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칠서(혹은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적이 있다. 칠서사건은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 살던 7명의 패거리가 역모를 도모했다가 적발된 것을 말한다.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 7명은 대부분 명문가 서자 출신이었다. 박응서의 아버지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벼슬아치가 되지 못하는 불만을 시와 술로 달랬다. 강변칠우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서 훗날 함께 화를 당한 인물이 있다. 유인발(柳寅發)이다. 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9번 등장하나 신상 정보가 될만한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충주 출신인 것만 확인될뿐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유인발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유랑생활을 하던 '떠돌이 무사'였다. 이런 그가 왜 칠서와 뜻을 함께 하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려 정황상 칠서 우두머리 격이었던 서양갑(徐羊甲··~1613)에게 포섭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록을 보면 서양갑은 역모를 제일 먼저 제의했고, 또 시국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박
상소문(上疏文)은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글로, 봉장(封章), 주소(奏疏), 진소(陳疏)라고도 한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어느 정도 서식을 갖추어야 했다. 겉봉투에는 '上前開折(상전개절)', 또 뒷면은 이어 붙인다는 의미로 '臣署名(신서명)'이라고 표시했다. 조선 명종대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인물로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있다.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1557년 명종 임금에게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린다. 16세기 후반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년전이다. 따라서 상소문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당시 단양 사람들의 생활상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단양은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상소문을 읽는 사람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상소문은 '신은 장구(章句)나 아는 보잘것없는 유자(儒者)로서 경세(經世)하는 재주가 없는데 외람되이 군수의 책임을 맡았으니 잔폐된 고을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책임이 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는 본래 척박해
간신(姦臣)은 공통적으로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또 국법상의 기능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유자광, 임사홍, 이이첨, 윤원형, 홍국영 등에서 이런 모습이 발견된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은 선조~광해군 연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가 관료시절 초기부터 간신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효자였고, 그 때문에 현감재직중 관찰사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상인(喪人) 전 평강 현감 이이첨은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제행이 고결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애경이 지극하였다. 임오·계미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와 계조모가 서로 잇달아 죽었는데 여막에 거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거의 멸성(滅性)할 지경에 이르렀고…"- 왜군이 한반도를 유린하면서 조선 역대 왕의 영정은 모두 불탔다. 그러나 태조와 세조의 영정은 홍여율(洪汝栗)과 이이첨의 결사적인 보존노력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노력이 아닌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첨은 광릉 참봉으로서 봉선전의 영정을 받든 것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첨이 변란 처음부터 피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이번에 적의 불길 속에서 영정을 받들어 내왔
청주가 교육도시임을 주장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망선루(望仙樓)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때 과거시험의 합격자 방이 붙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청주에서 7개월 가량 머문다. 임시수도 생활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봤고, 그 합격자 명단을 망선루에 내걸었다. 근현대기의 망선루는 자주 이전했다. 지금의 중앙공원 망선루는 제일교회측이 부대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청주시에 기증하면서 공원 안으로 이건(移建)됐다. 2천년 밀레니엄 때의 일이다.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인용문에서 보듯 망선루의 본래 이름은 취경루로, '경치를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닌다. 이 누정 이름을 망선루로 바꾼 인물이 한명회(韓明澮·1415∼1487)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7년)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한명회는 청주가 본관이나 여러 정황상
포도청(捕盜廳)은 지금의 경찰청과 같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포도청은 전국적인 기구는 아니었다. 성종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도권을 좌변과 우변으로 나눠,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포도대장이 맡았다. 반면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포도대장이 맡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좌·우변 포도청을 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했다. 전회에 박응서라는 인물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고 거짓 자백했다. 이때 박응서의 형관을 맡은 인물이 당시 좌변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1623)이다. '좌변포도대장 한희길이 아뢰기를, "지난 달에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적괴(賊魁)인 서얼 박응서는 도망갔고 도적 허홍인의 노비 덕남 등을 체포했는데…'- 그러나 그도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였다. 그의 뒤에는 대북파 영수인 이이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이첨이 이를 듣고 희길을 불러 묻기를 "자네가 큰 도적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 실상이 어떠한가" 하니, 희길이 공초(供招)받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선발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지칭한다.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이라는 훈호가 주어졌다. 호성공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1등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 등 2명이 선발됐지만 나머지 등급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대상이 됐던 인물은 정운, 이희득, 심희수, 유몽정등 4인이었다. 특히 심희수와 유몽정은 역할이 비슷, 공신 포함 여부를 놓고 삼정승들이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흔적이 실록에 나타난다. '만일 심희수을 녹공할 경우에 유몽정(柳夢鼎)은 임진년의 성절사로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할 적에 뒤따라갔고, 북경에 도착해서는 정문(呈文)하여 위급을 상고(上告)하는 노고가 있었으니, 유몽정만 유독 빠지게 된다면 미안스러울 듯합니다.'- 파문이 가라앉은 후 유몽정 아들 '영'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공신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는 유몽정이 호성공신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호성공신 최종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시 조정도 "안타깝게 됐다"는
