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지명 '금강'(錦江)은 의외로 역사가 짧은 조선말기 쯤에야 독립적으로 대중화되면서 완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충청인의 젖줄인 금강(총길이 401.4㎞)은 남한에서 세번째로 긴 강으로, 그 수계 주변에 '금강 역사문화권'을 잉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임선빈 박사의 '금강의 지명 변천과 국가제의' 논문에 따르면 '錦江'이 고문헌 속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정도전(1342~1398)의 '삼봉집'이다. 정도전은 1377년(우왕 3) 전라도 나주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충남 공주에서 숙박을 하게 됐고, 이때 '題公州錦江樓'(제공주금강루)라는 한시를 짓게 된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돌아오는 길에 또 금강 머리에 온 것을(歸來又到錦江頭) / 다만 강물이 유유히 흘러감을 볼 뿐(但見江水去悠悠) / 세월도 머물러 주지 않음을 어찌 알리(那知歲月亦不留) / 이 몸은 저 구름마냥 둥둥 떴으니(此身已與秋雲浮) / 공명이나 부귀 다시 무얼 구하리요(功名富貴復何求) /…/.'- 제목뿐만 아니라 시문 중에 '錦江'이라는 지명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조선중기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에도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이때의 금강은 지금의 충남 공주 일대의 수계만을
가마는 집모양 처럼 생겼으면서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기구를 말한다. 고구려 안악고분의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 가마가 등장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가마를 이용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 가마의 한 종류인 채여(采輿)를 설명하는 내용이 장문으로 수록돼 있다. '위에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인용문의 '인갈'은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탈 수 있는 가마로는 연(輦), 여(輿), 가교(駕轎) 등 3종류가 있었다. 왕실에서는 '덩'이라는 가마도 사용했으나 이는 공주나 옹주가 타던 것이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지금의 초정)를 찾았을 때 어느 가마를 이용했는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연'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먼길을 거둥할
'진짜 개똥쑥이라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음성 소이면 비산리에 소재하고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인삼약초연구소'가 21일 보도 자료를 발표, 유사 개똥쑥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개똥쑥의 추출물이 항산화와 암세포를 억제하는 효과가 탁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이를 재배하는 농가와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같은 영향으로 전남 곡성, 경남 산청, 강원도 지역의 농가들 사이에서 토종 신소득 작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유행을 타고 개사철쑥, 더위지기, 사철쑥, 일반쑥 등 이른바 유사 쑥류가 개똥쑥으로 둔갑돼 유통되면서 재배농가와 소비자 모두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인삼약초연구소 이정훈 박사는 이에 대해 "개똥쑥이 일반 쑥과 가장 다른 점은 우리가 봄에 즐겨먹는 쑥과 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난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개똥쑥 꽃은 쑥 종류 중에서 가장 작고(꽃송이 평균길이 1.33㎜, 꽃송이 평균너비 1.27㎜) △줄기는 하나로 곧추 서며 △하부 잎은 4~5개로 갈라져 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토종약초를 재배할 경우 먼저 전문가에게 정확한 약초의 기원을 확인해야 오용 재배를 사전에 예방발 수 있다"며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
장례의식요(일명 상여소리)는 생로병사의 마지막 여정이자 일생의 최종 관문에 등장하는 전통 노랫가락이다. 상여소리는 과거에는 흔치않게 들을 수 있었으나, 장례문화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제 이를 쉽게 접할 수 없다. 청주대학교 이창신(음악교육과) 교수가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과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의 도움을 받아 '충북의 장례의식요'를 3백여쪽 분량으로 펴냈다. 특히 이번 저서는 장례의식요를 단순 채록한 것을 넘어 상당부분 이를 악보화하고 있어, '전승의 틀'을 보다 확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저술은 노한나(옥천 동이초), 노미란(영동 미봉초) 교사와 함께 도내 12개 시군에서 발품을 팔아 채록한 90여곡 중 40여곡을 악보화하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청주 1, 제천 2, 충주 2, 괴산 5, 단양 15, 보은 6, 영동 3, 옥천 4, 음성 1, 증평 1, 진천 1, 청원 1곡 등으로 백두대간 자락에 상여소리가 많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례의식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장례의식요는 고개 하나, 냇가 하나 건너면 다를 정도로 변형이 심하다. 