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가거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이다. 전체 넓이는 9.18㎢다. 해안선 길이는 22km로 아주 짧다. 그 안에 신안군 최고봉인 독실산(639m)이 있다. 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독실산 정상에서 바닷가까지는 가파르다. 그곳까지 흘러내린 산줄기는 짙푸른 상록수림이다. 그 덕에 사시사철 식수가 풍부하다. 서북쪽 해안에 위치한 항리 마을에는 섬등반도가 있다. 가거도에서 가장 독특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하다. 섬등반도는 천혜의 전망대다. 초원에 서면 가거도의 절반 이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하늘과 맞닿은 독실산 정상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멋진 해넘이가 선물하는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감상할 수 있다. 태양보다 더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에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는다. 신안 제일의 홍도 못지않다. 관광자원과 해안 절경도 많다. 홍도의 풍광은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여성미다. 가거도는 굵고 힘찬 남성미를 풍긴다. 독실산 정상, 장군봉과 회룡산, 돛단바위와 기둥바위, 병풍바위와 망부석, 구정골짝, 소등과 망향바위, 남문과 고랫여, 국흘도와 칼바위 등 가거도 8경은 홍도 33경에 못지않다. 사람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조선을 협박했다. 일본 승려사신 겐소(玄蘇·?~1612) 임란전 조선을 자주 찾았고, 강화회담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직업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겐쇼는 임란 1년 전 일본통신사 경험이 있는 김성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겐쇼는 이어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외교적인 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왜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많이 거주했던 부산에서는 임란 발발 1년전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실록이 적었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원인으로는 도요토미가 조선 도자기를 탐을 내서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영토 획득설이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해서 획득한 영토를 다이묘(大名·지방영주)와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들은 그 같은 은전 때문에 주군인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자 이같은 메카니즘이 작동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영토를 외국, 즉 조선에서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에 쓰여 있다. "일(조선침략 지칭)이 순조롭게 달성되면 새로운 정복에 의해 회득된 諸國, 봉록, 유리한 영지를 줄 것이며 너희는 많은 즐거움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실제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화친회담을 갖게 되자 7가지 요구를 하게 되고 그 안에 조선 4도 할양론도 들어 있다. 이때의 4도는 대체로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 실록에도 "급기야는 땅을 할양(割讓)하고 쌀을 바치는 일로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공갈하고 있으니"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천황 후궁으로 명나라 황녀를 보낼 것, 조
강릉 바우길은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길'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길은 한사람이 걸으면 적당했다. 그래서 참가자들 한사람씩 차례로 줄지어 걸었다. 그 때문일까. 참가자들의 말수는 적었고, 조용히 숲의 소리와 소나무 내음에 집중했다.태양 볕이 불처럼 뜨거웠고, 비오는 듯 흐르는 땀을 닦아줄 바람한 점 없었던 날이었음에도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에 덕분에 참가자들은 지긋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이 교감을 한 순간이다. 29일 51회 클린마운틴 참가자들은 강릉에 바우길을 걸었다.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코스로 총 150km다. 바우길은 강릉바우길 14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구간 울트라바우길 계곡바우길로 이뤄져있다. 참가자들의 여정은 명주군 왕릉에서 시작했다. 명주군 왕릉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5대손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묘다. 야트막한 산에 모셔진 왕릉을 둥그렇게 소나무들이 감싸 안은 모습에서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왕릉을 시작으로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금강소나무 기둥에 굵직하게 패인 마디마디가 모진 세월을 그대로 보여줬다. 클린마운틴에 여러 차
충주 달천의 어원에 대해서는 전회에 수달이나 단물 관련설을 언급한 바 있다. 전자는 과거 달천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했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후자는 과거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가 변한 말일 수도 있는 '단' 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다. '단월동', '단호사'(丹湖寺), '물개달래'(달천리 서쪽 물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달천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달천 혹은 덕천(德川)이라고 한다.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인용문 중에 이행(李荇·1478∼1534)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러나 이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서술했던 지명인 충주 달천 주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이를 가
조선시대에는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돼 군량을 충당하던 토지를 둔전( 屯田)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경비 보충을 위해 관청에서도 설치했다. 전자는 국둔전, 후자를 관둔전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당초 취지와 달리 민전(民田)의 침탈, 농민 노동력의 강제 동원 등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런 둔정이 긍·부정을 떠나 크게 황폐화됐던 적이 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물러가고 나라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자 둔전을 재설치하는 문제가 급부상했다. 이때 이른바 '둔전 전문가'로 등장한 인물이 윤조원(尹調元·1572∼1637)이다. 그는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야(沃野)의 수로를 개통시킨 일로 가자(加資)된 적이 있다. 가자는 특별 진급의 일종으로, 정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다. "전주(全州)의 옥야(沃野)가 40여 리인데 5일 안에 그 쌓인 찌꺼기를 파내어 수로를 개통시키는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더욱 큽니다. 도감 낭청 심곤(沈·)과 차사원 익산 군수 윤조원(尹調元)을 강인(姜絪)의 예에 따라 논상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조원은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할 때 이이첨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