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박연의 스승으로 고려말 문신인 김자수( 金自粹·?~?)라는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조선전기 학자인 김세필(金世弼)이 그의 고손(증손자의 아들)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엇갈리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그를 고려에 절개를 지킨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광주는 전남이 아닌 경기도 광주를 의미한다. 또 연려실기술은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를 인용, 김자수가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라는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김자수가 태조와 태종 등 두 임금을 섬기며 청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고 썼다. '청주 목사 김자수가 연사(年事)
충북학연구소는 올 상반기 충북을 빛낸 2010 역사·문화 인물의 한 명으로 신미대사(信眉·?~?)를 선정한 바 있다.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점이 선정 사유가 됐다. 신미대사의 속가 본관은 충북 영동 지방의 옛이름인 영산(永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김길원(金吉元)이라는 인물은 홍건적을 토벌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출신지는 충북 영동이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영동(永同)에 집성촌을 형성했고, 김종경(金宗敬), 김훈(金訓)과 같은 조선전기 문신들이 배출됐다. 신미대사에 있어 김종경은 친할아버지, 김훈은 친아버지가 된다. 김종경은 악성 박연과 같은 마을에 살았고 또 허조(許稠), 맹사성(孟思誠) 등 유학자와 교유했다. 김훈은 나중에는 병마사(兵馬使)가 되지만 원래는 문과에 급제했다. 바로 신미대사 집안은 유교 명문가였고, 영산김씨의 종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인 신미대사는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평생 승려의 길을 걸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식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경우가 많다. 당시 김훈 집안은 그 반대였다. 신미대사 가족들은 아버지의 방탕한
조선시대에는 과거 외에 유일(遺逸)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다. 이는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를 시험없이 발탁하는 제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대상이 됐다.훈구와 사림파의 대결로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나면서 난세를 피해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명종은 인물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유일을 통해 관료 일부를 임명했다. 그중에는 성제원(成悌元·1506년∼1559)이라는 인물도 포함돼 있다.'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청홍도 관찰사의 계본을 보니 공주에 사는 유학 성제원이 조행(操行)이 있다고 하니, 관직을 제수하라."'-본문 중 '정원'은 지금이 청와대 격인 승정원을, '조행'은 태도와 행실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청홍도'(청주와 홍성)는 당시 충주에서 이홍윤 역모사건이 일어나 붙여진 행정명이다. 당시 유일이 조정의 큰 관심사였는지 사관(史官)이 이례적으로 성제원에 대한 인물평을 남겼다. '성제원은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날마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렸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다. 천성이 효우(孝友)스러워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결같이 예제에 따랐고, 최질을 몸에서 벗지 않고 늘 입고
조선시대에는 감옥을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이 옥은 의금부, 포도청,각 지방의 감영 소재지, 군현에도 각각 존재했다. 특히 지금의 서울구치소에 해당하는 옥은 '전옥서'(典獄署)라고 불렀고 종로에 위치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옥서가 '감옥서'로 바뀌었고, 이것이 다시 '감옥'(1907년)으로 변경됐다. 이때부터 감옥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감옥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런 곳이다. 더욱이 조선시대 감옥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세종대왕이 그 개선책을 직접 유시한다. '유시하기를,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옥 가운데에 바꾸어 놓을 것.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몸을 씻게 할 것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두발을 감게 할 것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 것 △목욕 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獄卒)이 친히 스스로 검찰하여 도망하는 것을 막을 것" 이라 하였다.'- 원문은 '한 일'(一) 자로 돼 있으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로 처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감옥환경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죄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의정부에
조선시대 세곡(稅穀) 운송은 사고가 적지 않았다. 특히 바닷길로의 수송은 거친 파도가 항상 문제가 됐다. 태종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했다. 이날 사고로 1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실록은 쓰고 있다. 조선시대 인구수를 감안하면 초대형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해중(海中)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島)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 하였다.'- 태종은 이날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이라는 말로, 자신을 크게 책망했다. 그리고 해로가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고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환도 1개를 만들려면 환도장 6명 외에 소목(小木), 노야(爐冶), 동(銅), 마조(磨造), 주성(鑄成)장 등이 참여했다. 이 때문에 환도 1개 값은 쌀 2석5두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언급한 6개 분야의 장(匠) 중 '동장'(銅匠)은 구리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 저잣거리에서는 보통 '퉁장'이라고 불렀고, 이때의 '퉁'은 동기(銅器)를 의미했다. 조선시대에는 구리의 원석을 '동철'(銅鐵)이라고 불렀다. 동철은 조선팔도 각지에서 적지 않게 생산됐다. 충남 공주도 그중 하나였다. '수철(水鐵)·동철(銅鐵)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본문 중 등장하는 '수철'은 무쇠를, 마현은 공주목에 속한 지형을 의미한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정철학으로 삼으면서 상업과 광업을 천시됐다. 따라서 동철은 나왔지만 그 제련법은 서툴렀다. 그 부족분은 주로 대마도에서 수입해 썼다. 대마도 사람들은 그 대가로 완성된 주조물이나 직물을 역수입해 갔다. 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마도수호 종정무(宗貞茂)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한 것이
