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우리고장 진천 문백면 한계마을이 고향인 강백년(姜柏年·1603∼1681)을 설명한 바 있다. 그가 지은 '청춘에 곱던 양자'라는 시조는 주군(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을 시로 잘 승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는 받고 있다. 국문학 전공자들은 그의 시조뿐만 아니라 한시도 크게 주목을 하고 있다. 이중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해동시선에 실려 있는 '산행'(山行)이다. 해동시선의 저자는 조선말기 지식인인 이규용(李圭瑢)다. '십리를 가도 인적이 없고 / 텅 빈 산에 봄새만 우네. / 스님 만나 길을 물어 보았으나 / 스님가자 길이 다시 헷갈리네.' 원문은 '十里無人響 / 山空春鳥啼 / 逢僧問前路 / 僧去路還迷'로 돼 있다. 시골 산길의 조용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듯이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無人響', '山空' 등의 시어는 적막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이명한(李明漢·1595~1645) 있다. 두 사람은 8살의 나이차가 났으나 필담을 나눴다. 강백년이 8살 적다. 이명한이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자 강백년은 다음과 같은 시로 마중했다. '풍진 세월에 늙어 품은 계책 어그러졌는데 / 오늘 눈 속에서 그대 돌아감을 부러워하네 / 헤어짐에 봄
도토리묵밥과 도토리전. 도토리와 관련된 식품은 지금은 별미내지 다이어트식으로 많이 찾지만 전통시대에는 달랐다. 도토리는 우리나라 전통시대 때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이었다. 문헌상 도토리가 구황식품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 후반의 고려 충선왕 때이다. 충선왕은 흉년이 들자 반찬수를 줄이고 손수 도토리 맛을 봤다. '이달에 왕이 흉년에 백성이 굶주림으로 반찬을 줄이고 내주(內廚)에 명령하여 도토리를 바치게 하여 맛보았다.(是月 王以歲凶民飢 減膳 命內廚進橡實 嘗之)'- 고려 후기를 산 인물로 윤여형(尹汝衡·?~?)이 있다. 그는 벼슬이 높지 않았으나 고려후기의 부조리한 사회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의 시 '橡栗歌'(상율가)에 그같은 일면이 잘 드러나 있다. '상율'은 직역하면 '상수리 밤'이라는 뜻으로, 도토리를 지칭한다. '촌집 늙은이 마른 밥 싸 가지고(村家父老裏O糧) / 새벽에 수탉 소리 듣고 도톨밤 주으러 가네(曉起O取雄鷄聲) /…/ 온종일 주워도 광주리에 차지 않는데(崇朝O拾不盈筐) / 두 다리는 동여놓은 듯 주린 창자 쪼르륵(兩股束縛飢腸鳴) / 날 차고 해 저물어 빈 골짜기에 자네(天寒日暮宿空谷)'- 칠언고시 형식인 이 한시
조선시대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기구로, 그 으뜸은 종3품 당상관인 대사간(大司諫)이다. 당상관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리로, 지역하면 정사를 논할 때 堂에 오를 수 있는 품계를 말한다. 그 반대말은 당하관이다. 조선 효종 때의 대사간의 한 명으로 강백년(姜柏年·1603∼1681)이 있다. 그가 바로 전회에 언급한 표암 강세황의 할아버지다. 1648년 이른바 강빈(姜嬪) 신원 사건이 일어났다. 강빈은 소현세자의 빈으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7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를 미워한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후원별당에 감금됐다가 끝내 사사됐다. 이 여파로 그녀의 친정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석철·석린 형제도 의혹 속에서 죽고 말았다. 강백년은 대사간 입장에서 강빈의 신원(억울함을 풀어줌)을 간언했다. 말이 간언이지 인조의 최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강백년은 우리고장 청풍군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종6품인 점을 감안하면 품계가 수직 강하한 셈이다. '황감을 대사간으로, 김식을 헌납으로, 최후윤을 정언으로, 홍우원을 봉교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부제학 이기
"그는 그림을 통해 문인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때문에 그는 평생 속기(俗氣)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술 평론가들이 영·정조 시대의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을 평한 글이다. 그는 39살 때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산도'(陶山圖)의 제발(題跋)을 이렇게 적었다. '제발'은 서화 두루마리나 첩책 말미에 기록한 그 감상록을 말한다. '그림은 산수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 또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억측으로 닮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술 평론가들은 강세황의 이같은 창작 태도를 '와유'(臥遊)와 '사의'(寫意)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고 있다. '와유'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반면 '사의'는 사물에 의탁하여 도(道)와 진(眞)에 이르고자 하는 뜻을 의미한다. 강세황 작품에 대한 '한국적 남종문인화' 혹은 '남종문인화의 토착화'라는 표현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강세황의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강백년(姜柏年)이고,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
