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충북도민들에게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공공건물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충북도청이다. 이를 풍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할까. 풍수상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봐야하는 것은 생룡인가, 아닌가 여부이다. 이때의 생룡은 용맥(龍脈)이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 생룡 판정을 받으려면 용맥이 좌우와 상하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좌우변화는 용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몸통을 좌우로 흔드는 모습으로, 그 각은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30도 정도가 좋다. 상하변화는 용맥이 위로 솟구치거나 아래 로 급하게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낮아지는 곳에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고개이다. 풍수상 생룡상의 고개는 달리 과협(過峽), 또는 벌의 허리를 닮았다고 해서 봉요(蜂腰)라고 부른다. 생룡 판정을 받은 것중 이같은 변화가 가장 강하게 약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용은 강룡(强龍)이라고 일컫는다. 거시적 관점으로 본 충북도청의 풍수상 출발점은 속리산이다. 여기서 출발한 한남금북정맥은 회유치(回踰峙·보은~문경)에서 90도 회전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피반령에 다다른다. 이후 피반령에서 청주의 동부를 북서쪽으로 가르면서 올라가 청주의 진산인 상당산에 이르고 있다. 이후
김상태(1862~1911)는 1896년 전기의병에 참여한 이래 후기의병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까지 항쟁을 지속한 불굴의 투사이다. 그는 소백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으로 불렸던 불사조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한말에 수많은 의병이 있었으나, 전기부터 후기까지 전 과정을 참여한 의병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그의 의병항쟁은 구한말 의병을 실체적으로 실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다 김상태는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당시는 영춘군 남천리)에서 아버지 김규병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삼척이고, 본명은 상호(相鎬)인데, 자(字)로 사용했던 상태(尙台)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어릴 때 영춘을 떠나 삼척 김씨들의 본향인 강원도 영월의 옥동마을로 이주하였다. 김상태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실력이 출중하여 마을에 서당을 열어 학동을 지도하는 한편, 향교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 형성에는 동학사상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옥동마을은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이 일시 숨어 지내며 포교활동을 하던 곳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옥동마을은 일찍부터
[충북일보] "그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짜 청안현감 鄭重益의 반군에 가담한 임필현(林必玄)이 한 이 말은 당시 기층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다. 토역일기 상으로 확인되는 반군 인물은 명현(命賢), 석창(碩昌), 몽엽(夢燁), 금립(今立), 시세(時世), 시만(時萬), 세강(世强), 반리(伴里), 임필현, 신평(信平), 차동(次同), 흥석(興石), 귀현(貴玄), 비억(非億), 명이(命伊), 성좌(性佐), 명이(明伊), 막남(莫男) 등 모두 18명이다. 이중 시세, 시강은 형제간이나 가까운 혈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차동, 흥석, 귀현 등은 당시 청안현의 관노였다. 나머지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느낌상 막동, 몽엽 등도 관노로 보여지고 있다. 각사등록, 영조무신별등록 등 1728년 무신란을 기록한 다른 기록에는 雄伊, 京元 등의 관노 이름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신년 반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층민으로 '부역을 제외시켜주고 부역을 삭감시켜준다'는 꾀임에 빠져 참여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이 반드시 신역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이인좌가 파견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청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감의 인부(印符)를 빼앗는 것이었다. 인부는 관인(官印)과 병부(兵符)의 준 말로, 임금의 신임장과 동일시 됐다. 관인은 말 그대로 관에서 찍는 도장을 의미하나, 병부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군대를 움직일 때면 임금의 교서와 함께 반드시 부절(符節)의 일종인 병부를 맞춰봤다. 부절은 대나무나 옥 따위로 만든 신표로 하나는 조정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관에게 주어,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두 조각을 맞춰봤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병부제를 운영한 것은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5.16 등 근현대의 모든 쿠데타는 군대가 국가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나면서 성공했다. 1728년 3월 19일.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인부를 빼앗기 위해 부하 금립(今立), 시세(時世) 등을 진짜 청안현감 이정열(李廷說·?-1728)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냈다. '19일 사렴이 今立, 時世 등이 고을 원이 印符를 탈취하기 위해, 시각을 정해서 보냈다. 두 역적이 고을 원이 피해서 숨을있는 곳에 가까이 도착하여 검을 빼들고 곧다로 들어가서
