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변경을 둘러싼 갈등이 도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략 지명 변경을 추진하는 쪽은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반대하는 진영은 "역사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도내 지명갈등의 현상황과 그에 따른 득실 등을 사례별로 살펴본다. 글 싣는 순서는 ①가금면 대 중앙탑면, ②강내면 대 미호면, ③충주지역의 이상한 면이름들, ④다른 지역 사례와 득실 등이다. 충주시 가금면 명칭변경추진위원회는 면이름을 '중앙탑면'으로 바꾸기로 하고, 그에 따른 찬반의견 조사를 지난 13일까지 실시했다. 회수된 설문지는 오는 30일 가금면 복지회관에서 개봉돼, 설문 참여자의 2/3가 개명에 찬성을 하면 면이름이 1백년만에 '중앙탑면'으로 변경된다. 가금면사무소 한 공무원은 "충주시 조례는 '주민 50% 이상이 여론조사에 참여하고 그중 2/3가 찬성해야 면이름을 변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설문지를 회수한 결과 68.5%의 비교적 높은 참여율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이처럼 가금면 주민들이 수년 전부터 면이름의 변경을 추진하고 나선 것은 △이웃 '금가면'과 너무 혼동되고 △농작물 브랜드에 '중앙탑' 명칭이 많이 사용된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도민들 사이에서
◇전화기 처음 본 사람은 유길준 오픈 국어사전에는 이미 '전화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라는 낱말이 올라와 있다. 사전은 그 설명으로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로 항상 휴대전화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전화에 빗대어 표현한 용어'라고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화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다. 그는 서구문물을 견학하고 적은 '서유견문'에서 전화기를 '遠語機'(원어기)라고 표현했다. '먼곳에 있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있는 기계'라는 뜻으로, 이때가 1885년이다. 전화기는 1893년 국내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왔으나 실제 통화는 1898년 궁중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이를 'telephone'(전화기)의 한자음을 따서 '덕율풍'(德津風) '덕진풍' 또는 '전어기'(傳語機)라고 불렀다. '津'은 '율' 또는 '진'으로도 읽을 수 있다. 황성신문은 '전어기'로 표현했다. . '芙蘭克麟이 風箏 造하야 電氣를 發明한 後에 電氣線과 傳語機가 生하야 萬里信息을 一瞬通達하며…'- 인용문 중 '芙蘭克麟'(부란극린)은 피뢰침을 발명한 미국 프랭크린, '風箏'(풍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관찰력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의 위치성, 우물의 규모, 솟아오르는 모양 등 외형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호기심 많은 지식인답데 그의 관찰력은 두루 넓었다. 이번에는 그의 오감 기능 중 맛을 보는 혀의 기능이 작동했다. 그는 처음 맛본 초수리 약수의 느낌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試삽(睡에서 目대신 口)之。味微辛而澁。俄而舌尖乍辣。又如點礬。人言如露酒淡者。非誇也。或傳此泉有兩派。其味一淡一辣。同出一井。而味不相和。亦一異云。'- '시험삼아 초정약수를 맛봤다. 맛이 약간 매우면서 떫었는데 혀에서 갑작스런 매운 맛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것은 명반과도 같은 맛이었다. 사람들이 露酒의 맑음같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혹간에 샘에는 2개의 수맥이 있어 그 맛은 하나는 담백하고 하나는 맵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은) 한 우물에서 동시에 나오나 그 맛은 서로 섞여지지 않아 역시 한결같이 다르다라고 전해진다.'(필자 번역) 초수리 약수의 물맛을 기록한 이규경의 표현을 잘 살펴보면 이중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辛'(매운 맛)은 '乍辣'(순간적인 매운 맛)에, 澁(떫은 맛)은 點礬(명반)
45.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동아시아 침략구상 ■ 시바료타로의 가와카미 찬가 시바료타로는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러일전쟁을 이끈 육해군 지휘관과 교묘한 책략을 시도한 외교관을 누구보다 최고로 평가한다. 한갓 기병 여단장과 해군 참모에 지나지 않는 아키야마 형제를 영웅으로 부각시켜 역사를 왜곡시키는 독선도 그런 시각에서 나왔다. 그러나 일본군을 혁신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친 공로자는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시바료타로도 가와카미에 관해서는 찬가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은 나라가 너무나 작았지만 그래도 청국과의 전쟁에 이기려고 했다. 이기려면 이기기 위한 조직과 방법이 있어야 했을 것이었다. 프로이센주의였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육군 참모 메켈 소령이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알기 위해 많은 수재를 독일에 파견했다. 그 중에서 최대의 인물은 그 당시 육군의 보배로 불리던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유럽인들은 '프로이센에서는 국가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냉소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뼛속까지 프로이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오랫동안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역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그의 교유 관계가 일부 나타난다. 그는 '사소절분편변증설'(士小節分編辨證說)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저서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변증'이라는 낱말은 '직관 또는 경험에 의하지 않고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대상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나의 조부 형암(炯菴, 이덕무 지칭)선생이 사소절 3권을 지었다. 그러나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로 전해왔는데 도성에 사는 최도사(崔都事) 성환이 편을 갈라 1권으로 하여 주자(鑄字)로 간행했다. (…) 1853년 가을에 서울에 있는 최한기가 내방하여 간행했음을 전하고 1854년 봄에 2질을 보내오니 옛 정분의 두터움을 알겠으며 그 감사함을 형용할 수 없다.' 인용문에 그가 교유한 최한기와 최성환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중국과 서양서적을 광범하게 섭렵한 후 개국통상론을 주장할 만큼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최성환(崔·煥, ?~?)은 지도와 지리학에 해박하여 김정호와도 교분을 가졌으며, 이규경 역시 김정호의 뛰어난 능