한국지적협회(회장 오현진·청주대 명예교수·사진)가 지난 27일 청주시 사천동 봉화빌딩에서 이전 개소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특히 이날 개소식은 전국단위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청주로 이전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 주목을 받았다. 지적 (地籍)은 토지의 위치, 형질, 소유 관계, 넓이, 지목(地目), 지번(地番), 경계 등 토지에 관한 제반 사항을 등록하여 놓은 기록을 말한다. 이날 개소식에서 오회장은 앞으로의 활동 방향으로 △지적에 대한 기술과 제도 연구 △지적 기술자의 교육연수 및 경력관리 △회원 윤리 확립과 복리증진 등을 강조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지난해 지적재조사특별법이 공포되면서 새로운 지적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며 "일부에서는 지적을 공간정보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려 하지만 공간정보의 뿌리이자 요체는 앞으로도 지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공간정보는 지리정보시스템(GIS)을 기반으로 지적도 위에 건물정보와 건물 위치, 층수, 용도, 구조, 면적 등 행정정보를 함께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적인의 교육 등에 대해서는 "지적제도의 미래지향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과학적 품성을 지닌 지적 공무원과 지적기술자를 양성
일명 '벌 잡아먹는 벌'로 불리는 '등검은 말벌'(Vespa velutina nigrithorax)이 이미 충북지역에도 유입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환경부는 최근 등검은 말벌에 대한 주의보를 발표, "지난 2003년 부산 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2012년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경북지역, 북쪽으로는 강원도 삼척까지 확산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등검은 말벌은 기존의 그 어떤 국내 말벌류보다도 도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으로 도시지역 피해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실제 2010년에는 부산 금정구에서 말벌류 피해에 의한 119 구조대 출동 중 등검은 말벌이 4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환경부의 이날 발표와 달리 도내 양봉 업자들은 등검은 말벌이 지난해부터 충북지역에서도 관찰되고 있다고 밝혔다. 청원군 낭성면 김대립 씨는 "지난해 분명히 등검은 말벌을 유관으로 봤고, 금년은 아직 출현빈도가 낮으나 8~9월이 되면 개체수가 현저히 많이 관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이유에 대해 "등검은 말벌 애벌레는 8월부터 먹이 섭취량이 크게 늘어난다"며 "따라서 이 시기가 되면 등검은 말벌은 토종, 서양벌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암의 생가지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을 지나 영동으로 가는 국도변인 원동리 야산에 이르면 작은 무덤과 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비석 제원은 높이 86cm, 폭 41cm, 두께 17cm의 화강암이다. 비문에는 '贈 領議政 睡翁宋公(증영의정수옹송공) / 乳母憲菲之墓(유모헌비지묘) / 子姜수文墓在左(자강수문묘재좌) / 崇禎六十一秊 二月立(숭정육십일년이월입)'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영의정으로 증직받은 수용 송공의 유모 헌비의 묘소이다 / 그의 아들 강수문의 묘소는 좌측에 있다 / 숭정 61년 늦은 2월에 세우다' 정도가 된다. 전회에 우암 송시열의 부친이 송갑조(宋甲祚·1574~1628)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과거합격 직후 인목대비를 배알했다는 이유로 유적(儒籍)에서 제적됐다. 그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는 강골의 겸비한 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송응기(宋應期)로, 이윤경의 딸인 광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연약한 몸으로 다섯번째 아들인 송갑조를 출산한 후 몇년 지나지 않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같은 환경에서 송
35. F기관과 말레이의 하리마오 ■ 하리마오란 말이 유행한 까닭 일본제국의 침략 수법은 비슷했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청에서 떼어낸 다음 보호국으로 만들고 국권을 탈취해서 '무단통치'로 억눌렀다. 타이완은 청일전쟁 노획품으로 청에서 할양받아 '엿과 채찍(飴와 鞭)'으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간 다스렸다. 중국 동북지역은 관동군이 침략해서 중국에서 독립시킨다며 만주국을 세운 뒤 '모략과 폭력'으로 1932년부터 1945년까지 13년 간 지배를 했다. 동남아에서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일본군의 말레이반도 공격은 진주만을 기습한 6시간 후인 1941년 12월 8일 새벽 1시 30분(한국시간)에 전격 개시하였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었다. 