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국립환경과학원이 얼마전 "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담비가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담비는 같은 족제비과 동물 중에서도 나무를 잘 타고 또 땅 위에서 날쌔기로 유명하다. 이런 요소들이 담비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고 있다.담비의 중세 표현은 '담븨'로 이것이 '담뷔', '담뵈' 순으로 변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담비를 '담보' 또는 '담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 담비가죽의 순우리말은 '잘'로, 중세어 '쟈할'이 변했다. 이밖에 담비를 한자로는 '貂'(초), 또는 '山獺'(산달)이라고 쓰고 있다. 고사성어 중에 '구미속초'(狗尾續貂)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개꼬리로 담비꼬리를 잇는다'는 뜻으로 쓸모없는 사람에게 관직을 함부로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때 사마륜(司馬倫)이라는 인물있었다. 그는 진나라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숙부로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이 혜제(惠帝)로 즉위하였으나, 사마륜이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런 사마륜은 권력을 남용,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노비와 시종들에까지도 관직을 주었다.그러자 진서(晉書)를 쓴 방현
뗏목은 원시적인 배라 사고도 빈발했다. 여기에는 우리고장도 포함돼 있다. 성종 때 제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다 익사한 사고가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한강도승(漢江渡丞) 심지(沈智)라는 사람이 이런 보고를 한다. "충청도 제천의 정병 김중선 등 6인이 본현에서 뗏목을 타고 양근군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리어 3인은 익사하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같이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원해 내었습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도승은 조선시대 한강수계 7곳의 진(津)과 도(渡)를 관리하던 책임자를 말한다. 종9품이다. '진'과 '도'는 그 구별이 쉽지 않다. 다만 도하(渡河), 진강(津江)의 표현으로 미뤄, '도'가 좀더 규모가 큰 나루터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사실 뗏목은 조선의 창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도 대형 뗏목사고가 발생했다. 익히 알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바로 그 직전의 상황에서 뗏목사고가 일어났다. 함께 출정했던 당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1390)의 상소 내용
남한강 상류의 산간 내륙에서 벌목돼 뗏목 형태로 운반된 소나무는 역시 궁궐을 짓는데 가장 많이 사용됐다. 광해군일기에서 영건도감이 이런 말을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부터, 여기 저기서 긁어모아 마련하여, 금년 경덕궁(慶德宮) 공사를 끝내는데 쓰려고 한 것이, 재목과 서까래 감을 합쳐 모두 1만8천여개였습니다. (…)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덕궁 안에 또 더 건축할 곳이 생겼고, 장롱과 궤짝, 제상과 향탁 등의 집기에 응당 들어갈 수효도 또한 2백, 3백개에 이릅니다."- 그러나 뗏목은 궁궐 뿐만 아니라 한양 사대부들이 자기집을 짓는데까지 사용되면서 갖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중종실록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사대부의 집에서도 다투어 본받아 또한 장려하게 꾸미기를 힘써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방곡에 즐비했는데, 선왕 때 재상의 집은 여기에 비교해 보면 마치 변소와 같았다. 수령들도 매번 집짓는 재목을 벌채해 뗏목과 배로 운반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느라 동강과 서강을 메웠다."- 인용문 중 '권귀'는 사대부를 의미한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메워질 정도로 소나무를 벌채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재목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건도감이라는
남한강 뗏목은 얼음이 풀리는 우수·경칩이 지난다고 바로 운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 강물이 어느정도 불어나야 가능했다. 뗏사공들은 봄비로 물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뗏목을 엮는 방법은 △칡넝쿨이나 쇠줄로 붙들어 매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기 △쇠고리를 이음새로 박고 밧줄로 잡아매기 등이 사용됐다. 이렇게 완성된 뗏목배 하나를 '한동가리'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보통 25~35개 정도의 굵고 곧은 소나무가 사용됐다.이렇게 영월이나 우리고장 단양 등 남한강 상류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자본가인 목상(木商)이 자비를 들여 '강치성'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에야 한양을 최종 목적지로 운반이 시작됐다. 이때 여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됐고, 뗏목이 출발할 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강치성을 드린 뗏목은 한번에 보통 5~7 동가리가 운반됐고, 이때 2-3명의 뗏사공이 동가리떼에 올라탔다. 그러나 뗏목도 배는 배여서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공이 필요했다. 뗏사공 중 제일 앞에 서는 사공을 '앞구잽이', 맨 뒤에 서는 사공을 '뒷구잽이'라고 불렀다. 이중 앞구잽이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앞구잽이는 각 지점의 여울, 수심,
뗏목은 '목재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나무'로 정의된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남한강으로 뗏목이 운반됐다. 이 뗏목은 일반 배와 많이 달았다. 또 그 자체가 나중에 상품으로 팔렸기 때문에 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종사자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됐던 셈이다. 그러면서 뗏목은 뗏사공을 운송했다는 점에서 운송수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뗏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뗏목은 크게 벌목, 목재운반, 엮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먼저 벌목은 낙엽이 진 이후인 음력 10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여름에 나무를 베면 청태가 끼거나 뒤틀림 현상이 심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졌다. 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영농철이라 인력동원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벌목을 했으면 일단 산 밑으로 운반해야 했으나 그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임도가 거미줄처럼 뚫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질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통길'과 '목도'라는 방법으로 산속의 소나무를 산 밑으로 운반했다. 통길은 잡목을 제거한 후 경사면 아래로 미끄럼 길을 내, 통나무를 운반한 것을 일컫는다. 목도는 두 사람이 줄과
