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형벌을 얘기할 때 태형과 장형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둘은 죄인을 체벌하는 것은 같으나 강도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태형의 '태'는 한자 '매질할 태'(笞) 자로 '대죽변'이 붙어 있다. 바로 둔부를 노출시킨 후 회초리로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장형할 '장'은 '지팡이 장'(杖)자로 '나무목' 변이 붙어 있다. 즉 장형은 커다란 몽둥이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태형이나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의 모습이 달랐다. 방금 둔부를 노출시킨 후 매질한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남자는 둔부를 완전히 노출시켰으나 여자 죄인은 홑겹의 옷을 입게 했다. 그런데 홑겹의 옷을 입게 하자 여자죄수 사이에서는 몰래 여러 겹의 옷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의 기생 '내한매'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잔치를 베풀 때에, 잘 아는 음악을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대답하므로, 형조에 내려 처벌하게 하였는데, 곤장을 맞을 때에 치마 속에 모피를 몰래 감춰 둔 것이 참의에게 발각되어…'- 장형의 종류 중에는 '난장'(亂杖)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빙 둘러 돌아가면서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조선시대 옥에 갖힌 죄수들은 야간에는 통 2개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나졸들이 넣어준 통 중 큰 것은 대변용, 작은 것은 소변용이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시대 옥의 이같은 환경을 크게 비판했다. 다산은 조선옥의 열악한 환경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섯 가지 고통이라는 뜻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갈취)을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갖혀 있는 고통 등을 말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옥하면 참수형을 집행하던 망나니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에서는 백정을 망나니로 삼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따라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대신, 이들을 망나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이런 망나니에게도 뇌물이 건네지는 경우가 있었다. 사극을 보면 죄인을 꿇어앉힌 후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윤보라는 인물이 그린 '형정도첩'이라는 그림을 보면 죄인을 땅을 보고 눕게 한 후 망나니가 목 위에서 칼을 내리쳤다. 이때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갑오경장 무렵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말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전옥서(典獄署)라는 관청이 이 조선시대 옥을 총괄했다. 그러나 전옥서라는 명칭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개국 직후부터 벌써 그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 조선시대 옥에 대한 정보는 문헌 외에 의외로 고지도에 다수 남아 있다. 구한말이 되자 서구열강 세력이 밀물 듯이 몰려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흔히 말하는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로, 달리 사또 또는 원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행정, 군사 외에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군현 주변에는 옥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872년 군현지도에는 청주와 충주목 그리고 영동·청산·청풍현 등 5개 목현에만 옥이 그려져 있다. 왜 이같이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우리고장 진천출신 이영남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는 그날의 전투가 생각보다 격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이 이시언(李時言·?∼1624)이다. 현재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고건축으로 여수 진남관과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등이 남아 있다. 바로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진남관은 국보 제 324호, 충민사는 사적 제 3891호로 지정돼 있다. 그는 또 삼도수군의 사령부를 가배량(加背梁·현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이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 시민들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을 '충무'에서 '통영'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시언이 수군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안으로 가기 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병사'는 지금으로 치면 향토사단장 쯤이 된다.
청주-조치원 사이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4월이었다. 그러나 첫 영업자는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 織居加一이었다. 그는 경무부 허가를 받아 매일 2회씩 청주와 조치원 구간에 영업용 승용차를 운행했다. 이후 이 일본인은 재미를 봤는지 '조선자동차운전회사'라는 여객운수회사를 차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미원,진천 등에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영업용 자동차를 배차했다. 청주-충주간은 처음에는 여객의 왕래가 적어서 승객의 수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승객이 점차 늘면서 짝수일에 1회씩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청주 연혁지'(1923년 출간)를 쓴 오꾸마쇼지라는 일본인은 책에서 청주-조치원 신작로와 함께 주변도 설명했다. 그 내용이 다소 이채롭다. '고문경찰시대에 조치원 도로가 개수되어 겨우 도로다운 형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는 하나의 당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에 덕망이 높은 인격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우의 비석은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당우와 당우의 비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의동에 위치한 송상현 사당과 신도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전회에 경부선 역이 한적한 마을인 조치원에 들어서면서 조치원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조치원은 청주와 사이에 신작로 개설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신작로(新作路)는 말 그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새롭게 낸 길을 이르는 말이다. 소설가 박태순은 '무너지는 산'에서 신작로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냇물은 이제 그 양편에 축대를 쌓아 하수천이 되었고 소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오솔길은 자갈로 다져진 신작로가 되어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신작로가 바탕이 된 지금의 청주-조치원 국도는 비교적 반듯한 편이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치원과 청주를 잇는 신작로 노선으로 2개 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지금의 노선이고, 또 하나는 미호천 둑을 따라 보다 북쪽으로 청주를 연결하는 안이었다. 일제는 검토 끝에 지금의 노선을 택하고 1910년 10월 신작로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에 완공했다.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의 구한말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불문가지였다. 이방인의 눈에도 조선의 길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생긴 길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가 1890년대 한국을 찾아 이런 기행문을 남겼다. '한국의 도로는 인공적