이것을 일본에서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한 전쟁이면서 식민지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동남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펼쳤던 모략전쟁을 구미열강의 식민지를 분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세뇌될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스스로 자기 말에 최면이 되기가 쉽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사교육이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송시열의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1574~1628)라는 인물이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소과의 일종인 생원시는 지금으로 치면 논술, 진사시는 경전해석을 묻는 시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직후 송갑조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같이 합격한 동과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찾아 혼자 배알, 즉 인사를 했다. 당시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친모이나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서궁에 유폐된 상태였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인목대비를 찾았다는 것은 여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즉각 파문이 일어났다. 이영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과거합격 동기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운동에 나섰다. 실록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갑조(宋甲祚)가 정사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혼자서 서궁에 숙배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흉도들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며 많은 선비들을 협박하였는데, 갑조가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므로, 흉도들이 그의 성명을 탐문하여 중상할 계획을 쓰자….'- 송갑조는 이같은 분위기에 고분고분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도
괴산지역의 올갱이국은 특유의 쌉싸레한 맛 뿐만 아니라 건강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올갱이국을 가열할 때 우러나는 파란색의 액즙은 간(肝) 건강에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영양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 "아미노산을 많이 함유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영양학계는 올갱이국에는 부추 또는 아욱이 궁합이 맞는 식재료라고 말하고 있다.올갱이는 음양상 찬 성질을 지니고 있는 반면 부추와 아욱은 따스한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둘을 함께 조리할 경우 궁합을 이룬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괴산 올갱이국과 관련해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것은 '올갱이'를 표현하는 언어가 무척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올갱이'류의 표현은 충청도나 강원도 일부 지역의 사투리로, 표준말은 '다슬기'다. 그러나 변종언어인 '올갱이'는 괴산지역에서 그 생김새와 모양에 따라 또 한번 세분돼 불려지고 있다.괴산지역에서 올갱이를 잡는 사람들은 껍데기에 오돌토돌한 작은 융기가 있는 것은 '까끌이', 껍데기가 다소 맨질맨질한 것은 '뺀질이'. 그 중간의 것은 '반까끌이', 약간 둥그스럼한 것은 '사발이'라고 표현한다. 이중 '뺀질이'는 물 흐름이 빠른 계곡에서,
속보= 6.25 미군 노획 편지 중 받는이(수취인)의 주소가 '충북'으로 돼 있으면서 현재도 생존해 있는 인물이 확인됐다. 본보는 이번 보도건을 마무리 짓는 차원에서 이미 기사화한(6월 10일, 14일, 19일자) 발신인 뿐만 아니라, 수취인 12통의 편지 주인공도 탐문·추적했다. 방법은 전과 같이 주민센터를 통해 지인을 연결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미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편지 중 '충북'이 수취인 주소인 인물은 최수철(청원 강서), 이순섭(〃), 이순옥(〃), 전종옥(〃), 리덕기(음성 맹동), 김성래(진천 당부), 김성해(〃), 원영히(단양 보안대), 황호연(청원 강서), 최석영(청원 오창), 문관분(음성 대소), 이원상(충주) 등이다.그 결과, 12명의 한 명인 '이순옥' 할머니가 당시 수취인 주소지(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에서 가까운 세종특별시 조치원읍 침산리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금년 76세. 이순옥 할머지의 본래 이름은 '이순교'이나, 이는 발신자 전종대(전남 여주 거주) 옹이 1950년 9월 평양에서 편지를 쓸 때 나이 차이(10살)가 많이 나 이름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나머지 수취인 가운데 △최수철, 전종옥
