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미군이 6.25때 평양에서 노획한 조선인민군의 편지 주인공 중 충북을 연고로 한 1명의 생사 여부와 소재지가 본보 추적을 통해 확인됐다. 특히 이 사람은 1950년 7월 청주에서 북한군에 강제징집을 당해 남북을 오가며 모두 3번(총 6년)의 군복무를 한 것으로 나타나, 전쟁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보는 6월 10일자 3면과 11일자 1면으로 보도했던 충북 연고자 12명 중 편지를 4통으로 가장 많이 썼으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100호'를 받는이 주소지로 하고 있는 '전종대'라는 인물을 지목, 인물 추적에 나섰다. 추적 방법은 현주소지인 강서1동 주민센터→현암동 통장→현암동 노인회장→현암동 경로당회장 수순을 밝았다. 그 결과, 강제징집 당시 마을인 현 강서1동에 동생 전종성(75) 옹이 생존해 있고 그를 통해 현재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형 전종대(83) 옹과 통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으로, 편의상 존칭은 생략했다. -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북으로 가게 됐나. "청주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1950년 7월 청주, 청원지역 2천여명의 장정들을 시내 모 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강제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했던 예견서를 말한다. 도참, 도교, 풍수지리설적인 사상이 혼합돼 있다. 그러나 정감록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원전 정감록으로 일컬어지는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의 두 아들 이심·이연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내용은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백 년을 논하고 있다.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정감록에 이씨 조선 이후의 왕도로 등장하는 계룡산은 풍수적인 입지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산태극 물태극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돌아겨 나가고 있고, 물길 또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계령산 암반 곳곳에는 정감록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각인돼 있다. 이중 가장
33.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중) ■ 사이고와 야마가타가 보낸 스파이들 메이지유신 직후 사쓰마와 토사, 그리고 조슈번의 군대가 도쿄에 들어와서 고신페이(御親兵)라는 정부의 직속 군대로 편성되었다. 그 핵심은 4개대대 5천명을 가세시킨 사쓰마번의 병력이었다. 이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부와 군의 중심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주장자였다. 조선에서 천황이라고 기재한 국서 받기를 거부하자 침략을 주장한 것이다. 1872년 그는 외교사절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 1842~1917)의 일행 속에 스파이들을 포함시켰다. 그중 육군소좌 벳부 신스케(別府晋介)가 2개월 간 정탐을 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을 유린하는 데는 일본군 2~3개 중대면 충분하다.” 이때 만주로 간 육군소좌 이케노우에 시로(池上四郞, 1842~1877) 등이 돌아와서 「만주시찰복명서」를 제출했다. 이 복명서는 흑룡회에서 펴낸 『서남기전(西南記傳)』에 수록되었는데, 한국과 만주의 지형 정세 군대 재정 풍속 등을 정탐해온 것이었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西南)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결하자 메이지 군대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는 '죽정내'라는 다소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화산 삼거리에서 다소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여말선초 문신인 최유경(崔有慶)이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짓고 만거한 데서 '죽정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정내'라는 지명은 한글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竹亭川'(죽정천)으로 표기돼야 논리적으로 맞는다. 지금은 마을 앞에 초평저수지라는 거대한 담수호가 생겨났지만 과거에는 '川'이 흐른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1872년 진천현지도를 보면 죽정내는 '竹亭川'으로 표기돼 있고, 당시 존재했던 주막이름도 '竹亭店'이다. 고려말의 최유경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보수파에 속하던 인물이다. 그는 역성혁명이 아닌 왕씨 고려의 존속을 원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일파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했다. 당시는 음력 6월로 정황상 막 우기가 시작됐다. 그런 탓인지 압록강을 건너려는 과정에서 익사자가 속출했다.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첫번째 여울에
속보= 재미 언론학자 이흥환 씨가 공개한 7백여통의 미군노획 편지 중에는 '받는이'(수취인)의 주소가 충청북도로 돼 있는 것이 모두 12통 존재하고 있다.(5월 10일자 3면) 당시 발신인(보내는이)들이 편지를 작성한 시점은 6.25 동란 와중인 63년 전으로, 미군이 평양으로 진격한 1950년 가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당시 편지를 쓴 주인공들 중 일부는 아직 생존해 있거나, 6.25 휴전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받는이'의 대부분은 참전하지 않은 후방의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남북 이산가족찾기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편지를 쓴 주인공 △받는 이의 주소 △'누가 → 누구에게' 등을 상세히 소개한다. ①, ②, ③, ④는 어떤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 입대한 '전종대'가 고향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의 후배 최수철, 누이 이순섭·순옥 등 2명 그리고 남동생 종옥 등 4명에게 보내려고 한 편지다, ⑤는 리충기가 복무지 황해도에서 충북 음성군 맹동명 쌍정리의 리덕기에게 부치려고 한 편지로, 둘은 부자간이다. ⑥과 ⑦은 평남 성천군의 김동빈이 충북 진천군 당부 김성래 등에게