그러나 대개 출상 하루전의 '대돋음소리, 망자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설치된 개마무사(鎧馬武士) 조형물을 둘러싸고 왜색 시비가 일고 있다. '개마무사'는 말(馬)도 철갑으로 무장을 한 무사라는 뜻으로 공격시에는 돌격대 역할, 방어 때는 방호벽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왔다. 충주시는 지난 2007년 7월 고구려비 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실내 입구에 고구려 개마무사 조형물을 설치했다. 그러나 개마무사가 쓴 투구가 고구려 기마병이 아닌, 전통시대 일본의 무사 모습을 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 무사는 대부분 '조우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 조우관은 한자 '새 鳥', '깃 우'(羽) 자로, 새의 꼬리 깃털을 머리에 장식한 것을 말한다. 주로 꿩의 꼬리깃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만주 집안현의 통구 12호 고분에는 조우관을 쓴 2명의 무사가 그려져 있다. 한 무사는 말을 타고 전투를 하고 있고(사진), 또 다른 한 명의 무사는 적을 사로잡아 막 목을 베려하고 있다. 이때 동일 고분 벽면에 그려진 2명의 무사는 모두 같은 모양의 조우관을 쓴 모습으로, 당시 화공(畵工)은 이를 마치 '펜촉 모양'과 함께 붉은색으로 처리했다. 묘사 기법은 약간 다르지만 조우
경기도 죽산-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지금의 17번 국도)은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대로와 더불어 일본 사신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에 도착한 일본사신은 영남대로인 문경-수안보-달천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다. 반면 남해안 내이포(乃而浦)로 도착한 사신은 창원-성주-옥천-청주-죽산-용인을 경유한 뒤 한강을 건넜다. 내이포는 지금의 진해를 말한다. '내이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고…'(由乃而浦來者 經昌原 星州 沃川 淸州 鎭川 竹山 龍仁 漢江入京).-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3개 대로 중 세번째 대로를 이용, 죽산을 거쳐 1444년 3월 1일 진천 북평천 가에 도착했다. '거가가 진천현 북평천 가에 머물렀다(駕次于鎭川縣北平川邊).- 인용문에 등장한 북평천은 고유지명은 아닌 진천 읍치의 북쪽 하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에서 휴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어가가 진천에서 초수리(지금의 초정)까지 가는 데 있어, 어느 길을 이용했는지 실록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형과 당시 도로현황 등을 감안할
'충북전체 430명대 안동시 348명.' 충북출신 독립유공자 포상 비율이 '충절의 고장'을 무색하게 할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는 일제강점기 행형(行刑) 기록물중 충북출신 재판 판결문을 집중 분석했다. 그 결과, 충북출신과 관련된 판결문은 총 458명에 1천32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중 151명은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에 해당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후손들의 노력 부족으로 인하여 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독립 유공자 포상 기준은 여러가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하나, 일반적으로 '3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받으면 포상 요건을 갖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교수의 이번 분석도 이같은 기준을 따랐다. 나아가 박교수는 미포상자 151명을 △의병계열 △3.1운동 계열 △기타 계열 등으로 분류, 다른 면을 살펴봤다. 그 결과, 3.1운동 계열 60명, 기타계열 51명, 의병계열 40명으로 3.1운동 계열이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는 단순 비교로, 형량(刑量)을 기준으로 하면 의병계열이 무거운 형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주역은 음양오행설을 낳았고, 그 음양오행설은 우리나라 전통의학의 이론적인 바탕이 됐다. 주역에서는 사람의 머리는 둥근 하늘을 닮았기 때문에 둥글고, 발(足)은 각진 땅을 닮았기 때문에 각져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하늘은 양(陽), 땅은 (陰)이 된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가의 남성들은 하늘의 양기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갓(笠)을 썼고, 여성들은 땅의 음기를 더 흡수하기 위해 치마입기를 선호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유체계는 철저하게 하늘(天)과 땅(地)을 향했고, 그 중간에 사람(人)이 위치했다. 천지인 사상은 음식문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하늘은 사람에게 '오기'(五氣)를, 땅은 '오미'(五味)를 준 것으로 봤다. '오기'는 덥고(熱), 따스하고(溫), 서늘하고(凉), 춥고(寒), 보통의 기운(平)을 일컫고 있다. 이에 비해 '오미'는 단맛(甘), 짠맛(鹽, 신맛(酸), 쓴맛(苦), 매운맛(辛)을 의미하고 있다. 이중 '오미'는 입으로 들어가서 소화기관에 갈무리 되며 그중 영양물질은 '오장'의 기운을 만들어 준다고 한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섯가지 맛을 골고루 지닌 식물이 바로 이름 그대로인 오미자(五味子)다. 갑자사화를 당해
