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황새가 밀렵꾼 총에 희생된 것은 지난 1971년 4월이었다. 그 이전까지 음성 생극에 황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특종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六·二五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황새가 다시 충북 음성군에서 서식하고 있음이 본사 천연기념물실태조사반에 의해 확인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특종은 한 독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아일보는 이 부분을 '이번 황새의 번식을 확인하게 된 것은 독자 윤용진 씨가 본보에 연재해 온 천연기념물 보호캠페인 기사를 읽고 자기의 고향에 황새가 있다고 본보에 알려와 본사 천연기념물 생태조사반이 두차례에 걸친 답사 끝에 황새를 촬영하는데 성공한 것이다'라고 썼다. 계속해서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황새 번식지로는 충북 진천군 이월면과 음성 대소면이 천연기념물 황새번식지로 지정되었으나 이미 六·二五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이곳 생극·금왕 일대에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몇년후 한 언론인은 황새 특종기사를 소재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특종 순간의 희열이 잘 표현돼 있다. '학계의 도움의 받아 그것이 (천염기념물) 199호임을 확인하고 촬영에 성공해서 사진특종을 보도한 것이 P
황새의 본래말은 '한새'로 이때의 '한'은 '크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황새는 '큰 새'라는 뜻이 된다. 황소할 때의 '황'도 본래는 '한'으로, '큰 소'라는 의미다. 황새는 우리나리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였다. 때문에 그림이나 자수의 주요 소재가 됐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는 '송단(松檀) 황새' 또는 '관학(관은 觀의 見대신 鳥)'이라고 불렀다. 옛문헌에도 황새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고려 문호로 일컬어지는 이규보는 '사평강(沙平江) 가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시에서 황새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돛 내린 강어귀에 오래도록 머뭇거리면서/ 맑은 물결 굽어보며 말없이 수염만 만진다 / 언덕에 우거진 풀 겨우 황새 숨을 만하고 / 갯가에 오는 밀물 오리를 마중하는 듯…'- 참고로 '東國은 '고려', '李相'은 '이씨 성을 가진 재상' 즉 이규보 자기 자신을 일컫는다. 세종실록에 큰 새와 뱀에 얽힌 얘기가 쓰여 있다. 이때의 큰 새는 역시 황새를 의미한다. '북방 야인 지방에 사람 천만 명을 잡아먹은 뱀이 있는데, 사람의 피가 뱀의 창자 속에서 단단히 엉키어 돌이 됩니다. '관(황새 지칭) '이라고 부르는 큰 새가 있어서, 그 뱀을 잡아먹고 그 돌을
상소(上疎)는 대략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나 말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소로는 최만리의 한글반대가 가장 유명하다. 갑자년에 있었선 상소라고 해서 이른바 '갑자상소'라고 한다. 전회에 우리고장 괴산 인물 전유형을 설명한 바 있다. 그도 괴산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임금께 상소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용기와 배포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로 들어가 우리고장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왜군 방어를 위한 책략 10여조를 선조 임금에게 상소했다. '괴산 유생(儒生) 전유형(全有亨)이 군국(軍國) 어왜(禦倭)에 대한 일 10여 조항의 방략을 상소하니, 상은 이를 깊이 받아들이고서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상소를 보건대 학식이 해박하고 병기(兵機)까지 통달하여 근래의 다른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초야의 기사(奇士)가 아니겠는가'"- 실록에 상소 10여조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있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다. 그러나 전란 중의 선조는 이 상소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말만을 잘한 경우가 대부분 많다. 그러나 이곳으로 불러다가 일을 맡겨 보고 그의 말을 들어 재주를 시
서양의학은 해부학에서 출발했다. 서양의학의 원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뼈, 근육, 힘줄의 구조와 기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비해 동양의학은 기(氣)를 중시하다 보니 해부학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살을 간단히 째는 종기 치료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서면 흐름은 달라진다. 실학을 중심으로 '우리 몸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해부학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이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李瀷·1681∼1763)이다. 그는 성호사설 제 15권의 인사문(人事門)에서 '오장도'(五臟圖)라는 글을 남겼다. 오장도는 인간의 몸에 들어 있는 5개의 장기(臟器)인 간장(肝腸), 심장(心腸), 비장(脾臟), 폐(肺), 신장(腎臟)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 남자가 생각하기를, "누이동생 하나를 죽여서 천만 명의 목숨을 살림이 옳겠다." 하고 드디어 배를 가르니 간(肝)과 격막(膈膜)이 모두 썩었는데, 앵도 씨가 엉켜 살이 돋아났다. 이에 간을 보호하는 처방은 얻었으나, 그 천만 인을 살린다는 공덕이 한 누이동생을 죽인 죄악을 속(贖)하지는 못할 것이다.'- 해부학적인 일, 즉 '사람의 배를 갈라 천만인의 목숨을 얻으면 얼마
