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청일전쟁 발발 시바료타로가 소설 「언덕 위의 구름」 에서 아키야마 사네유키에게 왜구의 전법을 전해주었다고 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는 필생의 사업이 따로 있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를 미화하는 일이었다. 도고는 군신(軍神) 반열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군신이라면 천황보다 계급이 높은 것인지 모른다. 아니라면 천황이 여러 신(神)을 천상에서 지배하는 절대자로 보는지 또 모르겠다. 여하튼 복잡하지만 오가사와라가 도고를 선전하는 책은 여러 권이다. 1904년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부터 1927년 『도고원수상전(東鄕元帥詳傳)』, 1934년 『만년의 도고원수』 『도고원수』, 1935년 『고 도고원수를 말한다』, 1935년 『도고원수의 위업』, 1936년 『격멸:일본해해전비사』, 1940년 『성장동향전전(聖將東鄕全傳)』, 1941년 『약전도고원수(略傳東鄕元帥)』 등 줄기차게 썼다. 1930년에는 도고의 글을 모아 『도고 헤이하치로전집』 3권, 1932년에는 『애국독본』이란 책도 냈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생애, 일화, 전투, 평가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런 글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도고종교의 신자라는 말
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됐다. 뱀은 민간신앙의 주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烏蛇'(오사), 즉 먹구렁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치계하기를, "청송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은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구렁이와 관련된 표현으로는 능구렁이도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능구렁이를 한자로는 적동사(赤棟蛇)라고 한다. 등에는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고, 배는 은백색이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구렁이는 '굵(굵다)'에 호칭어미 '엉이'가 붙은 말로 굴겅이 → 굴헝이 → 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따라서 구렁이는 '굵은 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구렁이는 지금 사람에게는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면서 음흉하거나 능글 맞을 때 '구렁이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해치울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고 하고, 본심을
조선시대 청주지역의 토성(土姓) 중에서 이른바 '혼맥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성씨는 청주곽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한명회를 배출한 청주한씨가 혼맥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강민식 학예사(45·박사)가 최근 '청주의 뿌리를 찾아서'에 16개의 청주 토성 혼맥도를 게재했다. 강 학예사의 글을 이해하려면 토성의 개념을 예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성은 고려시대 이후 전국 각군현에 토착해 있던 지방 호족들의 성씨를 일컫고 있다. 나머지 백성들은 임진왜란 전까지도 40% 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無姓層)이었고, 1909년 이른바 민적법이 시행되고 나서야 모두 성(姓)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세종실록지리지가 제작된 조선 전기까지 청주에는 韓, 李, 金, 郭, 孫, 慶, 宋, 高, 俊, 楊, 東方, 鄭, 朴, 申, 葛씨 등 모두 16개의 토성이 존재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토성 청주곽씨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8세 곽예(郭預·1232~1286)이다. 도기념물 제 20호인 그의 묘는 원래 북이면 내추리에 있던 것을 청주 명암동으로 옮겨왔다.(사진) 그러나 청주곽씨의 청주입향 주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묵은 새배'라는 것이 성행했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묵은세배를 하느라고 이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초롱불을 든 세배꾼들이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바로 묵은 세배는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뭄에 올리는 세배로, 달리 구세배(舊歲拜) 또는 그믐세배라고 불렀다. 묵은 세배는 '한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의미로 집안 어른이나 친지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는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아무래도 여염집과는 다른 설날을 보냈다. 일양세시기(冽陽歲時記)라는 고서는 이렇게 썼다.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대신이 '정조(正朝)에 문안드립니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중사(中使)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지도(知道)'라고 구두로 전하면 대신 이하 모두 물러간다." 인용문 중 '정조'는 설날아침, '중사'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 '지도'는 '알았다'는 뜻이다. 바로 신하들(종2품 이상 참석)이 워낙 많다보니 임금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 내시가 중간에서 오고가며 설날 아침의 인사말을 전했다. 지금의 설날 법정 공휴일은 3일이다.
