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舍乃里)다. 지명 사내리에 대해서는 △'절 안'의 뜻이 한자화됐다 △원래 '사내골' 뒤쪽에 '사내사'라는 절이 있었다 △집이 쭉 이어졌기 때문에 '집 舍'(사), '이에 乃'(내) 자를 써서 '사내리'라고 했다 등의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법주사 사하촌인 사내리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사내리를 '사내동리'(舍乃洞里)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아에서 동쪽으로 3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8호이다. 남자가 45이며, 여자는 49명이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충청도읍지(1840년대)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호수는 31호, 남자는 69명, 여자는 52명이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18세기 중반부터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사내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동래 정'(鄭) 씨로 현재 7~8대 정도가 내려오고 있다. 법주사 사하촌 6.25 때 급격한 인구 변화를 겪었다. 조선후기가 되자 빈부의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서 이땅의 민초들은 지팡이 하나 꽂을 땅을 갖지 못했다. 그
왜 이른 시기 백제 사람들은 검은색 겉표면에 광택이 나는 이른바 '백제흑색마연토기'(일명 백제 간토기)라는 것을 만들었을까.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남상원 씨의 석사논문 '백제 흑색마연토기 연구'(지도교수 성정용)가 이같은 궁금증에 나름의 견해를 제시, 지역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백제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는 청주, 진천 지역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지역적인 관심을 끌었던 초기철기시대를 전후로 한 토기이다. 남씨의 논문에 따르면 백제흑색마연토기는 △편평한 표면 △흑색내지 암회색의 광택 △표면과 다른 회백색의 토기 내부 △일부 음각 선문양 등의 외관을 지니면서 다른 지역 마연토기와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백제흑색마연토기는 이같은 특징으로 인해 백제의 성립시기, 각종 유구·유물 편년, 백제의 중앙집권화, 마한의 강역 등 초기 백제사를 연구하는데 핵심적인 유물이 돼 왔다. 그러나 이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토기 표현이 어떻게 해서 검은색을 나타내게 됐는지 △또 표면을 왜 갈았는지(마연)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논문은 전자에 대해 "토기 표면에 탄소가 주된 성분인 그을음을 입히는 방법으로 검은색을 냈다"며 "여기에는 생솔가지를 태워 그을음을 얻는일명 꺼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의 내용이 본보가 지난해 기사로 지적한 내용을 상당부분 수용, 1년만에 크게 수정됐다. 2010년 11월에 총 3억원의 사업비로 건립된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은 청주시 상당공원내 60여㎡ 터에 건립돼 있다. 본보는 지난해 '4.19 혁명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충주지역에서 처음 일어났다'(4월 18일자 1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따라서 기념탑 명칭을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 대신 '청주 4.19학생혁명 기념탑'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내용도 명문화해야 한다고 기사화한 바 있다. 이에 충북도는 충북 4.19기념사업회(회장 김현수)와 당시 충주고 학생 간부 등과 협의 과정을 거쳐 기념탑 건립 취지문의 내용을 대폭 수정, 얼마전 오석 교체 공사를 완료했다. 충북 4.19기념사업회는 지난 2010년 충북도, 충청북도교육청, 청주시로부터 각 1억원씩 총 3억원을 지원받아 지금의 기념탑을 건립한 바 있다. 문제가 됐던 수정 전의 기념탑 건립 취지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청주에서도 4월 18일과 19일 양일에 청주대학교를 비롯한 청주공고·청주
1920년대 충북도지사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법주사 여승 성폭행 사건과 관련, 당시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1925년 3월 31일이다. 박주중양과 동아일보 사이에 당연히 악연이 싹트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국가의 공복이자 지방장관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는지 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칼럼난은 박중양의 법주사 여승 성폭행이 속리산 법주사에서 일어난 것을 빗대 아예 그를 속세의 아전이라는 뜻인 '속리(俗吏), 그리고 '군'이라고 불렀다. '충북지사 박중양은 도처에서 속리(俗吏)의 본색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 속리 박중양 군이여. 관찰사의 권위도 장하고 명승지 유람도 좋은 일이지만 다수한 농민을 실사아사(失時餓死)케 하고 또한 범형치사(犯刑 致死)케 하는 것이 군의 당행할 직무인가. 그리하고도 일선융화만 창도하고 총독부 당국의 환심만 사면 만사가 태평이란 말이지.'- 인용문 중 '명승지 유람'은 화양동 등 괴산지역을 1주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농민을 실사아사하고 범형치사케'는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하기 위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보
▲장준식(충청대학교 박물관장)씨 빙부상·김경인(충북문화재단 이사)씨 부친상= 발인 18일(금) 오전 8시 충주의료원 장례식장 특 1호실. ☏(043) 871-0444.
