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신건식(申健植, 1889~1963)은 청주 가덕출신으로 형인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동제사, 대동보국단 등의 단체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그는 1923년 중국군 중교(中校)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에, 1943년에는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제뿐 아니라, 그의 딸과 사위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가족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다.고령 신씨 가문에서 태어나다신건식은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2길 4-24)에서 신용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신성용을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하여 문중촌을 형성했는데, 지리적으로는 상당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산동(山東)
[충북일보] 보은 이제동(李濟東) 역모사건에는 느닷없이 신필대(申必大)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동 역모에 가담한 보은 사람 이흥득이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이귀흥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귀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들이 황간(黃澗)·영동(永同)·청주(淸州)·문의(文義) 등지에 있는데, 청주(淸州)의 신필대(申必大) 같은 이도 여기에 들었다. 네가 우리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필대는 보은이 아닌 청주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728년 무신란 끝난지 5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영조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은 역시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란 청주지역 2인자였던 신천영(申天永)의 가까운 혈족이었다. 당색이 남인이었던 신천영은 신숙주의 후손으로 무신란 당시 이인좌로부터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이는 오늘로 치면 광역단체의 군사업무르르 총괄하는 직책으로, 지역사령관에 해당한다. 신필대는 1728년 무신란 당시 신천영을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신천영을 그를 직접 영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
[충북일보] 15개 지자체로 구성된 전국동주도시교류협의회는 올 하반기 지역행복생활권 사업 공모를 위한 과제를 공동 발굴하기로 하면서 '州자 도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동주도시협의회에는 광주·양주·파주·여주(경기), 원주(강원), 청주·충주(충북), 공주(충남), 전주(전북), 나주(전남), 경주·상주·영주(경북), 진주(경남), 제주시 등 15개 시가 가입해 있다. 州자 도시의 연원은 고려 성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나 조선이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한 왕에게는 성종이라는 시호를 붙였다. 고려 성종 때는 중앙과 지방조직이 완비되었고, 조선 성종 때는 경국대전이 편찬되었다. 고려 성종은 재위 2년(983)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州자 행정명을 붙였다. 이때의 12목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으로 이들 지역이 이른바 '오리지널 州자 도시'다. 그러나 고려 후기들어 州자 도시 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지명 인플레에션'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유는 왕사나 국사가 태어난 고장, 심지어 내시가 중국 왕래 후 이를 기념하여 자기가 태어난 고을을 州자로 개명하였다. 우리지역 제천, 진천, 괴산, 옥천도 이때 州자 고을로
[충북일보] 박여성(朴汝成, 1860~1908)은 제천 사람으로 해산 군인 출신이었다. 평양진위대 소속이었던 그는 평양진위대가 해산 당한 후 청풍으로 내려와 의병장으로 추대되며 후기의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1907년 8월 15일 의병으로 참전하여 1908년 10월 13일 충주 달천에서 일군과 교전하다 전사할 때까지 1년 3개월 여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스에야스(末安)중위가 이끄는 일군과 제천에서 약 4시간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는 등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대한제국의 군인에서 의병장으로박여성은 제천 출신으로 평양진위대에 소속되었던 구한국 군인이었다. 자료의 결핍으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 평강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군인으로 있던 한말의 상황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이 극심해지던 시기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운명을 해결하고자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열강국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국간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헤이그특사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는 헤이그특사 파견의 책임을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
1728년(영조 4) 무신란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조문보(趙文普)가 있다. 그는 노비, 상인 등 하층민이 아닌 보은현감이라는 고위 관료이면서도 무신란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적인 사표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직손이었다. 그는 무신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른바 홍성룡 옥사에 연루되어 옥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칼을 풀어주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했다.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신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칼은 전통시대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중에서 쓰고 있던 형틀도 칼이었다. 이처럼 영조가 죄인을 각별하게 대우한 것은 그가 조광조의 직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통을 지닌 조문보가 무신년 역모에 가담한 것은 민원보와 관련이 있다. 민원보(閔元普)는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조총, 환도, 철편 등
[충북일보] 청주 테크노폴리스 건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예상했던 대로 백제 초기 유적들이 다량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이 청주를 둘러싸고 어떤 쟁패를 벌였는가가 새삼 관심사가 되고 있다. 좀 늦었지만 논문 한 편을 소개한다. 고구려는 지금의 세종시 일대인 금강유역까지 남하하였다. 이 경우 상식적으로 청주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봐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김영관 교수의 '고대 청주지역의 역사적 동향'(백산학보 제 82호) 논문에 의하면 세종시 부강면 남성골산성과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발군된 바 있는 등 고구려는 분명히 백제군을 뒤쫓아 금강유역까지 남하하였다. 실제 충북대 차용걸 교수팀에 의해 지난 2001~2002년에 발굴된 부강 남성골산성에서는 불탄 목책 흔적 외에 시루, 장동호(長胴壺), 금귀거리 등 고구려계 유물이 다수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김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고구려는 금강유역과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청주지역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는 그 근거로 △삼국사지 지리지에 고구려가 청주에 행정구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 △미호천이 자연방어 역할을 한 점
[충북일보]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진천 출신으로서 한국근대사에서 뚜렷하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한 이래, 남·북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유럽과 미주 일대까지 미치는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헤이그 사행과 구미 순방 외교를 펼쳤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13도의군·성명회·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주도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덕산 산직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출계 이상설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가난한 시골 선비 이행우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호는 보재(溥齋)이다. 그의 선대가 진천에 세거한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활약한 이시발(이상설의 11대조)이 조상의 제향을 위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어린 그에게 인생의 중대 전기가 찾아왔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상경하게 된 것이었다.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그는 청년기에도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곤 하였다. 신·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인물로는 김덕삼(金德三)이 있다. 무신란은 정치적으로는 소론+남인이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는 노비+상인 등 당시 소외 계층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괴산에 살던 김덕삼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부호(富戶)였다.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 수사관이 낙형(烙刑)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 형신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 내용을 보면 인용문은 반란에 가담한 어떤 인물이 김덕삼에게 "40~50냥을 꿔주면 사건이 끝난 후 갚겠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50냥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백50만원 정도가 된다. TV 역사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신병주(건국대)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조선시대 양(兩)-전(錢)-푼(分)의 현재 환율은 각각 7만-7천-7백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이 공식대로 하면 50냥x7만원=35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덕삼이 실제 돈을 꿔줬는지는 《영조실록》 등 문헌으로는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장지(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