배달 안 된 6.25 편지들이 63년만에 무더기로 공개됐다. 특히 이들 편지 중에는 충북을 받는이(수취인)의 주소로 한 것도 10여통이 넘어 지역적인 관심도 끌고 있다. 재미 언론학자 이흥환(워싱턴 KISON 선임 편집위원) 씨가 얼마전 미군이 평양 진격 때 노획, 미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오던 당시 편지 일부를 '조선인민군 우편한 4640호'라는 책을 통해 공개했다. 이씨는 전체 1천17통(엽서 포함)의 편지 중 113통은 편지글 형태로 공개하고, 나머지 616통은 분량상 받는이의 주소만을 공개했다. 이들 편지는 6.25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0년 가을 평양에 소재한 조선인민군 우편함 OOOO호 등을 통해 가족, 연인, 친구 등에게 부친 편지들이나 아직껏 배달되지 못한 것들이다. 특히 이들 중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 등과 같이 받는이의 주소가 충북으로 돼 있는 것도 10여통이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이산가족찾기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를 소개하면 '최석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민군 병사는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에 살고 있는 형 석영 앞으로 '형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사진) 편지글
고려시대에도 기녀문화가 존재했다. 이와 관련, 고려사 명종 12년 2월 을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옥천서 일어난 사건으로 8백여년 전의 일이다. "관성(管城) 현령 홍언(洪彦)이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고, 음황하여 절도(節度)가 없으므로, 벼슬아치와 현민들(吏民)이 언(彦)의 사랑하는 기녀(妓)와 기녀의 어미 및 형제를 죽이고 드디어 언(彦)을 붙잡아 유폐하니…"- 인용문에 등장하는 관성은 지금의 옥천을 의미한다. 조선의 대문장가 정철의 묘가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에 있다. 정철은 기녀들과 염문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만큼 관련 시조도 많이 남겼다. 정철은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자를 건의했다가 선조의 미음을 사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른바 '건저의 사건'으로, 이때 그곳에서 만난 기녀가 '진옥'이다. 먼저 정철이 매우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수작을 건다. '옥을 옥이라 하거늘 광옥만 여겨떠니 /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일시 적실하다 /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가 하노라.'- 이해를 위해 일부 고어는 현대문으로 바꿨다. 기녀 '진옥'도 답을 했다. 역시 성적 은유를 담고 있다. 이 시조 역시 '근화악부'에 실려 있다. '
충북도정사의 최대 치욕으로 6.25 한국동란 와중에 발생한 '청주사건'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여기서 교훈을 얻으려면 당시 사건을 있는 그대로 후대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본보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951년 5월 26일에 발생한 '청주사건'의 실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당시 신문보도, 이승우씨가 저술한 '도정 반세기' 그리고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비교·분석했다. 청주사건은 1951년 5월 공비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받고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아 충북도청 건물 일부와 국가서류 등이 불타고, 또 경찰관 등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공비들은 청원 낭성면에 집결해 있다가 새벽 어둠을 틈타 상당산성-우암산 루트를 이용해 청주에 침입, 충북도청·도지사관사·청주교도소 등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사건은 국가 공문서 등이 불타면서 자료마다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실체 규명이 절실하다는 주장이 존재해 왔다. 1951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당시 충북도지사(이광)와 내무부의 보고 내용이 서로 점을 5줄 제목으로 기사화하는 등 크게 문제삼았다. 먼저 동아일보는 '청주사건'과 관련해
기녀(妓女) 제도의 발생에 대해서는 전쟁 점령지에서의 여자 획득설, 부모 잃은 고아, 부모의 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과부의 사생아, 역적의 처자, 음란함으로 타락한 여자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기녀의 기원을 '고려가 후백제를 쳐들어 갔을 때(…)사내들은 노를 삼고 여자들은 비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우리나라 기녀가 시작됐다"라고 적었다. 여러 설중 전쟁에서의 점령지 여자 획득설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옛그림을 보면 기녀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는 미인의 조건으로 이른바 3白, 3黑, 3紅을 얘기했다. 3白은 살결, 치아, 손이 흰 것, 3黑은 눈동자, 눈썹, 머리카락이 까만 것, 3紅은 입술, 볼, 손톱이 붉은 것을 말한다. 다만 얼굴은 지금의 계란형보다는, 신윤복(申潤福'1758 ~?)의 그림 '미인도' 같이, 살이 약간 통통하게 오른 모습을 좀더 미인으로 쳤다. 조선시대 기녀나 기생들에게는 '해어화'(解語花)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에게
노학자의 현역 사실상의 마지막 발표 화두는 백제 박사(博士) 제도였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과 백제학회가 지난 1일 청주박물관 강당에서 '미호천 유역의 백제사'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가졌다. 발표는 '백제 박사제도의 운영과 변천'(양기석 충북대교수·사진), '백제사 신출토 자료의 음미'(주보돈 경북대교수), '미호천유역 백제고분의 양상과 성격'(박중균 충북대박물관), '충북지역의 백제성곽'(김호준 중원문화재연구원)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양 교수의 이날 발표는 정년을 앞두고 갖는 사실상의 마지막 발표여서 안팎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었다. 백제의 박사제도는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정설화돼 있다. 그러나 양교수의 이날 발표는 이같은 내용에서 몇 걸음 더 들어가 공간적으로는 한·중·일 동양 삼국, 시간적으로는 6세기까지 학문적인 영역을 넓혔다. 그는 '박제 박사는 당대 유학자였을 것이다'라는 일반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백제 초기 박사는 내국인이 아닌 漢人系(한인계)였고 △무령왕은 이를 오경박사제로 정비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백제 박사제도는 6세기 이후에는 직능의 세분화가 일어나 의학, 불교건축 등 장인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하게 된다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