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이 말티고개에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말티고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꼬부랑 길'이다. 말티고개의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관료는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로, '신념적 친일파'라고 불릴 정도로 친일의 행각이 뚜렷하다.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한 박중양이 말티고개 확장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데는 유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작용했다. 1923년 4월 17일자 기사에 의하면 박중량은 도내 순시를 이유로 화양동 등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역시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는 말티고개 입구에 이르러 소를 끌어오도록 명령했고, 그 이유는 "도지사인 내가 어찌 흙을 밟을 수 있느냐"였다. '당대의 일도 소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내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는지 박중양 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박중양은 바로 이
옥화구곡은 여름철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남한강 상류인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보은군 내북면 봉황리 수계변에 설정돼 있다. 구곡은 이름 그대로 곡(曲)이 9개가 설정되는 것이 보통으로 각 곡마다 작명한 지명과 함께 시가 뒤따르고 있다. 옥화구곡에도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제 1곡 만경대(萬景臺)→2곡 후운정(後雲亭)→3곡 어암(漁巖)→4곡 호산(壺山)→5곡 옥화대(玉華臺)→6곡 천경대(千景臺)→7곡 오담(鰲潭)→8곡 인풍정(引風亭)→9곡 봉황대(鳳凰臺) 등 구곡이 설정돼 있다. 9곡 가운데 8개는 해당 지점의 자연경관 특징을 반영해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제 2곡 후운정 만큼은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다. '후운'은 조선 선조~숙종 연간의 홍석기(洪錫箕·1606∼1680)라는 인물로, '최치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치원(崔致遠·857∼?)은 통일신라 말기를 살았고, 그가 남긴 문장에는 천재성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육두품 출신으로 신분 상승의 한계를 절감했고,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남 불우(不遇)을 탓하며 산천을 주유했다. 홍석기가 옥화구곡 제 2곡에 정자를 세우고 이를 '후운정'으로 명명한 것은 자신도 최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왜의 수군이 남해를 새까맣게 뒤덮으며 몰려오자 배를 스스로 침몰시킨 후 육지로 도주하려 했다. 이를 중간에서 "그러면 안 된다"며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협력을 건의한 인물이 그의 참모이자 우리고장 진천 출신인 이영남(李英男, ?~1598)이었다. 원균은 이영남의 의견을 수용, 전열을 정비한 후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연합해 옥포, 당초 등의 해전에서 잇따라 이겼다. '승리'라는 전리품이 들어오자 두 사람 사이에 '공다툼'이 일어났다. 그 결과, 원균은 1594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로 전출됐다. 당시 절도사가 머무는 병영(兵營)은 우리고장 청주에 있었다. 원균은 왜군이 다시 북상할 것으로 예견하고 청주지역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흔히 상당산성(사적 제 212호)은 조선 숙종 때 전면적인 보수를 해 석성(石城)으로 수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보다 앞서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인물은 원균이었다. 그는 이때 청주고을 주민뿐만 아니라 충북 전역의 백성을 징발됐다. "병사(兵使) 원균(元均)은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성을 쌓을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기 직전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崇禎帝)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실 것을 당부했다.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 등 노론계 인물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했다. 만동묘의 '만동'은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글자다. 그 뜻은 만 번을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양자강·황하 등 중국의 강은 서쪽이 높기 때문에 동쪽, 즉 우리의 서해로 흘러든다. 선조는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忠)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에서 만절필동의 새겼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20여만명의 대군을 파견,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준 인물로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일어서게 도와준 은혜)'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의 위패가 모셔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반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은 임진왜란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만동묘에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
조선 중기 윤임(尹任, 1487~ 545)의 집안에서는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중종의 제1 계비가 됐다. 반면 윤원형(尹元衡) 집안에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중종의 제2 계비가 됐다. 당시 세간에서는 외척의 반열에 오른 두 집안을 빗대 윤임은 '대윤', 윤원형은 '소윤'이라고 일컬었다. 1545년(명종 즉위) 소윤이 대윤을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소윤 윤원형은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의기투합, 윤임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윤임은 실각, 귀양을 가던중 살해됐다. 살해된 장소가 공교롭게도 우리고장 충주목 어디쯤이다. "윤임은 자는 임지(任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정미년에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찬성에 이르렀다. 을사년에 남해(南海)로 귀양 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사사(賜死)되니 나이는 59세였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기록정신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이 같은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그런 《연려실기술》은 을사사화의 발생 배경을 좀 다르게 적어놓고 있다. 대윤