전회에 조선이 명나라측의 잘못된 이성계 족보를 고치는데 무려 2백년 가까이 걸렸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선 조정은 그만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조선 중기의 중종 임금도 곧 남곤·이자 등을 명나라에 파견, "태조(이성계 지칭)의 세계(世系)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했다. 그에 앞서 중종은 대신들과 명나라에게 줄 선물을 직접 논의했다. 창업주(이성계) 족보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선물은 과거와 확연히 달랐다. 그 양이 푸짐하고 다양했다. '은보 등이 서계(書啓)하였는데, 공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面), 백세면포(白細綿布) 10필, 흰 세모시(白細苧布) 8필, 여섯 폭 유석(油席) 3장, 견면지(繭綿紙) 1백 장을, 화 사신과 설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 백세면포 5필, 흰 세모시 5필, 여섯 폭 유석 3장, 견면지 60장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선물을 잔뜩 받았으면서도 족보 오류는 바로 잡지 않았다. 그러자 안달이 난 조선 조정은 유보, 권벌, 조사수, 김주, 이후백·윤근수, 홍성민 등 사신을 릴레이 식으로 보내 오류 수정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그때마다 "고치겠다"는 언약만 할 뿐 계속 뜸을 들
명나라는 조선건국 초기부터 무려 선조 임금대까지 정확하지 않은 이성계의 족보를 기록했다. 당연히 조선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이의 수정을 요구했다. 양국을 오랫동안 불편하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둘은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고해받쳤다. 그 뒤 명나라는 이들의 말을 믿고, 자국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 조정이 이성계의 족보가 명나라 사료에 잘못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어업권 분쟁이 있었다. 이때 명나라가 항의한 문서에 '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 금명단자운운)라는 내용이 서술돼 있었다. 풀이하면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 정도가 된다. 명나라에 있어 이성계 족보는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직지(직지심체요절)는 고려우왕 때인 1377년 청주목 교외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서를 말한다. 그러나 1377년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과 60여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는 이 시기들어 지식보급에 대한 필요성이 대중적으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는 뜻글자인 한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훈민정음은 소리글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IT 최강국 한국의 밑걸음이 됐다. 청주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직지를 간행했다는 점은 한번쯤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왜 다른 곳도 아닌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을까. '불경은 사찰에서 필요한 것이니까'라고 답을 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만점은 아니다. 고려 전기에는 관청수공업이 발달했다. 반면 후기에는 사원(절) 수공업이 성했다. 이와 관련해 고려 후기가 되면 사찰이 전국토의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사원경제가 급팽창한다. 고려 사찰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면세 혜택을 받았다. 여기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다퉈 토지 기탁을 하면서 고려의 사원경제는 날로 비대해졌다. 고려 사찰은 이같은 시대흐름 하에서 장인들을 대거 고용, 국가
조선시대 벼슬 중에 '사또'(혹은 원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또는 정식 벼슬이름이 아닌 '수령'(守令)을 달리 불렀던 표현이다. 수령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준말이다. 이중 군수가 다소 높아 종4품, 현령은 종6품의 품관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을 원님 중 가장 낮은 품계는 현감으로, 보통 종6품의 벼슬을 지녔다. 조선시대 원님은 지금의 시장, 군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수령은 왕이 임명하고, 사법·군사·행정권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시장과 군수는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행정권만 행사하는 점이 다르다. 고을 원님들의 임기는 보통 2년으로, 관찰사 1년보다는 다소 길었다. 이때 고을 원님 가족이나 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임지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원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기생 이야기가 뒤따른다. 우리가 춘향전에서 읽었듯이 남원 사또 변학도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른바 기생 점고였다. '점고'(點考)는 명부에다 일일히 점을 찍어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기는 관에 속한 관물(官物)로 여겨졌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열녀춘향수절가'는 점고 끝에 수