우리나라에 서양력인 양력이 처음 도입된 해는 1895년(고종 32)이다. 고종은 양력 도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할 정도였다. 건양은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종이 양력 도입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때문이었다. 주변 나라는 모두 양력을 쓰는데 비해 조선만 유독 음력을 사용하면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음력 표기를 한 후 그 아래에 '양력 몇년 몇월 몇일'을 병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구한말 인물은 권재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조약문 맨 끝에 '대조선국 개국 501년 5월 29일'이라고 쓰고, 다시 '양력 1892년 6월 23일'이라고 병기했다. 그러나 양력 도입은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종두법을 발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력 도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한 나라 안에 '정월(正月)'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묘, 사직, 전각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
고려말~조선 초기의 청주 토성(土姓)은 전국 다름 대읍(大邑)에 비해 그 수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청주지역에 다양하면서 강력한 토성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분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충북대 신호철(역사교육과) 교수가 최근 청주문화원이 발간한 '청주의 뿌리를 찾아서' 책머리에 논문 '청주의 성씨와 인물'을 기고했다.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성씨와 본관이 언제 생겨났고, 또 토성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 교수에 따르면 △성씨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고 △본관은 고려의 중앙정부 통제력이 전국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성종 때부터 생겨났다. 이밖에 토성은 고려시대 전국 각군현에 토착해 있던 지방 호족들이 지니고 있던 성씨를 일컫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망성(亡姓), 내성(來姓), 속성(續姓) 등 여말선초의 여러 성씨 형식과 토성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까지도 전인구의 40% 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無姓層)이었고 △1909년 이른바 민적법이 시행되서야 모든 국민이 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신교수는 "세
최근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 중국 스모그가 중부권을 포함한 한반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감기, 천식을 장기적으로 앓는 사람은 물론 비감염자도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일 국내외 각종 뉴스매체들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1월 하순부터 북경, 천진 등 동북아 지방으로 중심으로 강력한 스모그가 발생, 공항은 물론 고속도로가 일부 폐쇄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스모그 농도가 워낙 강하자 티베트 지역의 신선한 공기를 담은 '캔 공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 스모그는 다행히 한반도(청원 기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규정은 미세먼지(PM10) 농도가 100㎍/㎥에 넘어서면 대기오염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날 오후 현재 30㎍/㎥로 관찰됐다. 고려대기환경연구소(청원 강내 소재) 정용승 소장은 "중국 미세먼지가 한반도에 도달하는 데는 기압배치도와 함께 기류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다행이 이번에는 서내지 북서기류가 유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북아 기압배치도와 기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스모그가 한반도까지는 날아오지 않는다'고 단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16. 왜구 고려와 조선을 습격했던 이른바 전기왜구의 소굴은 쓰시마, 이키(壹岐), 마쓰우라(松浦)와 고토열도(五島列島)였다.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소년두목도 이키 출신이라고 하지만 500척의 배로 침범한 것을 보면 섬 하나만의 세력은 아니었다. 중국 연안을 습격한 후기왜구의 출신지가 『주해도편(籌海圖編)』에 나온다. 사쓰마(薩摩), 히고(肥後), 나가토(長門), 오스미(大隅), 치쿠젠(筑前), 휴가(日向), 세츠(攝津), 하리마(播磨), 기이(紀伊), 다네가시마(種子島), 부젠(豊前), 분고(豊後), 이즈미(和泉) 등지이다. 이 옛 지명을 지도에서 보면 규슈와 혼슈 남부 일대인 가고시마, 구마모토, 나가사키, 후쿠오카, 미야자키, 오이타, 야마구치, 오사카, 효고, 와카야마, 미에, 오이타현에 해당된다. 이 책에 연안을 침범한 왜구의 행태를 기술했다. "매일 닭이 울 때 일어나 밥을 먹은 후 두목이 높은 자리에서 장부를 펴 약탈 나갈 대장과 대원을 정한다. 대원은 30명으로 각대가 서로 1 ~ 2리 거리를 두고 소라나팔로 신호한다. 저녁에 돌아오면 각기 약탈한 재물을 바치고 감히 숨기지 않는다. 매번 부녀를 잡아와서 밤에는 반드시 주색에 빠져 지낸다.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