[충북일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지도 가운데 '1892년 군현지도'(혹은 〃 지방지도)가 있다. 흥선대원군으로 상징되는 19세기말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로, 서양 기운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866년(고종 3) '서세'는 한반도 서해안에도 출현하였다. 미국 제너널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안 도민들의 장마철 화공(火攻)을 받고 침몰했다. 당시 평안관찰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개화파의 비조가 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6)였다. '쇄국'(鎖國)은 나라에 빗장을 지른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병인양요(1866) 이후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기 위해 포수(砲手)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수부대는 수도 한양과 병인양요가 일어난 강화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됐으나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 아버지) 묘 도굴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내륙에도 배치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황간면 일대로, 백두대간 추풍령 이북이 여기에 속한다. 당시 흥선대원군 정부는 추풍령 이북에도 포수부대를 배치하고, 일대를 '포수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고려와 몽고는 처음에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두 나라는 압록강 유역의 거란군을 토벌하는데 군사적으로 협력하였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하는데 성공하자 과도한 조공을 요구했고, 여기에 몽고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피살되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고려 고종 8년(1231)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이 1차 침입을 하였다. 당시 실제 권력자 최우(崔瑀, ?~1249)는 고종에게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자 김세충(金世沖, ?~1232)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김세충: 송경(개경)은 태조 때부터 역대로 지켜온 것이 무려 2백여년이다.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있는가? 최우: 그렇다면 왕성을 지킬 비책이라도 있는가? 김세충은 머뭇거리며 즉답을 하지 못했다. 무신 최우는 김세충을 끌어내 목을 베고 강화도 천도길에 올랐다. 그는 운반 수단이 마땅치 않자 나라 세곡(稅穀)을 나르는 수레 1백량을 동원해 자기 집안의 물건을 강화도로 옮겼다. 그는 백성들에게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이때 장맛비가 열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5년만에 조선과 왜(일본)는 국교를 재개하였다. 열도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를 통해 "국교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선조 40년(1607)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는 여우길(呂祐吉, 1567∼1632),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은 1607년 1월 12일 궁궐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고, 그러자 선조는 간단한 술과 함께 말안장, 정남침(定南針 나침반)을 하사하였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경섬은 한강의 어느 촌락에서 통신사로서의 첫밤을 맞았고, 이때 선조의 국서를 살펴봤다.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禍亂)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병자일기》는 문신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남평조씨가 쓴 일기로, 병자호란 전후의 농촌 현실과 노비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병자일기》 속의 남평조씨 생활은 대략 난중피란기(1636년 12월 15일~1637년 2월 17일), 서산·당진체류기(1637년 12월 18일~1638년 1월 25일), 충주 이안 체류기(1638년 1월 26일~5월 28일), 서울 귀환기(1638년 5월 29일 이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안은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에 해당한다. 이런 《병자일기》는 국문학적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병자일기》는 해서체의 난필에 띄어쓰기가 안 돼 있어 단번에 읽히가 쉽지 않다. 그러나 수정체를 서서히 움직이면 중세 우리말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김영춘의 논문에 따르면 《병자일기》를 통해 17세기 국어의 단모음화·전설모음화·원순모음화·모음이화·자음동화 등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단모음화는 치음(齒音, ㅅ·ㅈ·ㅊ)의 영향을 받아 ㅑ·ㅕ·ㅠ 등 복모음이 ㅏ·ㅓ·ㅜ 의 단모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남평조씨는 충주 체류기간 쓴 일기에서 지금의 '소'[牛]를 '쇼', '소나기'를 '쇠나기', '
