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란이 발생한지 25일 가량이 지난 1728년 4월 10일. 지금의 괴산송면 집에서 청주로 끌려온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4명의 어린 아들을 둔 채 반군 지도자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인자와 이웅좌가 모두 적괴이니 그 아우 이기좌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같은 날 당시 진짜 진천현감이었던 임상극(林象極·?-?)은 효시되었다. 처형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한양으로 끌려간 후 군기시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죄 때문에 효시됐는지 사료에는 죄명이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영조실록에 그 죄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감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이라고 한 것은 역률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진천·회인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는
[충북일보] 풍수상 충북도청의 현재 건물배치 방향은 썩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동방대학원대학교 유춘승 씨의 '풍수적 관점에서 본 국내도청의 입지해석'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미시풍수론은 실재론과 지세론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현재의 건물 배치와 위치를 바탕으로, 후자는 주변 지세를 고려해 풍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실재론으로 본 충북도청의 현재 풍수는 이상적인 풍수상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도청건물 방향과 정문 등이 지세에 관계없이 모두 남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주작은 청주교대 뒷산으로 봐야 하고, 우백호는 무심천 건너편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백호가 좌우가 아닌 물을 건저 존재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게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즉 '남북수'(南北水) 모습의 무심천 물은 충북도청의 정면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이런 모습에서는 당연히 '계수즉지'(界水則止)의 풍수상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계수즉지는 '생기는 물을 만나면 진행을 멈춘다'는 뜻으로, 이같은 지형이어야 배산임수 지형이 형성된다. 반면 지세론으로 본 충북도청 풍수는 점수가 후하게 나오고 있다. 단, 이 이론은
[충북일보]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항일 언론과 사회주의운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며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다. 그는 언론인으로 『독립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를 이끌어갔으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건국동맹 등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여운형의 평생지기 동반자로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다.격랑의 시기 옥천 청산에서 태어나다 조동호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조명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이고, 호는 유정(榴亭)이다. 그가 태어난 1890년대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격랑의 시기였다. 소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5년 사립신명학교(현 청산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1908년 상경하여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하였다. 측량학교는 우편학교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우편학교에는 여운형이 공부하고 있었다. 둘은 이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평생 동지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한동안 측량기사로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과 관련된 것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은 이진동(李鎭東)이라는 경상도 안동 유생이 무신란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했고, 그 목적은 무신년에 창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에서 누락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정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음은 이진동이 상언하는 내용이다. 상언과 상소는 형식이 비슷하나 전자는 평민, 후자는 관료가 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 날짜 정조실록에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당시에 김중헌(金重憲)이라는 영남인이 우연히 우리고장 청주 객점(주막)에 묵었다가 반란군 지도자를 살해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하였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적이 중헌에게 오형(五刑)을 다 시행하였
[충북일보] 1728년 3월 24일. 청안지역 의병들은 이날 먼동이 터올 무렵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이끌던 무신년 반란군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리고 청안현청에서 정중익의 목을 지체없이 베었다. '내가 두 조카와 서종(庶從) 인심에게 말하기를 "종익을 비록 베었더라도 남은 역적이 아직도 많다. 너희들과 더불어 찾아내어 형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라고 했다.'- 잔당에 대한 의병진의 소탕작전도 그 즉시 진행되어 일부는 즉결처분하고 더러는 옥에 가두었다. 여기에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던 임필현(林必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수색하니 즉 필현이 간청의 장을 보관하는 창고 가운데 숨어 있는데 먼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범하지 못하자, 내가 몸소 앞으로 나가 필현을 끌어내어 머리를 검으로 쳤다.'- 임필현은 "그대들이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계책이 망령되어 내놓은 것은 오래지 않아 그 머리와 목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의병들의 설득을 거부하고 말머리를 돌려 정중익에게 돌아갔던 인물이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청안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안현감