조선시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애주가로 단연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있다. 그의 애주가적인 진면목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일컬어지는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잘 드러난다.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 꽃꺽어 산(算)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줄이어 매여가나 /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울며 예나 /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 우거진 숲에 가기 곧 가면 /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편의상 고한글체를 현대문으로 고쳐 실었다. 인용문중 '산(算)놓고'는 술잔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유소보장(流蘇寶帳)'는 화려한 상여를 일컫고 있다. 애주가 정철의 진면목은 유물로도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선조 임금은 정철이 술을 너무 좋아하자 '하루 석잔만 마시라'는 권고의 의미로 은배(銀盃)를 하사했다. 그 은배가 지금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의 송강정사에 전시돼 있다. 손잡이가 달린 이 은배는 복숭아 모양으로 잔받침도 갖추고 있다. 선조 때는 사림이 동인과
조선시대 국청(鞠廳)은 모반, 대역죄 등 국가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되는 특별 재판정을 말한다. 이 국청은 죄질에 따라 친국(親鞫)·정국(庭鞫)·추국(推鞫)·삼성추국(三省推鞫)으로 다시 세분됐다. 친국은 국왕이 참석해 친히 심문하는 것으로 위험에 대비해 왕궁을 호위하고 진행했다. 설치 장소는 경희궁, 창덕궁, 금위영이었다. 정국은 친국과 대체로 같으나 왕명에 의해 13~ 23인의 국문관이 동석했다. 설치 장소는 보통 병조나 의금부였다. 추국은 국문관이 10인 내외로 다소 적은 편이다. 필요에 따라 친국 또는 정국을 추국으로 바꾸어 계속하였다. 삼성추국은 모반보다는 강상(윤리죄) 죄인을 심문하는 경우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중에서 왕명으로 지명된 8인의 국문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 죄인은 형조에서 이미 심문을 마쳤기 때문에 삼성추국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만 조사받았다.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인 권섭이 송시열의 사사 등 정치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으로 낙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아들 권진성을 정치적 사건으로 잃은 슬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종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경종은 소론의 세를
조선시대 선비들은 정주개념 외에 별장문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 아홉구비를 뜻하는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각 구비마다 시를 지었다. 주자가 설정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그 기원으로,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구곡시는 우리고장 괴산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구곡은 좁은 수계가 아닌, 넓은 곳에 설정되기도 한다. 제천~청풍 일대에도 구곡시가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 영조 때 제천 인물인 권섭(權燮·1671∼1759)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그는 1곡부터 9곡까지 지역 순에 따라 각각 한 곡마다 시조 1수씩을 지었다. 각 곡명은 1곡 대암(對岩), 2곡 화암(花岩), 3곡 황강, 4곡 황공탄(皇恐灘), 5곡 권호(權湖), 6곡 금병(錦屛), 7곡 부용벽, 8곡 능강(綾江), 9곡 구담 등이다. 이중 황공탄은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지면상 제 8곡가인 능강만을 소개하면 '八曲이 어드메오 綾江洞이 맑고 깊어 / 琴書 사십년의 네어인 손이러니 / 아마도 一室雙亭의 못내들겨 하노라'라고 썼다. 혹자는 8곡에 대해 시각과 청각의 회상적 결합에 있다.
여울은 하천 바닥이 경사를 이뤄 물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백과사전은 보다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굵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여울이 형성되는 하천은 지형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유년기(幼年期)에 속하며, 대륙의 구조평야를 흐르는 하천에서는 일반적으로 보기 드물다'라고 쓰고 있다. 조선말기 인물로 이유윤( 李裕元·1814~1888)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인물로, 대원군의 등장과 퇴진에 따라 좌천과 복권을 반복했다. 그는 고종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는 총재관 자격으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편찬을 주도했고, 대한제국기 전인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기도 했다. 그는 다재다능해 조선의 역사, 지리, 시문, 제도 등을 다룬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쓰기도 했다. 이 문집은 같은 시기 백과사전류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종종 비교된다. 그는 이 문집에서 '호서(湖西)의 네 고을'이라는 소제목으로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