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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4.01.16 16:27:58
  • 최종수정2014.01.16 16:24:46

조혁연대기자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면, 김옥균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추구했다. 두 사상의 명칭은 다르지만, 한·중·일 삼국이 공존공영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옥균은 삼화주의에 대한 첫 번째 실천으로 당시 청나라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만나고자 했다.

'百千의 호위가 있어도 죽을 때에는 죽는다. 인간 만사가 운명이다. 虎穴에 들어가지 않으면 虎子를 얻을 수 없다. 이홍장이 나를 속이고자 하여 겸양한 말로 맞이하며, 내가 그를 속이고자 하여 그 배를 탄다.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유배 지칭)된다면 즉각 끝이다. 5분이라도 담화의 시간을 준다면 내 것이다.'-<宮崎滔天전집 283쪽>

전집을 쓴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중국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로, 김옥균의 또 다른 일본내 후견자이기도 했다. 인용문 중에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된다면 즉각 끝이다'라는 독백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이는 김옥균 자신도 중국 상해행에 대해 내심 매우 불안해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옥균과 몸종 격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 그리고 홍종우 등은 1894년 3월 23일 여객선 사이쿄마루(西京丸)을 타고 고베항 출발, 3일 후 중국 상해의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했다. 그리고 김옥균은 3일 후인 28일 와다 엔지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신분을 감추고 동행했던 홍종우의 실탄 3발을 맞고 절명했다.

김옥균의 시신을 처리한 사람은 와다 엔지로로, 그는 시신을 일본으로 운구하려 했다. 그러나 상해주재 일본영사의 방해로 인해 배에 싣지 못하는 사이 이홍장의 명령을 받은 청나라 관헌들에게 시신을 빼앗겼다.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데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도 강하게 작용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청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나되 일본식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려 했다. 당연히 청나라에 있어 김옥균은 가시같은 존재였다.

김옥균 시신을 운송하기 위해 청나라 군함 위정호(威靖號)가 동원됐다. 위정호는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김옥균의 시신을 소금에 절였고, 그리고 그 군함에는 암살자 홍종우도 동승하고 있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4월 12일 인천에 도착했고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이를 조선정부에 인도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감사 김규홍의 장계를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중국 병선이 월미도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역적 김옥균(金玉均)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경강(京江)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고종실록 31년 3월 9일자>

양화진에 도착해 다시 난도질을 당한 김옥균의 시신.

1894년 4월 14일. 싸늘하게 주검으로 변한 김옥균은 양화진에서 대역부도죄로 다시 한번 난도질을 당했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사지는 다시 잘리는 능지처참이 행해졌다.

이후 그의 머리는 실종됐고 몸통은 한강에 던져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지는 전국 8도로 보내져 효시(梟示)됐다. 당시는 충주가 충북의 수부도시였다. 따라서 그의 사지 중 하나는 우리고장 충주에도 순회 전시됐다.

홍종우가 입궐하자 대원군은 버선발로 뛰어나왔고 명성황후는 기뻐했지만, 아들(고종)에게 권력을 빼앗긴 흥선대원군은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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