최근의 폭염현상에는 기상 상식도 잘 안 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철 한낮기온은 열섬현상이 일어나는 도심지역이 지열이 상대적으로 낮은 시골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륙 산간지역으로 도심과 거리가 먼 단양 영춘지역이 연일 충북의 한낮 최고기온을 수립하고 있다. 영춘지역은 8일 35.8도(오후 2시 46분 현재)를 기록, 이날 도내에서 한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게 올라갔다. 이밖에 가곡지역은 35.0도(오후 3시 53분)를 기록, 이날 도내 두번째 높은 기온 분포도를 보였다. 은 8일 오후 충북도내 한낮 최고기온에 대한 분포도로, 다른 지역보다 짙은 색으로 나타나는 곳이 각각 영춘(오른쪽 상단)과 가곡(왼쪽 하단)이다. 청주기상대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기상이론으로 설명했다. 기상대 관계자는 "중국 쪽에서 서풍내지 남서풍 계열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동쪽으로의 이동거리가 길수록 공기가 더 더워진다"며 "충북의 가장 동쪽에 해당하는 단양 영춘지역이 최근의 폭염에서 연일 한낮기온을 나타내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 한반도 전체를 봐도 울산, 포항, 영덕, 강릉 등 서해에서 상대적으로 먼 동해안 지역의
조선시대 지방의 도로는 형식상 공로(公路)와 사로(私路)로 구분됐다. 공로는 관료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니는 길을 말한다. 가령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충주를 순력하려면 청주-청안-괴산-음성-충주 등의 공로를 택했다. 반면 사로는 장돌뱅이들이 오갔던 길로, 상로(商露) 혹은 간로(間路·샛길)라고 불렀다. 국가의 동맥으로 오늘날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대로'(大路)라고 표현했다. 시대별로 기준은 다소 달라, 6대로, 9대로 혹은 10대로 등으로 분류됐다.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1770년·영조 46)에서 전국의 대로를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로 가는 길은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 등으로 각각 명명했다. 같은 해 홍봉한(洪鳳漢)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전국의 대로를 국왕이 있는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 제 1로, 경흥 제 2로, 평해 제 3로, 동래 제 4로, 상주→통영 제5로, 삼례→통영, 제 6로, 해남→제주 제7로, 갈원→보령 제8로, 강화도 제 9로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한양∼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세종은 재위내내 여러 질환을 앓았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안질을 심하게 앓았다. 때문에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해 정사의 상당부분을 3정승이 처리토록 했다. '의정부서사제'는 3정승이 국정을 논하고 또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첨사(詹事)제도라는 것도 신설해 세자(후에 문종)의 정사 결재권을 크게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회를 할 때 세자에게 '남면수조'(南面受朝)하도록 했다. 남면수조는 말 그대로 남쪽을 바라보면서 조회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왕에 준하는 대우였다. 모두가 세종의 건강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었다. 세종 재위26년(1444) 청주에서 '호초맛 나는 물이 있다'는 첫 보고가 올라왔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 다음은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문장이 이
역사에 있어 '가정'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개혁군주 정조(正祖·1752~1800)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조선의 운명이 바뀔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조는 말년에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인 절후(癤候)라는 악질을 심하게 앓았다. 정조는 병세가 최고의 위험수위에 달할 무렵 약원(藥院)의 신하인 심인과 정윤교를 불렀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잠을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종기 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 이때 약원의 두 신하가 약이 되는 음식으로 권한 것은 '푹 곤 붕어의 국물'이었다. "피고름이 이처럼 많이 나왔으니 근이 이미 다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앞으로는 원기를 보충하는 면에 한층 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어고(附+魚魚膏)를 본원에서 봉하여 올리겠습니다."- '부어고'가 바로 푹 곤 붕어의 국물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부어' 혹은 '즉어'(魚+卽魚)로 적었던 붕어는 음식을 넘어 약재로도 많이 인식됐다. 조선후기 인물로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홍만선(洪萬選·1643~17
원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국 고려의 임금을 자국영토 후미진 곳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고려 27대 임금인 충숙왕도 그런 신세가 됐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수도 연경에서 1만5천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익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世事는 시끄러워 귀담을 수 없는데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 슬프다 나 홀로 애만 태우네.'- 이처럼 익재는 고위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작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나머지 8점의 익재영정을 그린 사람과 시기는 각각 다르다. 보은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보관돼 있던 익재 영정은 한번 도난을 당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자산영당 익재영정은 그의 직계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 이른바 폐비윤씨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 시기기에 이르러 생모
