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세종대왕의 거둥에 발맞춰 초수리 뒷산에서 옥(玉)이 발견되자 나라 전체가 경사스런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영의정 황희는 이를 "태평성대의 징표"라는 식으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은 옥 발견지 일대를 특별 경비하도록 했다. "초수리(椒水里)에서 산출되는 옥(玉)은 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보배이니 사사로 채굴하지 못하게 하고 그 낭비와 금지를 엄하게 해야 하겠다"- 이어지는 문장은 "금지와 방비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반드시 틈을 타서 몰래 채굴할 것이니, 마땅히 그 주위를 가시나무들로 둘러서 울타리를 만들고, 문에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친히 글짜를 써서 봉해 놓고는…"(〃)라고 쓰여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일부 애호가들이 악세서리용으로 사용하나 그 값은 금·은에 훨씬 못미친다. 그럼에도 당시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음악과 관련이 있다. 세종대왕은 중국 것이 아닌, 조선 고유의 악기로 종묘의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준음을 지닌 악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 남양에서 옥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됐다. 경석은 가공이 쉽기 때
완벽(完璧)은 보통명사처럼 보이나 실은 중국 고사성어에서 유래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명신이자 책략가인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이에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으나 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의 심리전은 먹혀들었고 구슬은 무사히 조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조선말기의 동학이 당시 지배층으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은 이유는 반정부 성향 이전에 '서학(가톨릭)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동학농민혁명 제 119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7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충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박걸순 교수)가 주관한 이날 학술대뢰는 '1893년, 동학농민혁명 전야를 밝히다'를 제목으로 다양한 연구문이 발표했다. 또 같은 대학 신영우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된 토론회에는 김양식 충북학연구소장 등이 참여, 열띤 논쟁을 주고 받았다. 이중 김선경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삼례취회시기…' 연구문이 일반에게는 다소 새롭게 보이는 내용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발표문에 따르면 창시자 최제우는 1861년부터 동학 포교를 시작했으나 기득권층의 "동학은 서학과 같다"는 비판을 받으며 줄곧 탄압에 시달렸다. 김 연구원은 그 근거의 하나로 1863년 상주 우산서원에서 작성한 동학배척 통문 사료를 제시했다. '무릇 西를 東이라 하고 洋을 鮮이라고 하고 學을 天主라고 부르니 남만 북적 황건의 道呪(도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동학은 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모은 것이다
보은 삼년산성 주변의 대야리고분군에서 각종 토기, 철기류, 금동제 귀고리 등 6세기 초기로 추정되는 신라계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경주가 아닌 곳에서 금동제 귀고리(사진)가 출토된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삼년산성 경영을 직·간접으로 맡았던 권력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원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보은 삼년산성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활동을 벌여 대야리, 어암리, 평각리, 풍취리 등에서 직경 15~20m의 대형고분 160여기 등 총 1천6백여기의 삼국시대 고분 존재를 확인했다.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이같은 지표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올 7월부터 여러 고분군 중 대야리 중형고분(충청북도 기념물 제156호)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봉분 직경 약 12.5m, 높이 3.7m 제원의 사다리꼴 '앞트기식 돌방무덤'(일명 횡구식석실분)에서 각종 토기류, 철기류, 금동제 귀고리 등 총 45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수량이 가장 많은 토기류는 목긴항아리(장경호), 받침달린 목긴항아리(대부장경호), 2단 굽다리접시(고배), 목짧은 항아리(단경호) 등으로, 따로 마련된 부장공간에서 발굴됐다. 이밖에 용도가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각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까지 데리고 온 막내아들 이염(李琰·영흥대군) 왕자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영흥대군(후에 영응대군)은 초수리 약수에 왔던 그해에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했지만 5년 뒤 그녀와 이혼했다. 그러나 실록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 이혼은 합의가 아닌, 송씨가 궁궐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실록은 이 부분을 간단하지만 뭔가를 알 수 있게 적었다.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하여 내쫓기고, 다시 배우자를 고르기 때문에 말한 것이었다.'- 원문은 '時永膺大君夫人宋氏以疾見黜, 更爲擇配故云'이라고 돼 있다. 한문에서 '見'은 피동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見黜'(견출)은 쫓겨남을 당한 것이 된다. 사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시아버지 세종이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불만이 많았고, 그래서 병을 핑계로 막내아들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궁궐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송씨가 쫓겨날 당시에 병을 앓았다는 핑계는 얼마안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간택, 영흥대군과 그녀를 재혼시켰다. 여기부터 이른바 '조선시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