선사시대 벼가 한반도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인 동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나아가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도 논확장에 따른 경관변화의 인식 표현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함께 나왔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김범철(사진) 교수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했고, 청동기시대에는 벼, 보리, 콩, 조, 기장 등 이른바 '오곡'을 재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오곡 중 벼는 청동기시대부터 유독 집약재배되기 시작했고, 소비량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그 식재료인 쌀은 현대도 주식(主食)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습지식물인 벼는 안정적인 용수를 위해 관개시설을 갖고 있어야 하고, 또 생육기간이 길어 노동력과 시간이 많이 투자되는 등 성격이 까다로운 작물이다. 김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쌀이 집약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배경으로 '정치적인 이유'를 꼽았다. 청동기시대들어 이른바 '복합사회'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동기 전기의 권력자들은 대중을 능수능란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은 '노동연회(잔치)와 같은 호혜적인 기제가 대중을 통제하고 지지를 받는데 매우 유용하다'라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있다. 그는 조선 제 2대 임금인 정종의 직계손이나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는 집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오는 학문인 '가학'(家學)이 발달했다. 이런 가풍은 그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63)에게로도 이어졌다. 그 역시 '한미한 양반가=가학'의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주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부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국내는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태어난 것이 조선후기 최대 백과사전의 하나로 불리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제목중 '오주'(五洲)는 '5대양 6대주' 할 때의 그런 오주로, 그의 관심이 국내는 물론 세계로 뻗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0권 60책의 방대한 이 백과사전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됐다. 다행히 그 전에 필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이규경은 이 백과사전에서 청주목 초수리(초정)를 방문하는 과정과 그 당시 느낀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놨다. 이 책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文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文을 숭상하고 武를 하대하는 이른바 숭문언무(崇文偃武)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 강참찬은 귀주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쟁을 지휘했다. 이는 나중에 무신란의 주요 원인이 됐다. 반면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 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다. 무과 장원 제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해 놨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 인용문의 '어구마'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성달생은 그 어구마를 무과 수석의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후 주로 궁궐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간혹 '경호실수'도
청주대 김태영(건축학과) 교수가 얼마전 발표한 논문이 청주의 도심 생태학을 심도 있으면서 획기적으로 분석한 것이어서, 학계는 물론 일반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청주 성안길의 업종변화를 통해 본 도심기능 활성화 모색' 논문을 대한건축학회지 제 33권 논문집(1호)에 발표했다. 쇠퇴기에 접어든 구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속, 소멸, 재탄생하는 업종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김교수는 이같은 흐름을 분석하기 위해 청주의 대표적인 구도심인 성안길(남문로~북문로 6백m 구간)을 연구공간으로 설정하고 성안길 양쪽면에 입지한 업종을 1968년, 1991년, 2013년 등 3개의 시간적인 마디로 나눠 살펴봤다. 조사는 청주시 상공연감을 통해 지번을 확보한 후, 이를 토대로 성안길 터줏대감 인터뷰, 사진 대조, 현장을 방문하는 방법 등이 사용됐다. 그 결과, 1968년 성안길에 면한 건물은 총 83동 이고, 이중 42동 건물의 업종이 파악됐다. 그 42개 건물에는 총 61개의 업종이 분포하고 있어, 한 개 건물당 평균 1.45종이 입주했다. 업종을 분류별로 살펴보면 잡화점 24개, 의료시설 9개, 음식점 7개, 은행 6개, 귀금속점 5
세종대왕 행궁이 국가 숙박시설인 '椒井院'(초정원)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궁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종대왕의 행궁이 좁은 골짜기가 아닌 '넓은 골짜기의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회에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것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1394∼1463)이 아뢰는 말이었다. 그 뒤에는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 이 문장의 원문은 '況椒水之出 源遠而流長 如此之地 未易得也'로 돼 있다. 해석한 문장 중 '멀되 길게 흐르니'(源遠而流長)는 △행궁이 원탕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그런데 그곳까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세종대왕 행궁은 원탕 주변이 아닌, 그곳서 먼 곳에 위치한 것이 된다. '源遠而流長'이라는 문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 앞 표현 '源遠'은 '根深'과 짝을 이뤄 고문헌에 간간히 등장하는 표현이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