보은 회인은 지금은 면(面) 단위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때는 현(縣)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행정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대전시 회덕에 짧은 기간 예속된 적이 있다. 회덕, 회인할 때의 '회'는 한자 '품을 懷'(회) 자다. 두 지역의 지명을 직역하면 회덕은 '덕을 품는다', 회인은 '인을 품는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른바 유교식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지역이 한때 친족 관계였던 것을 의미한다. 실록 지리지에 그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가 회인으로 고치어, 현종 9년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회덕 감무로써 회인을 겸임하였다."- 인용문 중 '회덕 감무로써 겸임했다'는 뜻은 회인이 회덕 현감의 행정적 지휘를 받은 것을 뜻한다. 회인은 이같은 부침을 무릅쓰고 부군 통폐합 조치가 있던 지난 1914년까지 현의 지위를 유지했다. 회인에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성이 있다. 호점을 글자 그대로 풀면 '호랑이 고개'라는 뜻이 된다. 구한말까지 호환(虎患)이 존재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방입구에 그물을 치고 잘 정도였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은 회인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는 아직
조치원을 가리켜 흔히 '충북같은 충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만큼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이 많고 역사적으로도 청주와 인연이 깊다. 지금의 전의지역은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목 소속이었고, 연기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청주에 영속된 사례가 있다. 봉수도 청주의 것을 받았다.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용수산(龍帥山)이다.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에,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에 응한다.'- 최근 조치원에서 '조치원역'을 '세종역'을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조치원도 당연히 세종시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개명을 통해 조치원역을 세종시의 관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은 연기군청이 조치원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연기현 치소는 지금의 조치원읍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했다. 조치원읍에서 남쪽 삼십리 되는 곳에 연기군 남면 연기리가 있다. 바로 이곳에 연기현의 치소가 위치했다. 역사도 비교적 오래 돼 백제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이곳의 현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그리고 조치원에 역이 생기면서 군청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경상우수영는 원균(元均·1540∼1597)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왜수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심하자 배를 불태운 후 육지로 도망하려 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원균을 붙잡아둔 인물이 부하 이운룡이다. 그는 원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수는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원균을 결국 경상우수영을 버리지 못했다. 대신 이운룡의 건의대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대 진영의 전체 동의가 있어여만 가능한 연합함대 구성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때 양진영을 오가며 청병사절 역할을 한 인물이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다.
우리고장 진천에서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는 상산임씨다. 중시조는 임희(林曦)는 고향에서 이름을 딴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지기도 했다. 많이 알고 있듯이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따라서 지금고 상산임씨와 진천임씨라는 표현이 함께 쓰이고 있다. 상산이 진천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은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 처음 등장한다. 비문에 '상산의 혜각(慧覺)은 진주(지금의 진천)의 김(金)'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혜각이라는 스님이 진천 상산의 어느 절에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산은 이후 고려사, 세종실록 등 여러 지리지에 자주 등장한다. '충경왕 10년 기사에 또 지의령군사로 승격시켰다가, 임연(林衍)이 베임을 당하게 되매, 진주 감무로 강등하였고,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상산(常山)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은 그 읍치를 정할 때 풍수적인 원리를 철저하게 따졌다. 따라서 당시 각 고을은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있고 그 사이를 하천이 흐르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때의 안산은 '책상다리 案' 자로 무릎을 꿇고 주산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청안은 현(縣) 즉 지금으로 얘기하면 군청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청안은 지금은 일개 면소재지에 불과하나 구한말까지도 현세가 비교적 당당한 편이었다. 얼마전 음성현이 한때 청안현에 예속된 적이 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정도였다. 이것 외에도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개편되기 전까지 지금의 증평읍을 비롯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 그리고 지금의 오창읍 일부 등도 모두 청안현에 속했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증평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의 지위를 잃고 괴산군에 편입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바로 청안면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14년은 우리나라 행정사에서 가장 굵은 마디가 형성된 해가 된다. 이 해에 청안군 읍내면과 동면 전부 그리고 북면의 일부가 합쳐져 괴산군 청당면(淸塘面)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17년에 그 이름이 청안면(淸安面)으로 바뀌었다. '청안'이 한 때 '청당'으로 불려진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청안현'을 이렇게 적었다. '청당현(靑塘縣)은 고려 초에 본래 청주(淸州) 임내에 붙여 일명 청연(靑淵)이라 하였는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
도내 기초단체의 막내는 증평군(曾坪郡)이다. 2003년 8월 30일 군청이 정식으로 개청됐다. 지금의 증평지역은 고려시대에는 도안현,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주로 청안현에 속했다. '증평'이라는 지명이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이었다. 일제는 이때 청안군 일부지역과 청주군 산외이면 일부지역을 합쳐서 '증평면'이라는 새로운 면을 만든 후 괴산군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올해로 98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증평이라는 행정지명은 의외로 '증'과 '평'이 두 글자가 합성된 지명이다. 먼저 증평할 때의 '증'은 현 삼기천(三岐川)의 옛이름인 증자천(曾子川·혹은 증천)에서 유래했다. 증평군 동편 하천인 증자천은 초정고개, 송오리고개, 반탄천 등 세 갈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름이 삼기천이다. 이 삼기천은 여지도서나 대동지지에는 한자 '일찍이 曾', '아들 子'인 '증자천'으로도 표기돼 있다. 증평 할 때의 '증' 자는 여기서 왔다. 나머지 '평' 자는 들(野)과 관련이 있다. 증평에는 '장평리'라는 마을이 있다. 순우리말로는 '장뜰'이라고 한다. 증평할 때의 '평'은 바로 '장평'할 때의 뒷말 '평'에서 유래했다. 장뜰 할 때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