40. 일본군에 이식한 독일 동원사단 편제 ■ 독일의 군단급 야전훈련 참관1884년 8월 29일 독일제국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육군경 일행이 근위군단의 전투연습을 참관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연습은 크리스트 군단장이 지휘하고 근위보병 제1사단과 제3사단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동군과 서군이 역할을 설정해서 공격과 방어를 맡았는데, 2개 여단과 야포연대, 그리고 기병사단과 저격병대대가 동원되었다. 공병중대와 병참중대까지 참여한 본격적인 전투훈련은 놀랄 정도였다. 기록자인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소장은 수백 미터 전방에 포진한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병들과 저격병의 공격 장면을 기록하였다. 또 중대 단위로 가상적의 공격을 막는 연습을 지켜보면서 야외숙영 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하였다. 병사들은 각자 식품을 수령하여 조리해서 먹었고, 숙영지 주변은 바람막이를 해서 추위를 피하였다. 장교는 각자 개인 천막을 사용하였다. 흥미롭게 기술한 내용이 주보와 군악대였다. 주보는 병사들이 받은 봉급으로 음식물을 사먹도록 숙영지 근방에 두었다.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병사들이 쾌활하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은 특이했던 모양이다. 근처 주민들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와 함께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두루 능해 대가풍(大家風)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9개의 초상화를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른바 그의 호를 딴 '익재영정'들이다.이처럼 이제현의 초상화가 많은 것은 경주이씨 후손들이 그의 인물됨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많이 이모(移模)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원작을 본떠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9점의 이제현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본(국보 제 110호), 가산사 소장본(전남 문화재자료 164호), 구곡사 소장본(전남 유형문화재 189호), 수락영당 소장본(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비지정), 구강서원 소장본(경북 문화재 제 90호), 장산영당 소장본(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72호), 용암영당본(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도동영당본(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기리), 도론영당본(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섬리) 등이 있다.원작으로 평가받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8점의 작품중 우리고장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소장돼 있던 초상화가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현재 경주이씨 장산문중에서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이제현 초상화는 가로 96㎝, 세로 165㎝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그렸다. 그리고
술기운을 푼다는 의미의 '해장'은 '술'로도 풀 수 있고, 따근한 '국물'로도 풀 수 있다. 전자는 주당이 주로 하는 방법으로 '해장술', 후자는 일반인이 즐기는 방법으로 '해장국'이라고 표현한다. '해장술'은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해장술을 이렇게 노래했다. '해장술 느긋이 먹고 훈훈한 기운 볼에 가득하니(卯酒十分O滿O) / 연지 한 덩이 온 얼굴에 발랐는 듯(燕脂一顆抹渾顔) / 벌과 나비 나를 업신여기는구나(等閑蜂蝶應欺我) / 청춘을 헛보내면서 아직 느끼지 않는다고(虛度靑春尙未觀).'- 굳이 원문의 한자를 함께 실은 것은 특정한 낱말을 눈여겨 보라는 뜻에서 이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릴 정도의 조선시대 대문호이다. 그도 해장술에 얽힌 감정을 시로 남겼다. '깊숙한 주렴 장막에 낮 그늘은 기나길고(深深簾幕晝陰長) / 흰 갈옷 오사모 차림에 온몸이 서늘한데(白葛烏紗一頂O) / 해장술이 깨기도 전에 또 낮밥을 먹고는(卯酒未醒加午飯) / 돌아와서 방금 한바탕 낮잠에 빠져들었네(歸來方到黑甛鄕).'- 인용한 두 개의 시 원문에는 특정 낱말이 공통적으로 들
조선시대에는 강 이름을 구간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당연히 우고장 문화 젖줄의 하나인 금강도 이 범주에 속하고 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은 금강의 각 나루, 즉 津(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 물은 황간ㆍ영동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대개 구역별 강이름은 나루의 이름의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등강은 옥천군 이원면 적등진 앞을 흐르던 강이고, '化仁江'(화인강)은 화인진 앞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지금의 안내~안남면 수계로 볼 수 있다. '화인'이라는 예쁜 이름은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등장한다. '대천(大川)은 적등진이 이산현에 있고, 화인진(化仁津)이 군의 동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보은에 이르기 29리, 서쪽으로 회덕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무주(茂朱)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3리이다.' 세종실