[충북일보] 전국 사찰의 문화재 징수와 관련해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의 징수 근거가 되는 문화재 보호법 제49조는 위헌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임락균 씨의 '문화재 관람료 관련 갈등에 대한 법적 검토' 논문에 의하면 현행 문화재 보호법은 지난 1962년 1월 '문화재관람료의 금액은 문교부장관이 인가한다'는 내용을 제정한 이래 여러 번의 개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1년 7월에 개정된 현행 문화재 보호법 제 49조 1항은 '국가지정 문화재의 소유자 또는 보유자는 그 문화재를 공개하는 경우 관람자로부터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다. 다만, 관리단체가 지정된 경우에는 관리단체가 징수자가 된다'라고 돼 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문화재관람료는 수익자 부담금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수익자 부담금은 '어떤 공익사업으로부터 특별한 이익을 받은 자에 대하여 그가 받은 특별한 이익의 범위 안에서 당해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시키는 것'으로, 문화재 관람료 징수에 따른 법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임씨는 그러나 문화재 관람료 징수 행위는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행정작용에 해당하므로 '법률유보 원칙'과 '포괄위임 금지원칙'의
[충북일보] 무신란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은 실록에 칼을 잘 다뤘던 인물로 표현돼 있다. 다음은 이인좌가 경기도 죽산전투에서 관군에 사로잡힌 후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과 정중복·정중익 등 형제이며….'- 청주읍성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당시 진짜 청안현감으로 있던 인물은 이정열(李廷說·?-1728)이었다. 그는 반란군이 진격해 오자 관청을 버리고 도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때가 청주읍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간지 이틀 후인 3월 17일로, 원문은 이렇게 적혀 있다. 聚會軍卒 太半不至: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태반이 오지 않았다. 勢難守成 姑避其禍: (이정열은) 성(관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동안 그 화를 피하고자 했다. 仍卽棄官而走 鼠伏山谷: 인하여 관청을 버리고 달아나 산곡에 깃들어 납작 숨었다. 官屬無一人從之者: 관 벼슬아치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청안현 읍치는 무주공산으로 변했고, 이런 가운데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이 3월 18일 부임했다. '18일 오시에
[충북일보]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
구석기인들이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사용한 반면, 고조선인들은 무덤공간으로 많이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만주~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동굴무덤에는 집돼지뼈가 거의 대부분의 무덤에서 출토, 이 시기들어 돼지가 완전히 가축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충북대 출신의 세종대학교 하문식(역사학과) 교수가 얼마전 논문을 《백산학보》 제 98호를 통해 발표했다. 그는 고조선의 동굴 무덤문화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 태자하 유역(라오닝성 신빈~본계) △북한 미송리 유적(압록강 유역) △덕천 승리산유적((대동강 유역) △무산 지초리유적(두만강 유역) 등 1백40여기의 동굴무덤을 여러 해에 걸쳐 현장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의미한 내용들이 다수 확인됐다. 먼저 이들 무덤은 거의 공통적으로 △샛강 산자락의 석회암 동굴에 위치했고 △무덤양식은 무덤방이 아닌 낮은 구덩이를 파고 묻는 널무덤 형식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관련 동굴무덤에서 27종의 둥물뼈가 수습된 가운데 집돼지뼈 10곳, 개와 사슴뼈 8곳, 노루뼈 6곳, 닭 및 멧돼지뼈 5곳 등의 분포도를 보여, 집돼지뼈가 가장 많이 수습됐다. 그는 이에 대해 "이같은 자료는 돼지가 고조
[충북일보] 민강(閔橿, 1883~1931)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대동단(大同團)에 참여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더불어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이 때 민강은 동화약방(同化藥房)의 창업자이자 초대 사장으로서,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로서 활동하였고, 동화약방은 그 거점이 되었다. 민강을 독립운동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동화약품(전, 동화약방)의 '부채표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민강은 1883년 충북 청원군 양촌리(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민병호는 1882년 폐지된 선전관청의 선전관이었다. 그는 궁궐에 드나들며 평소 친분 있게 지낸 전의에게 궁중 비방을 전해 듣고, 그 비방에다 양약의 장점을 가미하여 활명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장남인 민강과 함께 동화약방을 창업하였다. 구한말 민강은 국운이 기울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화약방 내에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그는 교사에게는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육의 기회조차 얻기 어
[충북일보] 민원보(閔元普), 민덕효(閔德孝), 민백효(閔百孝), 민복효(閔復孝), 민득효(閔得孝), 민관효(閔觀孝),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1728년 무신란에는 충주목의 남인계열 사족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여흥민씨와 그 인척들이 유독 많았다. '김덕유는 충추 사람으로 민암의 사위이고 한세홍의 내구(內舅)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으므로….'- 이런 여흥민씨 중에는 '효'자 돌림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민원보의 항렬이 높고, '효'자 돌림은 그 아래임을 보여준다. "충주목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의 아들 민복효·민득효는 연좌시켜 교형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에 '부인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민원보는 무신란 충주지역 주모자로, 연좌제에 의해 두 아들이 교형에 처해졌고 다만 어미만 고령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 《영조실록》에 민원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충주지역 인물은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