얼마전 형식이 다른 본보의 기사를 통해 조선 세종 때 한양도성을 수축할 당시 충청도 사람도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됐고, 이때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 가량 현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전국적으로는 32만2천400여명이 동원됐다. 조선시대 인구를 감안하면 이같은 규모는 전국 모든 장정들이 총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경상도에서 가장 많이 동원됐고 충청도는 그 다음인 17%를 차지했다.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 성돌에 지명을 새긴 것은 사후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더러 등장한다.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농번기가 끝난 겨울철에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토목공사를 주도한 인물은 세종이 아닌 상왕 태종이었다. '도성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성을 쌓는 군사가 도망하는 자는, 처음 범하면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두 번 범하면 참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속보= 충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이 일제가 엉터리로 해체·조립한지 98년만에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앞서 본보는 해체 직전인 1916년에 작성된 중앙탑 원형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 지난 < 2012년 8월 13일자> 기사에서 이를 바탕으로 할 경우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19일 지역 문화재계에 따르면 충주시는 총 30억원의 예산을 들여 오는 2015년까지 중앙탑을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첫 단계 사업으로 중앙탑을 정밀측량, 이를 3D(입체) 스캔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업체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시 관계자는 "3D스캔사업의 입찰금액은 6천9백만원으로, 도·시비외에 문화재청 보조금도 포함돼 있다"며 "도내 기업 중에는 응찰자가 없어 조만간 입찰 범위를 전국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과 대전대 이달훈 교수 등 국내 석조미술 전문가들은 일제가 지난 1917년 엉터리로 해체·조립한 중앙탑에 대해 △4개 면의 탱주 숫자와 면석의 간격이 일정치 않고 △기단 갑석의 경우 부분적으로 다른 석질의 부재라고 밝혔다. 두 전문가는 또 △
괘서(掛書)는 남을 모함하거나 나라를 비방하는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거나 투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괘서 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행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무고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따라서 조선조정은 괘서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괘서사건이 전국적으로 42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 특히 많이 일났다. 순조가 11살 나이에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후 성장한 순조가 직접 정치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장인 김조순(金祖순·1765∼1832)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절대 부패해졌고,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하면서 유랑민이 되는 등 국가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전회에 청주읍성 북문에 괘서를 붙인 김치규(金致奎)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본래 청주사람은 아니었다. 김치규는 평안도 중화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충청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고장 청안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청안 토호였던 이원기(李元基)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훈장 노릇을
조선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에 충청도 사람이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된 가운데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가량 현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민덕식 전국사편찬위원화 교육연구관이 충북사학 제 27집(발행인 충북대 신영우 교수)에 '충청인들의 서울성곽 축성관계 금석문'(부제: 세종4년 축성을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했다.논문에 따르면 조선의 수도인 한양도성은 태조 4년(1395) 처음 축조된 후 27년만인 세종4년(1422)에 나머지 구간을 수축하게 된다. 이때 8도가 전구간을 배분해 맡은 가운데 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이 구간은 풍수상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왕산이 있는 우백호에 비해 지맥이 다소 낮고 거리가 짧은 입지환경을 지니고 있다.논문에 따르면 이 구간 성벽수축 공사에 동원된 충청도 수축군은 총 5만6천1백여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 동원인력 32만2천400여명의 17%에 해당하는 수치다.충청도 수축군은 39일간 진행된 성벽공사에서 태조 때 쌓은 744척(약 227m)을 제외한 5천256척(1,627m)을 새로 쌓았다.이때 동원된 충청도 각고을의 수축군들은 'OO 구간은 우리가 쌓았