사라진 북한 지명 중에 '덕원'(德源)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의 문천시로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잘 모르면 원산 북쪽을 생각하면 된다. 1674년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남인은 1년(기년복), 송시열은 9개월(대공복)을 주장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논쟁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입장에서 보면 형(소현세자)을 잃은 효종을 장자(長者·맏아들)로 볼 것이냐, 차자(次者·둘째)로 볼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으로, 1차와 달리 송시열은 이 논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유배를 간 곳이 서두에 언급한 함경도 덕원이다. 그러나 우암은 이 유배 때 그리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동생 '時燾'(시도)와 時杰(시걸)이 그곳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진천(鎭川)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덕원(德源)에 이르러 함께 있다가, 4월에 성보(誠甫·송시도 지칭)는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 수보(송시걸
한자는 대체로 꼬리가 긴 새에는 '새 鳥', 꼬리가 짧은 새에게는 '새 추'(나무木없는 椎) 부수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예로는 '갈매기 鷗'(구), '닭 鷄(계), '비둘기 鳩'(구), '소리개 鳶'(연), '고니 鵠'(곡) 자 등이 있다. 반면 후자의 예로는 '참새 雀'(작),' 기러기 雁'(안), '병아리 雛'(추) 자 등이 있다. 꿩의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라고 한다. 이중 장끼는 깃털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꼬리가 눈에 띄게 긴 편이다. 이에 비해 까투리는 색이 덜 화려하고 꼬리는 짧은 편이다. 꿩의 한자는 '雉'(치)로 적는다. 꼬리가 짧은 까투리를 기준으로 하면 '雉' 자가 맞아 보이지만, 꼬리가 긴 장끼와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한자의 혼란상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꿩의 꼬리를 머리 장식으로 즐겨 사용했다. 그것도 단순한 사용이 아닌, 신분과 위계를 드러내는데 주로 사용했다. 중국 역사서인 위서(魏書) 열전(列傳)의 고구려조에는 '머리에 절풍모를 썼는데 그 모양이 변형을 하였다. 새깃을 꽂았는데 귀천의 차이가 있었다(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벼슬이 높은 자는
전회 언급한 옥천 이원면 적등진(赤登津)은 교통량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경상도 김천과 지레 사람들이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적등강 수변에 위치한 나루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적등진'으로, 그 루트는 영동-옥천-보은-청주가 됐다. 적등진은 이 루트 중 영동-옥천 사이에 위치했고 그 옆에는 적등원과 적등루도 존재했다. 적등진 주변은 지금도 풍광이 매우 빼어난 편이다. 이 때문인지 뭇 문객들이 적등루(赤登樓)를 찾아 시를 많이 읊었다. 고려말 사대부 출신인 조준(趙浚·1346∼1405)은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다. 특히 그는 경제이론에 밝아 당시 세법의 근간이 되는 과전법을 입안했다. 그도 적등루를 올랐다.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서두에 언급한 것과 달리 적등루가 한가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직(李稷·1362~1431)이 지은 시에는 적등루 일대가 대단히 혼잡하게 그려져 있다.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
문화가 권역을 이루는 데는 산줄기뿐만 아리나 물줄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백두대간은 충청도와 경상도 문화권을 구분하고 있다. 충북은 다시 남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권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것의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는 이른바 한남금북정맥이다. 전븍 장수 신무산(神舞山·897m)을 본류 발원지로 하고 있는 금강은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연기, 공주, 부여, 논산, 강경 등 10여 개의 지역을 거치며 397㎞를 달린 끝에 서해에 도달한다. 현재 지류는 '하천', 본류가 되는 수계는 '강'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곰나루'(웅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 '금강'도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금강은 구간별로 다르게 불렀다. 영동 심천을 통과하는 금강은 지프내(심천), 옥천 이원에서는 적등강(赤登江),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수계에 딸린 나루터(津)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그 근원이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와 양산(楊山) 서쪽을 지나 영동현(永同縣)에 들어가고, 이산현(利山縣)에 이르러 적등진