[충북일보] 청주시의 새로운 상징물(CI)를 둘러싸고 청주시와 시의회, 시의회 여야간, 여기에 시민단체까지 가세하면서 다자간 갈등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승훈 청주시장이 최근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갈등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청주시의 새로운 상징물은 볍씨를 연상케 하고 있다. 청주시도 얼마전 "소로리 볍씨와 청원생명쌀 등을 '생명의 씨앗'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난 1988년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굴된 소로리 볍씨는 학문적으로 몇 가지 쟁점을 뛰어넘어야 할 과제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현재 소로리 볍씨는 대략 1만5천~1만3천년의 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점은 과연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 좁게는 청주 소로리에 과연 벼 생육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느냐는 점이다. 지질·기후 학자들에 의하면 대략 현생인류인 호모종이 출현한 이래로 지구상에는 4번의 빙하기가 찾아왔고, 1만5천~1만3천년 전은 마지막 빙하기(뷔름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는 시기였다. 기후학상 뷔름기는 대략 5만~1만전까지를 의미하고, 따라서 당시 지구기후는 극한, 한냉, 온냉, 온난 중 한냉으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벼는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16. 권용일 권용일(權用佾, 1884~19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한말 의병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07년 호좌의진을 계승한 이강년 부대에 투신하였고, 제천 천남전투 이래 충주, 문경, 영월, 안동 등지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의병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일년 남짓이지만, 그의 대담함과 불굴의 투지는 후기의병사에서 단연 빛난다.어려서 충(忠)·효(孝)·열(烈)을 마음에 새기다 권용일은 충청북도 청풍군 원서면 덕곡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에서 권태인(權泰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세 함(瑊)을 중시조로 삼는 안동권씨 화천군파로, 17세기 초부터 제천에서 세거해왔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형인 용연(用淵)은 농업으로 가사를 돌봤는데, 둘째였던 그는 11세가 되던 해에 서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은 대내외로 큰 위기상황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갑오개혁을 통해 한국의 내정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 한국에 대한 침탈을 가속화하였다. 이에 대한 한민족의 반일 감정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 봉
[충북일보] 6일이 금년 현충일인 가운데 전국 대부분의 충혼탑이 조선시대 사직단 자리에 서있고, 또 6월 6일로 정한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지난 1956년 4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거해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했고, 이후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던 자리에 충혼탑이 대대적으로 건립됐다. 앞서 일제는 청주의 경우 서공원(현 충혼탑 자리)에 청일·러일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과 도모하여 그곳에다 청일·러일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의 기념비를 세웠다.' 문제는 조선시대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와 곡식신에 대한 제사공간으로 사자(死者)와는 무관했었다는 점이다. 사직의 社는 토지, 稷은 곡식의 신만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전쟁이서 죽은 사람이나 억울하게 죽은 이 등에 대한 제사 공간은 '여단'이라고 불렀고 이때의 제사를 '여제'라고 칭했다. 죽어서 가는 곳이 '북망산천'이라는 설에 따라 주로 고을의 북쪽에 위치했다. 청주의 경
[충북일보] 정황상 의병들의 반격은 1차 전투에서 패한 그날 야간에 준비를 해 다음날 새벽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728년 3월 23일과 24일 사이다. 장담의 조카 경수(景洙)는 순직한 삼촌을 대신해 청안읍치 인근 마을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담의 조카 경수로 하여금 연명겸의 집으로 가게하여 사청리(射廳里)와 상용문리(上龍門里), 용문리(龍門里)와 내외룡동(內回龍洞), 외회룡동(外回龍洞)에서 고르게 선발하게 하고 출신(出身)인 閔道昌과 더불어 거느리고 오게 했다.'- 전통용어 '출신'은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아직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후 경수는 매박리(梅朴里)로 가서 종질인 장태화(張太和), 조강동(釣江洞)으로 가서 권대열(權大悅)을 규합하는 등 60여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마을이름(里)은 '1872년 청안현지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안현에는 읍내면, 북면, 남면, 동면, 서면, 근서면 등 6개 면이 존재했다. 이중 사청리는 근서면, 매박리, 회용동, 조강동 등은 읍내면에 위치했다. 근서면은 지금의 증평일대, 읍내면은 청안면 읍내리에 해당하고 있다. 의병들은 청안현청 가까이 접근해 북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