속보= 미군이 6.25때 평양에서 노획한 조선인민군의 편지 주인공 중 충북을 연고로 한 1명의 생사 여부와 소재지가 본보 추적을 통해 확인됐다. 특히 이 사람은 1950년 7월 청주에서 북한군에 강제징집을 당해 남북을 오가며 모두 3번(총 6년)의 군복무를 한 것으로 나타나, 전쟁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보는 6월 10일자 3면과 11일자 1면으로 보도했던 충북 연고자 12명 중 편지를 4통으로 가장 많이 썼으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100호'를 받는이 주소지로 하고 있는 '전종대'라는 인물을 지목, 인물 추적에 나섰다. 추적 방법은 현주소지인 강서1동 주민센터→현암동 통장→현암동 노인회장→현암동 경로당회장 수순을 밝았다. 그 결과, 강제징집 당시 마을인 현 강서1동에 동생 전종성(75) 옹이 생존해 있고 그를 통해 현재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형 전종대(83) 옹과 통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으로, 편의상 존칭은 생략했다. -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북으로 가게 됐나. "청주에 들어온 인민군들은 1950년 7월 청주, 청원지역 2천여명의 장정들을 시내 모 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강제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했던 예견서를 말한다. 도참, 도교, 풍수지리설적인 사상이 혼합돼 있다. 그러나 정감록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원전 정감록으로 일컬어지는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의 두 아들 이심·이연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내용은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백 년을 논하고 있다.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정감록에 이씨 조선 이후의 왕도로 등장하는 계룡산은 풍수적인 입지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산태극 물태극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돌아겨 나가고 있고, 물길 또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계령산 암반 곳곳에는 정감록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각인돼 있다. 이중 가장
33.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중) ■ 사이고와 야마가타가 보낸 스파이들 메이지유신 직후 사쓰마와 토사, 그리고 조슈번의 군대가 도쿄에 들어와서 고신페이(御親兵)라는 정부의 직속 군대로 편성되었다. 그 핵심은 4개대대 5천명을 가세시킨 사쓰마번의 병력이었다. 이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부와 군의 중심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주장자였다. 조선에서 천황이라고 기재한 국서 받기를 거부하자 침략을 주장한 것이다. 1872년 그는 외교사절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 1842~1917)의 일행 속에 스파이들을 포함시켰다. 그중 육군소좌 벳부 신스케(別府晋介)가 2개월 간 정탐을 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을 유린하는 데는 일본군 2~3개 중대면 충분하다.” 이때 만주로 간 육군소좌 이케노우에 시로(池上四郞, 1842~1877) 등이 돌아와서 「만주시찰복명서」를 제출했다. 이 복명서는 흑룡회에서 펴낸 『서남기전(西南記傳)』에 수록되었는데, 한국과 만주의 지형 정세 군대 재정 풍속 등을 정탐해온 것이었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西南)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결하자 메이지 군대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는 '죽정내'라는 다소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화산 삼거리에서 다소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여말선초 문신인 최유경(崔有慶)이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짓고 만거한 데서 '죽정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정내'라는 지명은 한글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竹亭川'(죽정천)으로 표기돼야 논리적으로 맞는다. 지금은 마을 앞에 초평저수지라는 거대한 담수호가 생겨났지만 과거에는 '川'이 흐른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1872년 진천현지도를 보면 죽정내는 '竹亭川'으로 표기돼 있고, 당시 존재했던 주막이름도 '竹亭店'이다. 고려말의 최유경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보수파에 속하던 인물이다. 그는 역성혁명이 아닌 왕씨 고려의 존속을 원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일파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했다. 당시는 음력 6월로 정황상 막 우기가 시작됐다. 그런 탓인지 압록강을 건너려는 과정에서 익사자가 속출했다.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첫번째 여울에