한자 '炙'(적)은 '저녁夕' 자 비슷한 것과 '불火' 자로 구성돼 있다. 이때 전자는 고깃덩어리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炙' 자는 고깃덩어리를 불 위에 굽는 모습이 된다. 중국 동진(東晋)의 간보(干寶)가 지은 수신기(搜神記·4세기 무렵)에는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은 이민족의 음식이다. 중국이 이것을 숭상하여 귀족과 부잣집에서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먼저 내놓는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중 후자 '맥적'은 부여의 구이음식을 지칭하고 있다. 흔히 만주지역의 예맥족을 우리민족의 역사시대 시원으로 보고 있다. 예맥족할 때의 '맥'은 그런 역사적 배경하에 수신기에 등장했다. 중국 후한때의 역사서인 '석명'(釋名)도 '맥적은 고기를 통으로 구워 각자가 칼로 잘라가면서 먹는 것으로, 호맥(胡貊)에서 온 것'이라고 적었다. 이때의 호맥 역시 부여족을 일컫고 있다. 이처럼 우리민족의 구이문화는 문헌상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삼겹살 구이도 분명히 불에 집적 굽는 직화(直火) 음식의 한 종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불판에 굽는 삽겹살 문화'는 역사가 매우 짧은 1970년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서 보듯 1960년대 이전에는 돼기
조선시대 내섬시(內贍寺)라는 내직 기구가 있었다. 내섬시는 호조 소속으로 궁중에 공급되는 각종 물품을 관리했다. 세종대 내섬시에 근무하면서 고문헌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로 김흔지(金사람인변+完之)가 있다. 세종은 보위에 오른지 20년이 넘으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이중 안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때문에 세종은 1444년에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봄·가을에 걸쳐 두번이나 찾게 된다. 이때 초정약수와 관련된 일을 전담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김흔지이다.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별장식으로 머무는 곳을 행궁, 또는 이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임금이 행궁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행차'가 아닌 거둥으로 표현했다. 1444년 음력 1월 27일 우리고장 초정약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木川縣)과 전의현(全義縣)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리고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충북일보] 청주시는 오는 6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청주페이 인센티브 지급방식을 캐시백 형태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일정 금액을 충전하면 인센티브가 동시에 지급되는 선불형 방식으로 운영해왔는데 오는 6월 1일부터는 충전된 금액을 사용하면 결제 후 인센티브가 적립되는 후불형(캐시백)으로 변경된다. 시는 6월 인센티브예산으로 12억원을 배정했고, 인센티브 지급률을 7%로 설정했다. 인센티브는 사용금액 30만원 한도 내에서 결제 즉시 지급된다. 기존에는 충전하는 순서대로 인센티브가 지급됐다면 6월부터는 사용하는 순서에 의해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따라서 월 배정예산이 소진될 경우 종전과 같이 인센티브 지급은 중단된다. 다만 결제 후 인센티브가 지급되는 캐시백의 특성으로 인해 월별 인센티브 예산의 소진 속도는 다소 늦춰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는 청주페이 인센티브 지급방식을 캐시백 형태로 전환하는 근본 목적을 부정유통 방지에 두고 있다. 선불형의 경우 인센티브가 포함된 카드를 불법적으로 거래할 가능성이 있어 정부에서도 캐시백으로의 전환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현재까지 청주지역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발생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오송참사와 관련해 김영환 충북지사와 이범석 청주시장의 중대재해처벌법 기소 여부가 조만간 결정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검찰의 기소 여부는 이르면 다음주, 늦어도 6월 중에는 결정될 것이란 것이 지역정가의 예상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줄여서 중처법은 사업 또는 사업장, 공중이용시설 및 공중교통수단을 운영하거나 인체에 해로운 원료나 제조물을 취급하면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해 인명피해를 발생하게 한 사업주, 경영책임자, 공무원 및 법인의 처벌 등을 규정한 법이다. 오송참사의 발생과 추후 대처에 법적 책임자, 혹은 지역 단체장으로서 김 지사와 이 시장이 제 역할을 했는 지 여부가 관건이다. 현재 검찰은 중처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김 지사와 이 시장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며 기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처법에선 '중대시민재해' 부분을 따로 정리해두고 있는데 검찰은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예산·점검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재해 발생 시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의 조치 등에서 두 단체장이 어떤 책임이 있는가를 따질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