1444년, 세종대왕은 청원 초정약수를 찾을 때 혈육으로 세자(후에 문종)와 영흥대군(永膺大君·후에 영응대군) 이염을 대동했다. 문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흥대군은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 때문에 세종대왕이 여러 명의 왕자 중 영흥대군을 왜 대동했는지는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당시 영흥대군은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는 세종과 사이에 40살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바로 영흥대군으로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과거 다산이 대중화됐던 시절에는 막내 아들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때문에 막내아들은 늘 '버릇없음'의 대명사가 되고는 했다. 영흥대군도 바로 그런 경우로, 세종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흥대군을 아홉살때부터 사냥터에 데려가기도 했다. '여러 대군들도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영흥 대군 이염이 나이 바야흐로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만약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가던 연(輦)을 멈추게 하고서 사람을 시켜 염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막내아들 영흥대군을 위해 날다람쥐를 가져
충주호 쏘가리는 낮동안에는 수심이 깊은 곳에 머물다가 야간에는 얕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메기는 쏘가리와 반대로 낮동안에 수심이 얕은 호안에 주로 접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명미 씨 등이 이끄는 부경대학교 지구환경시스템사업단이 얼마전 충주호 쏘가리와 메기의 이동 범위 등을 학문적으로 연구했다. 최근 국내 자연산 담수어들은 하천의 오염과 변형으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수십년간의 남획으로 인하여 서식지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려면 내륙 수생식물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가 필수적으로, 이번 연구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시됐다. 조사방법은 먼저 충주호산 쏘가리와 메기를 포획해 실험어로 선정, 이들 어류에 외과적 수술을 하는 방법으로 음향표지를 복강에 삽입한 후 방류했다. 그리고 이른바 DGPS수신기와 측량용측심기 등으로 구성된 해저지형측정시스템으로 이들 실험어의 이동 행태와 속도 등을 측정했다. 이밖에 청풍대교를 기준으로 '상류'와 '하류'로 구분했다. 그 결과, 실험대상이 된 쏘가리 개체군 모두는 일출후~일몰까지는 하류에 주로 체류하다가 야간에는 수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청풍대교 부근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주간의 평균 유영수심
국보 제 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일명 중앙탑)이 최대 2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탑 손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상륜부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시는 최근 장준식, 김경표 충북도문화재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탑평리 칠층석탑에 대한 3D(입체) 스캔용역과 관련된 자문회의를 가졌다. 시는 본보가 지난 2012년 8월 13일자에서 '충주 중앙탑 원형 실측도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것을 계기로, 이의 해체복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3D스캔 작업을 지난 7월부터 수행해 왔다. 당시 본보는 '일제가 충주 중앙탑을 지난 1917년 엉터리로 해체·조립했으나 이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는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이날 자문회의에서 공개된 용역업체 보고서에 따르면 충주 중앙탑은 단면도상 서쪽으로 2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1도 정도 기울어진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그림참조) 그러나 이같은 기울어짐이 지난 1917년 해체·복원을 할 때부터 존재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 지각 변동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는 여부는 이날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울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지 여부도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당하자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로 몽진을 갔다가 귀로에 청주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가 공민왕 재위 11년인 1361년이다. 임금이 궁궐 안에 있으면 먼지를 뒤집어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피난을 위해 궁궐을 나서면 먼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바로 '몽진'(蒙塵)은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그 자체로 난세를 의미하고 있다. 공민왕은 임시수도인 청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실시, 그 합격자 명단을 취경루(지금의 망선루)에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의 청주 무심천 변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라는 큰 누각에 올라 호종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이날 시짓기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26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종 때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당시 공북루에는 총 28편의 시편액이 걸려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날 공북루에서 지은 26편의 시 외에 1편은 그전부터 걸려 있었고, 또 다른 1편은 개성에서 보내온 백문보(白文寶?·∼1374)시였다. 즉 '26+1+1'인 셈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방문중, 신숙주, 박팽년, 류
충주시 신니면 숭선사지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중 크기가 가장 크고, 또 완형인 형태의 고려시대 금동 풍탁(風鐸)이 발굴됐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토목 기술력을 규명할 수 있는 대규모 암거형 배수로도 추가로 발견됐다. 충청대학박물관(관장 장준식)은 지난 6월부터 사적 445호인 숭선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제 6차) 작업을 벌여 이같은 발굴성과를 거뒀다고 7일 밝혔다. 금당이 있던 사역(寺域) 중심지 서쪽 배수로 바닥면에서 풍탁설(舌)과 함께 발굴된 이번 금동제 풍탁은 전체 높이 31.9㎝, 너비는 15.4㎝, 두께 1.1㎝, 무게 5,416g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것중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지금까지 발굴됐던 감은사지 신라 청동풍탁 27cm, 거창 천덕사지 고려풍탁 22cm보다 훨씬 크다. 장 관장은 "보존상태까지 양호해 고려시대 주조기술과 금속공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숭선사지의 지난 1~3차 발굴조사에서는 실외가 아닌, 3㎝ 크기의 실내용 금동풍탁(사진)도 발굴된 바 있다. 또 이번에 지난 발굴과 마찬가지로 금동제 연봉장식 와정(못의 일종)도 또 다시 수습됐다. 따라서 고려 광종이 재위 5년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