속보= 재미 언론학자 이흥환 씨가 공개한 7백여통의 미군노획 편지 중에는 '받는이'(수취인)의 주소가 충청북도로 돼 있는 것이 모두 12통 존재하고 있다.(5월 10일자 3면) 당시 발신인(보내는이)들이 편지를 작성한 시점은 6.25 동란 와중인 63년 전으로, 미군이 평양으로 진격한 1950년 가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당시 편지를 쓴 주인공들 중 일부는 아직 생존해 있거나, 6.25 휴전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받는이'의 대부분은 참전하지 않은 후방의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남북 이산가족찾기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편지를 쓴 주인공 △받는 이의 주소 △'누가 → 누구에게' 등을 상세히 소개한다. ①, ②, ③, ④는 어떤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 입대한 '전종대'가 고향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의 후배 최수철, 누이 이순섭·순옥 등 2명 그리고 남동생 종옥 등 4명에게 보내려고 한 편지다, ⑤는 리충기가 복무지 황해도에서 충북 음성군 맹동명 쌍정리의 리덕기에게 부치려고 한 편지로, 둘은 부자간이다. ⑥과 ⑦은 평남 성천군의 김동빈이 충북 진천군 당부 김성래 등에게
배달 안 된 6.25 편지들이 63년만에 무더기로 공개됐다. 특히 이들 편지 중에는 충북을 받는이(수취인)의 주소로 한 것도 10여통이 넘어 지역적인 관심도 끌고 있다. 재미 언론학자 이흥환(워싱턴 KISON 선임 편집위원) 씨가 얼마전 미군이 평양 진격 때 노획, 미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오던 당시 편지 일부를 '조선인민군 우편한 4640호'라는 책을 통해 공개했다. 이씨는 전체 1천17통(엽서 포함)의 편지 중 113통은 편지글 형태로 공개하고, 나머지 616통은 분량상 받는이의 주소만을 공개했다. 이들 편지는 6.25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0년 가을 평양에 소재한 조선인민군 우편함 OOOO호 등을 통해 가족, 연인, 친구 등에게 부친 편지들이나 아직껏 배달되지 못한 것들이다. 특히 이들 중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 등과 같이 받는이의 주소가 충북으로 돼 있는 것도 10여통이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이산가족찾기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를 소개하면 '최석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민군 병사는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에 살고 있는 형 석영 앞으로 '형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사진) 편지글
고려시대에도 기녀문화가 존재했다. 이와 관련, 고려사 명종 12년 2월 을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옥천서 일어난 사건으로 8백여년 전의 일이다. "관성(管城) 현령 홍언(洪彦)이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고, 음황하여 절도(節度)가 없으므로, 벼슬아치와 현민들(吏民)이 언(彦)의 사랑하는 기녀(妓)와 기녀의 어미 및 형제를 죽이고 드디어 언(彦)을 붙잡아 유폐하니…"- 인용문에 등장하는 관성은 지금의 옥천을 의미한다. 조선의 대문장가 정철의 묘가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에 있다. 정철은 기녀들과 염문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만큼 관련 시조도 많이 남겼다. 정철은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자를 건의했다가 선조의 미음을 사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른바 '건저의 사건'으로, 이때 그곳에서 만난 기녀가 '진옥'이다. 먼저 정철이 매우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수작을 건다. '옥을 옥이라 하거늘 광옥만 여겨떠니 /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일시 적실하다 /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가 하노라.'- 이해를 위해 일부 고어는 현대문으로 바꿨다. 기녀 '진옥'도 답을 했다. 역시 성적 은유를 담고 있다. 이 시조 역시 '근화악부'에 실려 있다. '
충북도정사의 최대 치욕으로 6.25 한국동란 와중에 발생한 '청주사건'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여기서 교훈을 얻으려면 당시 사건을 있는 그대로 후대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본보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951년 5월 26일에 발생한 '청주사건'의 실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당시 신문보도, 이승우씨가 저술한 '도정 반세기' 그리고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비교·분석했다. 청주사건은 1951년 5월 공비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받고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아 충북도청 건물 일부와 국가서류 등이 불타고, 또 경찰관 등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공비들은 청원 낭성면에 집결해 있다가 새벽 어둠을 틈타 상당산성-우암산 루트를 이용해 청주에 침입, 충북도청·도지사관사·청주교도소 등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사건은 국가 공문서 등이 불타면서 자료마다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실체 규명이 절실하다는 주장이 존재해 왔다. 1951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당시 충북도지사(이광)와 내무부의 보고 내용이 서로 점을 5줄 제목으로 기사화하는 등 크게 문제삼았다. 먼저 동아일보는 '청주사건'과 관련해