송자대전 (宋子大典)은 송시열의 시와 각종 글을 모아놓은 시문집으로 1787년에 간행됐다. 송자대전도 사화(士禍)의 피해상을 사례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사화(士禍)가 너무나 혹독하였습니다. 때문에 성수침은 기묘사화가 있을 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으며, 성운(成運)은 아우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안은 채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본문 중에 성운(1497∼1579)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송자대전은 성운의 은둔 이유를 '아우의 상'을 거론하고 있으나 또 다른 사료는 '형이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따라서 내용은 다소 엇갈리나 형제 중에 사화 피해자가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운의 보은 은거는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특히 이동 수단으로 맹사성처럼 소를 즐겨탔던 모양이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 반면 성운은 소를 타고 가서 거문고를 즐겨 뜯었다. '
조선시대 사관은 비밀리 작성된 사초와 공문서를 묶은 시정기(時政記)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1545년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가 정순붕, 이기 등을 끌어들여 대윤(大尹)을 공격했다. 이른바 을사사화다. 당시 사관은 안명세(安名世·1518∼1548)였다. 그는 춘추필법에 따라 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시정기로 작성했다. 당시 시정기에는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많은 선비들을 무고하게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씨앗이 돼 3년 만에 필화(筆禍) 사건이 일어났다.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이기는 3년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이라는 책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때 한지원이라는 인물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 정순붕 등에게 밀고했다. 그는 을사년 당시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다. 안명세가 붙들여 왔고 심문이 시작됐다.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안명세는 형문 1차에 장삼십(杖三十)을 쳤으나, 지난번 공초와 똑같았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안명세는 형추하여도 자복하지 않으니 내일 다시 형추하소서.'(밤
관찰사는 조선시대 때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말단행정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사료는 관찰사로 있으면서 토목공사를 자주 한 인물로 이사균(李思鈞·1471∼1536)을 종종 거론하고 있다. '금상 19년에 사창(社倉)을 창설하였다.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하므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마점고개는 전남 영광군에 위치하고 있다. 그가 조선시대식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는지 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성품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좋아해서 관직에 있을 때 늘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이것이 그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기묘사화와 관련, 전회에 우리고장 청원옥산 인물인 박훈(朴薰·1484∼1540)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균도 이 시대 인물로, 박훈과 이런저런 사연을 만들고 있다. 이사균이 기묘사화로 귀양길에 오른 박훈을 중도에 만났던 모양이다. '승지로 임명되어 돌아오다가 박훈과 기준(奇遵)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는 도중 갈원(葛院)에서 서로 만났다.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하다가 시사(時事)에 언급되었을
흔히 조광조,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김식, 기준, 신명인 등을 기묘사화의 희생자들이라고 해서 기묘팔현(己卯八賢)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중 조광조, 안당, 김정, 김식, 기준 등은 처형이나 자살 등에 의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팔현 중에도 충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 적지 않다. 김정, 김식 등은 각각 우리고장 보은, 청풍인이고 정광필은 충남 회덕 사람이다. 신명인(申命仁·1492∼?)은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충북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살한 김식(金湜)의 시신을 맞은 사람이 신명인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김식의 수제자였다. '경진년에 김식이 화에 걸려 죽자 그 시체를 영남으로부터 운반하여 올라오는데, 김식의 부인 이씨가 충주(忠州)로 가서 시체를 맞아 염습하고 관에 넣어서 임시로 그곳에 매장하였다.'- '공(신명인)은 멀리서도 시체가 충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리더니 감개하고 애도하여 마침내 송옥(宋玉)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대성(大成·김식 지칭)의 부득이한 뜻을 밝히고…'- 본문 중 '송옥'(宋玉·BC ?~BC ?)은 중국 고대 문장가로, 충성을 의심받아 쫓겨나는 신하의 심정을 가을의 서글픔에 많이 비유했다.
현량과(賢良科)는 과거시험이 아닌 천거에 의해 유능한 인재를 선발·임용하던 조선시대 인재선발 제도를 말한다. '안당이 아뢰기를, "이제 성균관이 천거한 것을 살펴보니, 조광조·김식·박훈 등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거되었으니(…) 이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문신을 등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본분 중에 조광조, 김식, 박훈 등 세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를테면 조선 현량과 1기 동기생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왠지 '젊은 피' 조광조와 동기생이 됐다는 점이 불안하다. 이들 3인 중 김식(金湜·1482∼1520)은 처음 접하는 인물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은 임금의 권력이 약해지고 신하의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이 현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환국(換局)을 세번이라 일으킨 숙종이다. 중종도 버금갔다. 중종은 신진 사림들이 신강(臣强)의 모습을 보이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이들을 한밤중에 전격 체포했다. 죄목은 '붕당'과 '배척'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를 내렸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
허균(許筠·1569∼1618)은 역모사건과 연루, 당시 표현대로라면 '역적의 괴수'가 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따라서 허균의 유작은 공개적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몰래 필사돼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중에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라는 문집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최원정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김정(金淨)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淸曉巖峯立) /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白雲橫翠微) /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江村人不見) /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江樹遠依依).' 본문중 최원정은 최수성(崔壽山+成·1487∼1521), 정암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일컫고 있고, 김정(1486~1520)은 우리고장 보은출신으로 사약을 받고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세 사람이 한 공간에 등장했고, 또 시화까지 나눴다는 것은 이들 세 사람이 친구 사이를 넘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한다. 조광조와 김정은 본란을 통해 어느정도 소개됐으나 최수성은 처음 접하는 이름이다. 그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