조선 광해군대 여주 한강변에서 강변칠우(江邊七友)를 자처하는 패거리가 서자에게도 관계 진출을 허용해 주도록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강변칠우는 7명의 명문 서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을 말한다. 박응서는 영의정, 서양갑은 목사, 심우영은 관찰사, 이준경은 병마절도사의 서자였다. 이들은 여주의 강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시와 술로써 소일하며,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불만을 토로했다. '칠우'라는 명칭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했다. '칠우'의 본멤버는 아니었지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1618), 이재영(李再榮·1553~1623) 등도 가끔 찾아와 이들과 어울렸다. 1612년에는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하는 강도살인 사건이 발행했다. 이때의 조령이 괴산 사면인지, 문경 사면인지는 분명치 않다. 범인들은 강변칠우였고 이들은 이듬해 모두 검거됐다. 제도 불만이 악행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직전의 조정은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후계 문제로 분열했다. 대북파는 광해군,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했다. 당시 대북파의 영수였던 이이첨(李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다. 게다가 분조(分朝)의 경험까지 있어, 그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은 당연시 됐다. 선조의 분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신의 유고를 대비해 그렇게 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 자신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설이다. 임진왜란이 종전되자 광해군의 왕위계승 환경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이와 같았다. 선조는 광해군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제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안감은 증오심으로 발전했다. 선조는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게 악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하자 선조는 바로 후처를 맞이했다. 그가 바로 인목황후 김씨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 50세, 인목황후는 19살이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분격적으로 불거졌다. 얼마안가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영창대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다. 선조는 신임하던 일곱 신하에게 영창군의 뒤를 유명(遺命)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윤형원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을 공격, 이로 인해 사림이 크게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도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유배를 가야 했다. '노수신과 정황은 본래 못나고 망령된 사람인데 헛된 칭예(稱譽)를 내세우며, 부박한 무리를 고무 선동하여, (…)사습의 궤격함을 빚어내어서 시사(時事)를 분란하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울러 멀리 유배시키소서" 하니…'- 그가 유배생활을 하던 1546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벽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의 내용은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잔여 윤임 일파를 완전 숙청했다. 이 사건 역시 소윤이 잔여 대윤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노수신은 여기에도 연루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송인수·이약빙은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는 극변안치 하고, 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은 절도안치 하고 (…) 윤강원·조박·안세형·윤충원·안함은 부처하고자 한다.'- 인용문 중 극변안치는
1589년 정여립(鄭汝立·1546 ~ 1589)이 모반을 꾀했다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표변했다. 율곡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인을 비판했다. 이후 전북으로 귀향,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그해 황해도 관찰사, 안악 군수 등이 정여립이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반란을 시도, 선조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의 토굴에서 자결했다. 혐의자에 대한 국문에 2년의 시간이 걸렸고, 이때 형관을 맡은 사람은 정철이었다. 기축옥사로 동인 1천여명이 희생됐고, 한때 전라도는 반역지향(叛逆之鄕)이라 하여 인재 등용이 제한됐다. 기축옥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여립의 반란으로 규정됐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서인의 책사였던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의 집단 조작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혼재하고 있다. 기축옥사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다. 또한 그는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기도 했다. 한백겸도 체포
영동군 양강면 두평리 561번지에 자풍서당(資風書堂)이라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 대청이 자리잡고 있어 시원스러움이 느껴지는 18세기 건물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유교건축물 내에 불탑이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8호로, 공식 명칭은 '두평리 5층석탑'이다. 1989년 지하에서 발굴된 이 석탑은 신라말~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풍곡사(風谷寺)라는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이 폐지되고 유교 건축물이 세워졌다. 종교간에도 역전과 반전이 있었던 셈이다. 자풍서당의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모양이다. 주변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닭까지 잡아 주고 또 건물 아궁이 주변이 불에 끄슬려 있다고 최근 언론에 보도됐다. 자풍서당할 때의 '자풍'은 자법정풍(資法正風)에서 딴온 말로, 광해군 65년(1614) 정구(鄭逑)라는 인물이 작명했다. '資'는 명사로 쓰이면 재물을 뜻하지만, 술어로 사용되면 '헤아리다', '바탕으로 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자법정풍은 '법을 바탕으로 해서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 된다. 조선시대 예학을 논할 때 좌우에 나란히 위치하는 인물이 김장생과 정구다.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운 채 벽을 비우고 2층에는 마루를 깐 건축물로,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지면서,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의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선사상은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둘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충북에도 유명한 누정이 적지 않다. 지명도가 높은 누정으로 제천 청풍의 한벽루(보물 제528호)와 영동 황간의 가학루(도유형문화재 제 22호) 등이 있다. 청풍 한벽루는 물가, 가학루는 추풍령 바로 밑의 영로(嶺路) 변에 위치하고 있다. 가학루는 조선 태종 3년(1403)에 당시 황간현감 하담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