이다. 그는 집현전 학자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중 하나가 집현전 휴가제다. '집현전 부교리 권채(權綵)와 저작랑 신석견(辛石堅)·정자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이처럼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불렀다. 본문 중에 남수문(1408~1443)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반에게 다소 생경하지만 남수문은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선초기 남지(南智·?~1453)라는 인물이 명나라로부터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이라는 역사책을 갖고 왔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주석(註釋), 즉 낱말이나 문장을 쉽게 풀어 쓴 것을 말한다. 4군6진을 개척할 정도로 역사의식이 남달랐던 세종은 이 책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역사책 한권을 얻고서 사신을 보내어 중국에게 큰 사례를 한다. '중추원 부사 남궁계(南宮啓)를 보내어 호삼성(胡三省)의 음주자치통감을 내려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표문(表文)에 배례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때 각종 옷감과 인삼 그리고 오미자 등을 준 것으로 실록은 쓰고 있다.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한다. 이때 당부받은 인물을 이른바 고명대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지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한다. 따라서 그의 후임인 정분(?~1454)이 고명대신에 대신 들어간다. 남지의 행동은 칭병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는 풍질(風疾)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좌의정 남지가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