전회에 우리고장 문의(청원)가 관향인 고려말 대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억정사 대지국사탑비(보물 제 16호·충주 엄정면 괴정리 )의 글을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대지국사(大智國師)는 고려후기 우리고장 충주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속명이 한찬영(韓粲英)으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복직장에 재직했던 한적이고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부모 모두 청주를 관향으로 가졌다는 점이 우리고장과의 밀착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는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화상 보우를 은사로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이후 승과에 응시한 23세 전까지 보우에게 5년, 정혜국사에게 3년, 수자화상에게 1년간 공부를 했다. 보우에게서 법을 받았고, 정혜국사로부터는 수행을 배웠으며, 수자화상을 통해서 참선의 진정한 의미와 방법을 배웠다. 그는 1353년 승과에 장원 급제, 대흥사의 주지가 되면서 사판승(事判僧)의 길로 접어든다. 그 결과, 왕명에 의해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 중요한 절의 주지를 맡아 선법을 설하고, 1372년 공민왕으로부터 '정지원명무애국일대선사(淨智圓明無石+疑國一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금란가사, 바리때, 묘
고려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했다. 몽진은 임금이 외침을 당해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안동에는 2개월 정도 머물렀다. 안동시는 이를 기념, 매년 '공민왕 헌다례'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러나 안동보다 더 오래 머문 곳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청주로, 136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5개월 가량 청주읍성에 체류했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청주에 들어오는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임진에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처음 상주에 행차하였을 때 호종한 신료들에게 인가에 우거를 허락하고 그 주인으로 하여금 피하지 말게 하였더니…'- 공민왕은 체류가 길어지자 청주에서 과거 시험를 실시했고, 이때 취경루(지금의 망선루) 방목(榜目)에 장원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다. 합격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朴實(박의중의 초명), 金濤, 金祗,(이상 을과), 鄭履, 李崇仁, 金仲權, 朴希道, 康好文, 趙德謙, 許時(이상 병과)'. 李猷 등 나머지 23인은 진사 합격자였다. 박의중은 조금은 낯설은 인물이나 매우 유능하고 강직한 성품의 관인학자였다. 그리고 우리 고장과도 적
'대풍(大風)을 앓는 집에서 마침 오사가 술동이 안에 빠진 것을 모르고 그 술을 마셔 마침내 병이 낫기도 했다.' 실학자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그의 저서 '산림경제'에서 '오사'(烏蛇·먹구렁이)의 약효를 적은 글이다. 2013년은 흑사띠인 '오사'의 해이기도 하다. 그는 인천부사, 상주목사 외에 우리고장 연원(충주) 찰방과 단양군수 등을 역임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림경제'를 저술했다. 산림경제는 농업 저술이면서 주택·건강·의료·취미 등 농촌생활적인 내용까지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종래의 농서들에서 볼 수 없는 종합적인 농가 경제서이자, 일부 과학성도 겸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저술량에 비해 그의 문집, 연보, 행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현령이 지은 묘갈 문장과 실록, 송자대전, 범옹집(泛翁集) 등에 단편적인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긔의 유일한 전기 자료가 되고 있다. 범옹은 그의 부친 주국(柱國)을 말한다. 홍만선의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상(履祥)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영(霙)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말 그대로 명문가 집안이다. 사료를 보면 그의 아버지 주국은 1674년(숙종 즉위년) 제
2013년은 뱀띠해, 그것도 60년만에 돌아오는 흑사(黑蛇·검은 뱀)의 해라고 한다. 인터넷 상에는 젊은 주부들 사이에 "2세를 낳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2013년을 흑사띠로 보는 것은 십간·십이지의 주역적인 해석에서 연유하고 있다. 먼저 금년이 뱀띠해가 되는 것은 '계사년'(癸巳年)의 '뱀 巳'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십이지(十二支)이다. 나아가 뱀 중에도 흑사띠인 것은 십간(十干)과 관련이 있다. 십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다. 주역상 이 십간은 둘씩 쌍을 만들어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등의 오행(五行)으로 묶을 수 있다. 오행 중 갑을에는 청색, 병정은 붉은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흰색, 임계는 검은색이 일대일로 대응한다. 따라서 계사년에 해당하는 계(癸)는 검은색(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013년은 '흑사띠'다. 흑사하면 생각나는 것이 '먹구렁이'이다. 구렁이의 어원은 순우리말 '굵'(굵다)에 호칭어 '엉이'가 붙은 맡이다. 굵엉이가 굴겅이-궁렁이-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이중 먹구렁이는 표피가 검은색을 띠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렁이의 또 다른 종류인 능구렁이는 이와 다소 다르
문헌상 19세기 초에 '아리랑'과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은 '만천유고'에 '농부가'(1790)를 남겼다. '호미매여라 호미매여라 / 황혼월색이 만기간(滿旗竿)일세 //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啞魯聾) / 일석노담재주환(日夕農談載酒還)'. 후렴구 '아로롱'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로롱'이 아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다소 논란이 남아 있다. '아리랑'이라는 분명한 명칭은 생각보다 늦은 19세기말에 등장하고, 그 배경의 주인공은 고종이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들을 불러들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았다.(…)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 할 때의 '랑'을 '아가씨 娘' 자로 적어고, 그리고 이를 '염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염곡은 이른바 남여상열지사의 노래를 말한다.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