고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족(紅巾族)이 쳐들어왔다. 홍건족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오랑캐가 아닌 한족이었다. 홍건족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공민왕은 겨우 28명의 신하만 데리고 황급히 개경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에 올랐다. 국왕의 도피는 피난이 아닌 몽진(蒙塵)으로 표현했다.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궁궐의 편안한 생활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음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기로, 어가가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자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민왕은 젖은 옷을 모닥불에 말려야 할 정도로 몽진은 비참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가가 이천현(利川縣)에 당도했는데 비에 젖은 왕의 옷이 얼어붙자 장작불을 피워 한기를 막았다.'- 우리 민족의 침략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장면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고려사》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홍건족의 잔혹한 행동은 야만의 극한에 달했다. '이날 적군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
[충북일보] 고려 제 5대 임금인 경종(955~981)은 관리들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제도에 의해 고려의 관리들은 가을철이 되면 농민의 개인 농토에서 수확량을 10%를 가져갔고, 또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임야를 제공받았다. 그런 전시과는 벼슬의 높고 낮음인 관품(官品), 그리고 인품(人品)에 따라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이 가운데 인품은 시행 초기부터 골칫거리가 됐다. 인품은 개성 신·구 세력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주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목종(穆宗, 980~1009)이 초기 전시과의 불합리성을 개혁하였다. 본명이 왕송(王誦)인 목종은 전시과 외에 학문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행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성애를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종의 생모는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이다. 그녀는 중 김치양(金致陽·?~1009)과 불륜에 빠져 아들을 낳았고, 목종이 후계자로 정한 당숙 대량원군 순(詢)을 제치고 그 사생아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목종은 둘의 음모를 눈치채고 서경(평양)에 나가있는 강조(康兆)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
[충북일보] 청주국제공항에 조류 대응을 위한 드론이 투입된다. 이와함께 향후 사망자 발생 사고를 일으킨 항공사에는 1년간 운수권(항공기 운항권)을 배분하지 않는다. 국토교통부는 30일 공항시설, 항공사 정비·운항 체계, 항공 안전 감독 강화 등 항공 안전 전반에 대한 개선 대책인 '항공안전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국토부는 공항 안전성 증대를 위해 충돌 시 큰 피해로 이어지는 둔덕 형태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을 제거하고, 경량 철골구조로 전면 교체한다. 종단안전구역 권고기준(240m)에 미달되는 김해, 무안, 원주, 여수, 울산, 포항경주, 사천 등 7개 공항 시설은 부지확장 또는 활주로 시단 조정을 통해 종단안전구역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연장이 불가한 경우 EMAS도입을 통해 활주로 안전을 확보한다. 조류 충돌 재발 방지에도 나선다. 무안공항에 조류탐지레이더를 시범설치해 레이더 운용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하고, 인전·김포·제주 등 민간 공항은 이번 달 부터 순차적으로 설계 등을 거쳐 2026년 도입을 추진한다. 청주공항을 비롯한 민·군 겸용공항은 군 등 관계기관과 기술적 고려사항, 추진일정 등 협의를 거쳐 하반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오는 6월 3일 치러지는 21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충북 지역 정치권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각 정당은 '대선 모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가 후보로 확정되면서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 본격 착수했다.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본선 조직을 구성하는 등 전열 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 29일 지역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 충북도당은 다음 달 초 선대위 구성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충북선대위는 도당을 중심으로 전·현직 단체장과 국회의원까지 폭넓게 아우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광희(청주 서원) 충북도당위원장과 도내 현역 국회의원 등이 공동으로 선대위원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현역 중 이연희(청주 흥덕) 국회의원은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 총괄본부에서 중책을 맡아 활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당은 5월 황금연휴가 지난 뒤 선대위 첫 회의를 발대식을 겸해 열기로 했다. 공직선거법에 선거일 전 30일부터 선거일까지 당원 집회 등을 열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별 선대위 구성도 본격화하고 있다. 다음 달 12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만큼 인선
[충북일보] "충북 이노비즈 기업들이 연결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지역 내 탄탄한 경제 기반으로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30일 취임한 안준식(55) 신임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장은 회원사와 '함께 성장하는 기술혁신 플랫폼'으로서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안 신임 회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해야할 부분은 이노비즈기업 협회와 회원사 위상 강화"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외협력위원회(위원장 노근호 전 충북테크노파크 원장) △경영혁신위원회(위원장 이미연 ㈜유진테크놀로지 대표) △회원사 협력위원회(위원장 한연수 ㈜마루온 대표) △봉사위원회(위원장 함경태 ㈜미래이앤지 대표) △창립 20주년 추진위원회(위원장 신의수 ㈜제이비컴 대표)로 5개 위원회를 구성했다. 안준식 회장은 도내 회원사들이 가진 특징으로 빠른 적응력과 협력네트워크를 꼽았다. 그는 "충북 이노비즈 기업은 제조 기반 기술력과 신사업으로의 적응력이 뛰어나다. 첨단산업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다수 분포해 있고, 산업단지 중심 클러스터화도 잘 이뤄져 있어 협력 네트워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