일본식 이름이 호추시게요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일제강점 기간인 1920년대 충북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산수유람 편의를 위해 속리산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을 지시한 것은 1923년 6월 중순이었다. 말티고개는 그로부터 1개월후 오솔길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박중양이 1년 후인 1924년 11월 초순 속리산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그는 그 이전에 화양동 등 괴산지역 명승지를 1주일간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올 정도로 유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이 장기 유람을 관행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박중양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박중양의 이날 법주사 방문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일부 공무원, 그리고 신문기자 등이 동행했다. 사이토 마사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1927년 동안 제 3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 스타일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고, 이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다. 일행은 젊고 예쁜 비구니(여승)를 불러앉힌 후 밤늦도록 주연을 가졌다.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
'다시, 사람이 하늘이다.…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지역에서는 흔치 않는 4주 연속의 동학농민혁명 특별기념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충북학아카데미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특별 강좌는 금년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지 2갑(120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미 지난 10일에는 한양대 김용휘 교수가 등단, '동학과 현대적 의미'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김 교수는 이 자리에서 "창시자 최제우가 '개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동학을 중심으로 문명의 대전환을 열고자 했기 때문"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학문이자 종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동학은 내면에서 신성(하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문명적 원리로 삼고자 했다"며 "동학이 21세기 대안종교의 하나로 더욱 우뚝 서려면 사회 참여적 역량을 보다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오는 23일에는 충북대 신영우(사학과) 교수가 등단, '한국근대사와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적 성찰' 제목의 특강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특히 신 교수는 이날 일본을 집적 방문해 찍은 현장 사진을 대거 공개할 예정으로, 동학에 대한 지적 갈등을 푸는데 그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말티고개는 보은에서 약7㎞ 지점에 있는 속리산 입구의 첫 고개로 높이는 430m다. 현존하는 흑백사진을 보면 말티고개는 일제 강점기까지 오솔길 정도의 모습으로 그 폭이 좁았다. 고개 굽이가 워낙 많고 험하다 보니 선형 개선은 물론 노폭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대형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인물은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이다. 이것에서 보듯 그는 친일행각이 뚜렷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념적 친일파라는 사학자들의 평가가 따라 다니고 있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직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말티고개를 확장하는 토목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유람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부임 2달 후인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는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리산 복천암에서 온양으로 가려면 말티고개 외에 차의현(車衣峴, 혹은 차의치), 묵현(墨峴), 누치(漏峙) 등을 경유해야 한다. 차의현의 지금 지명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수리티재'다. 해발 3백여m의 수리티재는 보은 수한면 차정리와 회인면 건천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25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차의현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과의 경계이다"라는 적어놨다. 이밖에 해동지도는 '차의치(車衣峙)', 여지도서와 대동여지도는 '차의현', 일제 강점기 지리지인 '조선지지자료는 '차령(車嶺)'으로 기록했다. 이상에서 보듯 전통시대 지명에는 '차의'(車衣) 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왜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수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차의(車衣)'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묵현'이 지금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지도는 '묵령'(墨嶺)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황상 문의 마장이에서 회인 중앙리 저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먹티'가 확실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회인현 산천조에서 '목감산 고을 서쪽 5리에 있
세조는 1464년 속리사와 복천암을 둘러본 후 온양행궁을 가기 위해 다시 북향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보은에서 온양을 가는 코스는 2가지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공로는 현(縣)과 현을 연결시켜 주던 도로로, △국가 문서 전달 △조세수납 △관찰사 순력 때 주로 이용됐다. 이에 비해 사로(私路)는 장돌뱅이들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주로 개척했다. 먼저 보은에서 온양에 이르는 방법은 보은-회인-청주-천안-온양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루트는 보은-회인-문의-연기-전의-온양 이다. 세조의 어가는 이중 후자를 택했다. 왔던 길을 피하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보은 속리산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가 하루 뒤 문의현에 도착했다. 세조실록은 이에 대해 '어가가 문의현(文義縣)에 머물렀다'(10년 2월 29일자)라고 짥막하게 적었다. 세조의 어가는 계속 북서진을 해 다음날 전의현에 도착했다. '어가가 전의현에 이르니, 예조판서 박원형(朴元亨)이 사신 원접사로서 와서 하직하였다.'- 인용문 중 다소 생소한 용어인 '원접사'는 중국의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던 임시 벼슬을 말한다. 세조가 순행 중에도 국사를 처리했음을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