기녀(妓女) 제도의 발생에 대해서는 전쟁 점령지에서의 여자 획득설, 부모 잃은 고아, 부모의 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과부의 사생아, 역적의 처자, 음란함으로 타락한 여자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기녀의 기원을 '고려가 후백제를 쳐들어 갔을 때(…)사내들은 노를 삼고 여자들은 비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우리나라 기녀가 시작됐다"라고 적었다. 여러 설중 전쟁에서의 점령지 여자 획득설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옛그림을 보면 기녀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는 미인의 조건으로 이른바 3白, 3黑, 3紅을 얘기했다. 3白은 살결, 치아, 손이 흰 것, 3黑은 눈동자, 눈썹, 머리카락이 까만 것, 3紅은 입술, 볼, 손톱이 붉은 것을 말한다. 다만 얼굴은 지금의 계란형보다는, 신윤복(申潤福'1758 ~?)의 그림 '미인도' 같이, 살이 약간 통통하게 오른 모습을 좀더 미인으로 쳤다. 조선시대 기녀나 기생들에게는 '해어화'(解語花)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에게
노학자의 현역 사실상의 마지막 발표 화두는 백제 박사(博士) 제도였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과 백제학회가 지난 1일 청주박물관 강당에서 '미호천 유역의 백제사'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가졌다. 발표는 '백제 박사제도의 운영과 변천'(양기석 충북대교수·사진), '백제사 신출토 자료의 음미'(주보돈 경북대교수), '미호천유역 백제고분의 양상과 성격'(박중균 충북대박물관), '충북지역의 백제성곽'(김호준 중원문화재연구원)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양 교수의 이날 발표는 정년을 앞두고 갖는 사실상의 마지막 발표여서 안팎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었다. 백제의 박사제도는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정설화돼 있다. 그러나 양교수의 이날 발표는 이같은 내용에서 몇 걸음 더 들어가 공간적으로는 한·중·일 동양 삼국, 시간적으로는 6세기까지 학문적인 영역을 넓혔다. 그는 '박제 박사는 당대 유학자였을 것이다'라는 일반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백제 초기 박사는 내국인이 아닌 漢人系(한인계)였고 △무령왕은 이를 오경박사제로 정비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백제 박사제도는 6세기 이후에는 직능의 세분화가 일어나 의학, 불교건축 등 장인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하게 된다
[충북일보]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로 충북은 취업자 10명 중 3명이 6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국가통계포털을 분석한 결과 지난 5월 전국 취업자는 2천891만5천 명으로 이 가운데 23.1%인 667만9천 명이 60세 이상이었다. 월별로 보면 지난해는 1월(540만4천 명), 2월(577만2천 명), 12월(596만4천 명)을 제외한 9개월은 60세 이상 취업자는 600만 명 대을 유지했다. 올해는 1월(575만4천 명)을 제외하고 2월부터 5월까지 600만 명대를 기록 중이며 2월 606만9천 명, 3월 636만7천 명, 4월 656만6천 명, 5월 667만9천 명 등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충북은 5월 기준 취업자 97만 명 가운데 60세 이상은 27.4%인 26만6천 명으로 집계됐다. 충북에서도 60세 이상 취업자 증가세는 꾸준하다. 지난 2014년 5월 기준 전체 취업자 수 대비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6.8%였으나 2019년 5월에는 21.0%로 올라섰다. 이어 2020년 5월 22.1%, 2021년 5월 23.4%, 2022년 5월 25.8%, 2023년 5월 26.2%로 증가 추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자신의 돈을 훔쳐 갔다고 생각해 흉기를 들고 지인들을 위협한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진천경찰서는 A(41)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13일 밝혔다. A씨는 지난 9일 오후 7시 45분 진천군 광해원면 자신의 주거지에서 지인 B(59)씨와 C(54)씨에게 흉기를 들고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당시 A씨는 술을 마시던 중 주머니에 있는 돈이 없어져 이를 찾다가 B씨와 C씨가 돈을 가져간 것으로 생각하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임성민기자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