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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아름다움 자태와 기교 - 촉석루와 영모정

  • 웹출고시간2013.11.28 13:07:41
  • 최종수정2013.11.28 13:09:07

진주의 남강 바위 벼랑 위에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명칭을 받고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창건해 일곱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로 장원루라고도 불리웠다.

전란이 발생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촉석루를 포함하고 있는 진주성은 석성(둘레 1천760m)으로 축조됐고,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로 토성이던 것을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석성으로 수축했다.

조서윤 진주시 문화해설사

조서윤 진주시 문화해설사로부터 촉석루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불리웠다.

진주성은 40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군을 대파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왜군과의 2차전쟁 때인 1593년 6월에는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남강가 바위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이다. 흔히 평양의 부벽루와 비교해 북쪽을 부벽루, 남쪽을 촉석루라 불리울 정도로 아름답다.

6.25 한국전쟁 전에는 촉석루가 국보였으나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1960년 5월 시민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진주고적보존회를 통해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진주성은 '일본군이 임진년 전쟁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고 일본 역사책에 나올 정도로 당시 왜군이 참패했던 진주성대첩으로 유명하다. 또 진주성 내 촉석루는 충의를 다한 역사적 인물로 대표적인 논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충의와 공의현장으로 가치가 높은 촉석루는 당초에는 국보였으나 현재 문화재 등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촉석루가 문화재자료로 등급이 하향된 것은 1950년 9월, 6.25 전쟁이 한창일 무렵 비행기 폭격으로 파괴돼 원형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현재 촉석루는 경남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나 국보급으로 승격해야 한다. 6.25때 전부 훼손된 줄 알았으나 대석(받침돌), 돌계단 등의 원형 부재를 확인했으며, 국보 환원과 보물 지정을 가로막았던 설계도(일제강점기 때 설계도 일부)도 찾아냈다.

촉석루 옛 설계도를 비교한 결과, 보수된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30개 기둥 역시 설계도대로 완공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촉석루 중건 당시인 1957년 1월 19일 제6회 국무회의록 문서에도 '촉석루 보수(補修) 관계 보고'라고 해 보수만 진행됐던 촉석루에 대한 지금의 등급은 문화재의 원래 가치보다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조서윤 해설사는 "화재로 손실됐던 국보 1호 숭례문는 재건립된 후에도 국보를 유지하고 있다"며 "촉석루도 국보 또는 보물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해설사는 논개(論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만여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이때 진주성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아래의 의암바위로 유혹해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이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가락지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교각상부에 논개 충절의 상징물로서 만들어져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촉석루는 이러한 논개의 정신은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 전북 제일의 정자 수선루(睡仙樓)

전북 제일의 정자라고 불리우는 수선루는 섬진강 천변의 산기슭 암굴에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숙종12년(1686년)에 연안송씨 사형제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건립한 것으로 고종21년(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고 1888년 연재 송병선 등이 재중수했다고 전한다.

'진안군지'에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으며 수선루 사변(四邊)에는 '연안송씨수선루통문(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갈건포의 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해 협서성의 상산에 은거한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수 등의 기상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자연암굴을 이용해 이층으로 세워진 수선루는 이층 중앙에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있고 1층의 문을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특히 동굴속에 지어진 것으로 희귀한 정자로도 불리면서 전북제일의 정자라는 명칭을 받고 있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

# 너와를 사용한 영모정(永慕亭)


영모정은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6년(1869)에 세워진 것이다.

전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너와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정자 아래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원형주춧돌을 사용하고 있고 원형주춧돌을 이용하고 있다.

정면에 있는 4개의 기둥(평주)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세워져 다른 것 보다 1m정도 더 내려와있다.

누정의 남쪽내부 중앙에는 '영모정(永慕亭)'과는 다르게 '영벽루(永碧樓)'라고 쓰여진 현판과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은 상량문이 걸려 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676 )

# 수몰의 역사 간직한 태고정


태고정은 용담면 소재지 서북쪽 주천으로 향하는 도로의 남쪽 언덕, 주자천변의 절벽위에 잇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 1530)에 의하면 당초 태고정이 있은 자리엔 이미 15세기말경에 현령 조정이 지은 이락정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현종7년(1666)에 당시의 현령 홍석이 크게 고쳐 짓고 이름도 태고정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홍석은 현종 5년에 용담 향교를 개축하고 삼천서원을 창건했다.

1911년 태고정은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국가재산으로 강제 몰수 공매 처분 되었는데 그때 송림리의 임소환이 250원에 구입해 용담군의 공유물로 정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태고정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춘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지붕의 누각으로 송준길(1606~1672)이 쓴 태고정(太古亭)의 현판과 송시열)이 쓴 '용담현태고정기(龍潭縣太古亭記)'의 현판이 있고, '태고정중수찬조인방명기(太古亭重修贊助人芳名記)' '용담팔경(龍潭八景)'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전북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4)

/김병학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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